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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어떻게, 왜? (시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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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세종 목사 (울산소망교회)

할렐루야!
오늘은 무엇을, 어떻게, 왜? 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를 위해 신령한 복을 이미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은총이 성도 여러분 위에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하는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또 지금 그 분을 믿고 앞으로도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을 따라야만 하고 내 인생의 전부를 그분의 생각대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하나님을 불과 같은 존재일 것이라고 대답을 하였고, 또 어떤이는 "물과 같다"고 정의를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조차도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 땅 노예의 생활에서 해방시키려고 하였을 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누구냐 물으면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오리이까?"라고 모세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기서 매우 우리 신앙에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껏 하나님은 확실하게 자신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소개하시질 않았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사람의 생각을 참조하신 다거나 사람과 의논하지 않으시고 그냥 혼자 모든 것을 다 하였습니다.
천지창조 이전에 대해서는 어떤 분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출 3장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하나님은 이 질문을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세요!
세상 사람들! Non Christian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왜 교회에 다니느냐?"
"너희는 왜 하나님을 믿느냐?"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아! 난 무교야 무교. 종교를 안 가지니까 이렇게 편하다니까"
어떤 모양이든지 우리에게 질문을 할 때 이 물음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 답변을 하십니다.
출 3:14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I am that I am" "Ich bin der Ich bin"
이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스스로 존재한다는 말은 어떤 환난이 와도 사람들이 뭐 무교니, 불이니, 물이니. 다 슬데 없다, 언제 한번 시간 맞춰서 나를 도와 준적있냐?
별 소리를 다 한다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존재를 그대로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대로 변함이 없으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계1:4에도 "하나님은 이전에도 계시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고 하였고
계 1:8에서는 "그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이요 나중이다"라고 소개하면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으며 언제나 어디서나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말살하려는 의도와 행동들이 얼마나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구약성서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서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였습니다. 또 사람들이 바벨이라는 탑을 쌓아서 하나님 대신 우주의 신과 교통하려고도 하였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근세사를 생각해 보세요.
히틀러는 유대인을 600만 명이나 학살을 하면서 아리안 족들로 하여금 세상을 지배하려고 하였고 2차 대전 이후에는 공산당, Marxism이 출현해서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이 땅에 천국을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하자 이 지구의 인구 1/2이 그 사상에 빠져서 70년 동안이나 헛된 망상을 쫓을 정도였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침략해서 교회를 불지르고 신앙인들과 투옥하였습니다.
심지어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에 절하지 않는다고 해서 못이 박혀 있는 판을 깔아 놓고 그 앞에 신사를 세워 놓고 그 위를 걷게 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질 것이라고 못 판 위를 걷게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주기철 목사님은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드시고는 이런 찬송을 부르셨습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 곳에 서게 하소서
그 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한 걸음 한 걸은 그 판을 밟으실 때마다 그 대못이 발바닥을 뚫고 발등까지 솟구치는데 시뻘건 선지피가 튀어 오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순사가 목사님 머리 한번만 조아리시면 될텐데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세요 하며 오히려 못 판에서 내려오게 했다는 말까지 전해져 내려옵니다.

왜 일본은 우리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잔악하게 학대하였을까요?
신사에 절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이 한가지! 그리스도인들은 그 마음이 변질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왜 변질되지 않는지는 몰랐습니다.

자 여기서! 질문 들어갑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은 변질되지 않을까요? 기억하세요!
그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변질되지 않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알파요 오메가가 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으셨으면 아멘!
이 불변의 진리를 믿으시면 아멘!
이 변질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에게 오실 때에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면서 낮에는 졸지 않으시고 밤에는 주무시지 않으시면서 70×7이라도 용서해 주시면서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 주시는 세상 마지막 날까지 함께 해주시는 분!
바로 이런 하나님을 믿게되면 우리도 그 모습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이 파괴되지 않습니다. 변질과 싸워 이기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영이 내 속에 계시니 절대로 싸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누구냐? 왜 믿느냐? 라고 묻거든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까지 끝까지 끝까지 사랑하시며, 변질되지 않는 분! 바로 그 분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두 번째> 어떻게 변질되지 않으시며 세상 끝 날까지 나를 지키시고 돌아보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성경에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22:37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여기 '다' 라는 단어가 세 번씩이나 나옵니다.
'다' 라는 의미는 전부라는 거죠.
이 '다' 라는 뜻을 마 6:33에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하며 "먼저"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네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가치는 최고의 가치요 인생에 최고의 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도요한은 계2장에서 "죽도록 충성하라" 하였고 베드로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쫓았다" 하였고 사도바울은 "사나 죽으나 난 주님의 소유다"라고 고백하며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라스베가스 순복음 교회에는 하반신이 마비가 되어서 두 개의 지팡이를 의지해서 걸으시는 장로님이 계십니다.
그저 믿고 돈을 꿔주고 보증도 서 주었는데 그냥 모든 것을 다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운영하던 사진관까지 다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 돈 많던 분이 이제는 수중에 딱 2천$ 밖에는 남는 것이 없더랍니다.
그 주간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부흥 강사가 그러더랍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주머니 속에 있는 것 다 드려서 교회 건축을 완공하십시다.
그런데 장로님의 주머니 속에는 이제 2천$밖에 없는데 몸이라도 성해야 막노동이라도 하죠.
갈등이 되더랍니다.
아니! 망하고 망해서 남는 게 이건데 이걸 다 내놓으면 당장 내일 아침은
그거 생각하니까 세상이 다 복잡하더랍니다.
에이! 하나님 알아서 해 주시겠지
장로가 되어서 길바닥에 나 앉으면 장로 망신당하면 하나님 망신이신데 그냥 내 버려 두시겠나 하면서 마지막 2천$을 다 드리고 예배를 마친 후 이제 쫓겨 나갈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날 저녁 기적이 일어났겠어요 어떻겠어요? 그냥 시간은 흘러 흘러 약속 없이 훤하게 새벽은 밝아 오더랍니다.
이제 입은 옷 한번 걸치고 나가야 되는데 딩동!딩동!
누구세요!
장로님계세요. 하는데 그 장로님에게 돈을 빌려간 분이 왔더랍니다.
뭘 큼직하게 신문지에다 싸 가지고 왔는데 앞에 펼쳐 놓으면서 장로님! 장로님한테 빌려간 돈 중에 다는 못 가져왔지만 여기 먼저 2만$ 가져 왔습니다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나머지는 며칠 후에 바로 갔다 드릴께요
그 때 장로님이 지팡이를 땅에 내려놓고 그 사람을 붙들고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아! 하나님! 저는 겨우 어제 2천$ 드렸을 뿐인데 하룻밤사이에 10배로 갚아 주시는군요 .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분이 아무리 많고
우리의 전부가 아무리 적다해도 우리의 전부를 다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우리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이 이 세상에서는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요일 4장 "하나님을 사랑한다하며 눈에 보이는 사람을 미워한다면 거짓말쟁이라"

이 향유를 가져온 여인을 보세요.
한 방울, 두 방울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 "깨뜨려 부었다"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아직 깨지지 않았어요
아직도, 의심의 감옥소에 갇혀 있습니다.
아직도 긴가 민가 하는 돌 속에 있습니다.
아직도 원망과 불평의 웅덩이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아직도 10년 전에 묶였던 감정의 시궁창 속에 들어가 앉아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난 기분 나빠! 하며 탈색된 얼굴 속에 분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그런 것들을 깨뜨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독생자를 사람으로 성육신 시켜서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고난받게 하시고, 죽이시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시면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사람에게 나타나면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면 우리도 사람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우리에게 질문을 합니다.
왜 믿니? 왜 다녀?
저는 지난 주 울산 지방의 교역자들과 사모님들이 일본선교여행을 하였습니다. 우리를 가이드 하는 사람이 지난번 병원선교회 때 같이 갔던 바로 그 분이었습니다.
저하곤 구면이죠! 일본에서 돌아오는 배편에서 저에게 말을 하더군요
목사님! 목사님 교회는 어디에 있어요?
예! 저희 교회는요 울산 동구청 옆에 현대 목재 아파트가 있는데 바로 뒤쪽에 소망감리교회가 있습니다. 우리교회 전화는 052-236-8991이고 제 아네 핸드폰 번호는 011-739-4952입니다. 그런데 왜?
아니요! 이렇게 가이더 하다 보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하면서 허전할 때가 있어요. 시간이 맞으면 교회에 가서 좋은 이야기 듣고 싶은데 아! 목사님 저는 세미나 때 강의가 너무 좋던데요 또 목사님을 두 번째 뵈는데 언제나 조용하시고, 말도 없으시고 농담은 안 하시고, 그리고 두 분이 참 행복해 보이네요.
그래요! 아! 얼마든지 오세요!

이 가이더는 저에게 왜 예수를 믿느냐고 입을 열어 묻지는 않았지만 이미 말없이 저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에게 왜 믿느냐? 의 두 가지 질문 중에 한가지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는 대답해 준 듯합니다.
물론 예수 믿고,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내세에는 영생에 이르는 새 하늘, 새 땅이 우릴 향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왜 라는 질문에 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첫 단계 행복하게. 평안한 모습으로. 다른 삶들을 위로하면서, 새 힘을 주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모습으로 대답을 해주어야 합니다.

입을 열어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의 모습을 눈으로 바라다보면서 묻고 있는 사람도 있는 거예요.
왜? 믿느냐. 왜? 라고 묻고 있는 삶들을 행해서 우리는 어떤 모습을 나타내 주어야 합니까?
그 정확한 답은 딤후 3:15-17까지에 아주 정확하게 다타나 있습니다. 다같이!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기억하세요!
현대 사람들의 질문은 "하나님이 누구시냐?"라는 물음보다 "너희는 왜 하나님을 믿느냐? 왜 교회에 다니느냐?"라는 왜? 라는 질문을 더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믿느냐? 라고 질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 라고 이야기 해 준다면 이건 동문서답과도 같은 대답이 될 것입니다.
왜? 라는 궁금증이 풀어지지 않기에 황사를 맞아가면서도 놀러 다니는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왜 하나님을 믿느냐? 왜 교회에 다니느냐? 라는 물음에 확실한 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 대답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다"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분을 어떻게 섬겨야 하느냐? 묻거든 입으로 대답해 주세요.
그러나 왜? 그분을 믿느냐? 당신은 왜 교회에 다니느냐? 고 물을 땐 나의 삶의 행동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하나님의 의지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맡기고서도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 나누어주면서도 즐거워하는 내 모습. 가정이 화목하게 살아가고 있는 내 삶의 현장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질문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아하 그렇구나 하면서 그들도 하나님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됩니다.
입으로 가르치고 온 나의 삶을 전도하며 세상의 영혼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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