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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건강한 가정 (행 10: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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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성덕 목사 (내일교회)

내일교회의 목회원리는 균형 있고 건강한 교회입니다.
즉 내일교회는 균형 있고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입니다.
마찬가지로 내일교회 성도의 가정도 균형 있고 건강한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한 가정이란 바로 건강한 가정을 말합니다.
건강한 가정만 되면 자연적 성장이 이뤄집니다.
그럼 건강한 가정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고넬료 가정을 통해 교훈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고넬료가 어떤 사람이냐?
고넬료는 당시 로마의 총독과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가이사랴에 거주하는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입니다.
가이사랴는 원래 시돈 사람들이 살던 지역이었으나
B.C. 63년 로마에 의해 정복되어 헤롯 대왕에게 하사되었습니다.
헤롯은 거의 12년에 거쳐 이 도시를 새로 건설하여 자신을 후원해 준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를 기념하는 뜻에서 그 이름을 가이사랴로 불렀습니다.
가이사랴에는 모두 다섯 대의 군대가 주둔해 있었는데
그 중에 네 대는 토인들로 구성되어지고
한 대는 '이달리야대' 로서 로마인들로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한 대는 600명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백 명씩 지휘하는 여섯 명의 백부장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이달리아 대의 지휘관들 가운데 하나인 백부장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어디에 소속이고 계급이 무엇이냐? 가 아닙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어떻게 된 일인지
로마의 황제를 절대적으로 추종하던 황제숭배자들로 구성되었을 이 부대의 지휘관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그에게 예수님을 전해 주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들로 자처하던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도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방인이요, 로마인이요, 황제에게 절대 충성을 하는 군대의 지휘관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이건 보통 일이 아닌 것입니다.

고넬료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이상 중대한 것은

1)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억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4절에 하나님이 왜 고넬료를 기억했다고 그랬을까요?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7:21이하에 보면 <2>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으나
하나님은 저들을 향해서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합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기억해 주지 않아도
하나님께 기억되는 자는 승리자임을 믿으세요.
하나님께 기억되는 인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넬료는 온가족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니까 하나님이 고넬료를 기억하신 겁니다.

2) 22절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칭찬 받는 자입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장교입니다.
유대나라가 로마의 지배를 받던 때니까 민족의 원성의 대상의 되기 쉽죠 또 고넬료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이방사람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22절에 고넬료 집안에 하인들이 그를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오랜만에 한번씩 만나는 사람에게 칭찬 듣기는 아주 쉽니다.
여러분들이 저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혹 우리 목사님은 참 좋으신 분이야 이렇게 칭찬하기 쉬워요
그러나 제가 아내한테 혹은 우리아이들한테 칭찬 받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우리 부목사님들이나 우리 전도사님들과 교회직원들이
저에 대해서 칭찬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잘 아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고넬료에 대해서 가장 원망이 많을 수밖에 없는 하인들이 칭찬합니다. 집안 식구로부터, 부하 직원들로부터, 주위 친구로부터
칭찬 받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차별 없음을 보여주는 첫 번째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첫 열매인 것을 말합니다.
첫 열매가 어떻게 열리느냐? 에 따라 다음 열매가 결정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신앙의 첫열매들 되시기 바랍니다.

고넬료가 이방인들 가운데 예수를 처음 믿었다는 것 귀한 일입니다만
우리에게 더 귀한 교훈을 주는 사실은
고넬료는 건강한 가정의 신앙의 가장이라는 것입니다.
건강한 가정의 특징이 무어입니까?
성경을 통해서 건강한 가정을 조감도로 그려보면 건강한 가정은

첫째, 말씀의 터 위에 세운 가정입니다. 시127:1절 ][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 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선 무엇으로 기초하여 집을 세우길 원하실 까요?
말할 것 없이 말씀입니다. 신앙의 가정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말씀의 터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면 흔들리는 가정임을 명심하십시오. 마7:24절 이하에서 말하는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바로 말씀 위에 세운 집을 말합니다.;

둘째, 사랑과 복종의 기둥이 서 있는 가정입니다.
기초를 놓았으면 기둥을 세워야 합니다. 아내와 남편은 가정의 기둥과 같습니다.
부부싸움이 자주 일어나는 가정의 자녀들이 정서적으로 불안정하여
건전한 인격형성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적인 부부관계는 이러합니다.
아내가 세울 기둥은 복종의 기둥입니다.
엡5:22절 이하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반면에 남편이 세워야 할 기둥은 사랑의 기둥입니다.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 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남편 되고 매력 있는 아내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꿈과 소망의 창문이 있는 가정입니다.
창문이 없는 집을 짓는다면 답답할 것입니다.
그건 감옥이지요. 창이 없으면 안과 밖이 단절되어 버립니다.
창문은 가정과 세상을 연결하는 매개체입니다.
자식은 창문과 같습니다. 자식이 없는 가정은 그 대로 끝납니다.
시127:3절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 자녀는 하나님께서 허락한 상급입니다.
성경은 자녀를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128:3)고 했습니다. 이는 자식이 꿈과 소망과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엄마의 품에서 자라는 자식이 꿈과 소망인 것처럼
사랑과 순종의 기둥 사이에는 미래를 보는 창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정의 자녀가 신앙으로 미래를 열 수 있는 자입니까?
아니라면 아무리 건강해도, 아무리 똑똑해도 희망은 아닙니다.
신앙의 자녀가 될 때 미래를 열 수 있는 창문이 됩니다.

넷째, 경건생활로 지붕을 덮은 가정입니다.
말씀의 터, 순종과 사랑의 기둥, 꿈과 소망의 창,
이후에는 경건생활로 지붕을 덮어야 합니다. 
아무리 흠 없는 가정처럼 보여도 경건생활을 안 하는 가정은 지붕 없는 집과 같습니다.
성경의 위인들은 모두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은 가는 데마다 제단을 쌓았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기도와 예배의 생활을 생활화한 사람들입니다.
부부와 자식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다 건강한 가정은 아닙니다.
건강한 가정이 되려면 경건한 가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경건이란 말이 원문에는 '유세베스(Usebees)'란 단어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잘'을 나타내는 '유'와 '경배한다, 공경한다, 섬긴다'는 뜻의 세보(sebo)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즉 경건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경배하고, 잘 섬기며, 잘 공경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넬료가 경건하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 잘 섬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많은 사람들이 경건을 외적모양으로 그릇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외적 모양만을 놓고 본다면, 로마군인인 고넬료보다
예루살렘의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훨씬 경건해 보이고
또 실제로 당시 사람들 역시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전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드러난 외적모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경건의 내적 바탕입니다.
이 시대에 지켜가기 어려운 성품 중에 하나가 경건입니다.

현대를 가리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특징은 기존의 가치간을 송두리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뉴에이지 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주의입니다. 이기적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 더 잘 섬긴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딤후3:5절에 보면
[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에게서 돌아서라 ] 고 합니다.
즉 경건은 껍데기만 가지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경건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떻게 나타납니까?

1) 경건은 능력입니다. 영향력이 있습니다.
2절에 [ 고넬료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 합니다.
욥1장에 욥은 경건하고 의인이라고 합니다. 
욥기1:4-5절에 [ 욥은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칫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 고 합니다.
경건은 결코 <나홀로 집에>가 아닙니다.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어 있습니다.

2) 경건은 사랑의 손길 즉 구제로 나타나야 합니다.
약1:27절 [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
이런 면에서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자기 식민지 백성들이지만 그들을 많이 구제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구제했는지 하나님이 그 구제를 기억했다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맘만 먹으면
식민지 백성들을 통해서 돈을 얼마든지 긁어 모을수 있는 위치입니다. 얼마든지 세속에 물들어 관행이라는 명목하에 축재도 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가이사랴는 큰 도시입니다. 눈만 끔쩍해도 벌벌 떨고 갖다 줄거예요
그런데 고넬료는 그르지 않고 자기가 사랑을 베풀었어요.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과 백성들에게 칭찬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소금이 그 맛을 낼려면 소금 자체가 녹아져야 되는 거예요.
녹아지는 희생이 없이는 맛을 낼 수 없어요.
불이 빛을 발하려면 기름이 타면서 빛을 내는 것이에요.
그리스도인들이 좀 희생하세요.
사회에 나가서 벌려고만 하지 말고 주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쓰세요.
대접받기만 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대접하세요.
사랑을 받기만 하려고 하지 말고 사랑을 주세요.

3) 경건한 사람의 특징은 바로 기도입니다.
고넬료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이 살아있는 첫 번째 증거가 바로 기도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하는 게 호흡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쉬지 말고 숨쉬듯이 기도하라 한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몸은 산소가 계속 들어오고 나가지 않으면 몸이 썩습니다.
그래서 호흡이 끊어지면 맨 먼저 하는 게 막는 겁니다.
콧 구명 귓 구명 그리고 입을 막습니다. <6>
죽은 사람 한 시간 후에 가서 냄새 맡아 보면 코에서 입에서 냄새가 납니다.
우리 영혼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기도해서 성령에 새바람을 들여 마시고
우리 삶속에 만들어진 죄악의 찌꺼기들이 밖으로 분출되지 않으면 우리 영혼의 사람에게 냄새가 나고 더 심하면 썩습니다.
기도를 통해 그러니까 호흡하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기도하지 않고 믿음생활 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던 고넬료는 일가와 가까운 친구를 모았습니다.
이말은 고넬료는 전도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예배의 사람, 사랑의 사람, 기도의 사람, 전도의 사람, 겸손의 사람,
정말 신앙생활이 아주 완벽한 신앙이 아주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 중에 고넬료를 기억하신 것입니다.
고넬료의 경건은 구제와 기도로 나타나 하나님이 기억하신 바 되었습니다.

그럼 오늘 우리의 기도와 구제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3절에 고넬료가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4절에 그 환상은 천사가 나타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 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우리도 기도와 구제를 하되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와 구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가 어떤 기도입니까?
마6:6절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고넬료는 제 구 시쯤 되어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제 구시라 하면 오후 3시입니다.
팔레스틴 지방에는 오후 3시라 하면 낮 잠자는 시간입니다.
다른 사람은 낮잠 잘 때 고넬료는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남달리 은밀히 기도하는 가장이 되고 기도하는 어머니가 된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 가정을 기억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상달되는 구제가 어떤 구제입니까?
마6:3-4절에 [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 고넬료가 구제했다는 것은 구제를 크게 한 두 번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사람이기 때문에
구제하는 것이 삶에 베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고넬료의 가정을 통해
건강한 가정이 어떤 가정인가를 정의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가정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될 만큼
영적인 생명력이 넘치는 가정입니다.
건강한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건강한 가정이 되기 위하여
신앙생활에 자기 원칙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하여 매일 운동하듯이
경건을 위하여 매일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딤전4:8절 [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
우리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어진다면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복을 주시고 내생에도 영원한 것으로 갚아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건강한 가정의 생명력이 어디서 옵니까?
환상 중에 천사가
4절에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절에 [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 합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집안 하인 둘과 경건한 사병 한 사람을 붙여
욥바에 있는 베드로에게 보내어 청하여 왔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왔을 때
25절에 [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
베드로가 일으켜 하는 말이 [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 합니다.
그리고는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한 사연을 이야기 한 후
33절에 [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
고넬료의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세상적으로 말하자면
로마군대의 백부장이 일개 어부 출신 베드로에게 무릎 꿇을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명령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베드로가 왔을 때
엎드려 절하며, [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 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건강한 가정의 생명력이 어디서 오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주의 종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33절에 고넬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 ] 이라 표현할 때
사용한 '명하다'는 동사 'prostasso(프로스탓소)'는 두 단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즉 '어디를 향하여'란 의미의 전치사 'pros'와,
'정리한다'는 뜻의 동사 'tasso'가 한데 어우러진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를 보다 원 뜻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순서에 따라 제대로 정리 정돈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즉 고넬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그 말씀 속에서만
자기 인생이 바른 순서에 따라 제대로 정리됨을 알았던 까닭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생의 우선 순위를 제대로 정리해주는
바른 기준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는 베드로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평소 인간 이하로 취급하던 피장이 시몬의 집에서 유숙한다든지, 이방인과의 접촉을 죄악시하던 관습적 모순을 과감히 깨트리고
이방인 고넬료의 청에 응할 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는 자신의 물음에 대한
고넬료의 답변이 끝나자마자
베드로는 본문 34절-35절을 통해 다음과 같이 감탄하고 있습니다.
[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
여기에서 사람의 외모란 유대인 여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닌 유대인이냐 아니냐를 따지시는 분이 아니라, 그 중심에 하나님을 모신 사람이라면 누구든 받으신다는 중요한 사실을
베드로는 고넬료에 대한 자신의 경험으로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절대 순종했던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베드로가 깨달았다고 말할 때
사용된 단어 'katalambano(카탈람바노)'의 본뜻은
'붙잡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복종해야 할 명령으로 알아 준행하면서
베드로가 대체 무엇을 붙잡았다는 말이겠습니까?
그가 붙잡았던 것은
바른 우선 순위에 따라 바르게 정리되어 가는 바른 삶이었습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 절대 순종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심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한 베드로에게,
어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바른 우선 순위의 정돈된 삶이 주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스라엘 변방의 어부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만인이 우러러보는 위대한 사도가 되었을 턱이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나 고넬료나 모두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명령으로 받아들임으로
자신들의 삶을 영원히 정돈된 삶으로 건져 올렸습니다.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영원히 정돈되지 않았던들,
2천년 전 하찮은 갈릴리의 어부나 로마군대의 초급장교에 불과한 인물을 우리가 알 리도, 알아야 할 까닭도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건강한 가정의 생명력은
하나님 말씀 속에서만
자기 인생이 바른 순서에 따라 제대로 정리됨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대하는 겸손한 자세인 것입니다.

<결론>

건강한 가정 되세요
건강한 가정 되면 행복한 가정 절로 되어 집니다.
오늘 고넬료 가정은 건강한 가정입니다.
경건으로 지붕을 덮은 가정입니다.
그 경건이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이 기억하는 복된 가정이 된 것입니다.
이런 건강한 가정의 생명력은
하나님 말씀 속에서만
자기 인생이 바른 순서에 따라 제대로 정리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말씀 앞에 겸손한 자세인 것을 꼭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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