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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눅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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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목양교회)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더구나 이 선물은 단지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선물입니다. 부모가 지는 책임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회인으로 키워내는 것이야말로 부모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이 시간 저는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통해서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가?’에 관해서 말씀해 드리려 합니다.

첫 번째로, 지혜로운 아이로 양육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의 교육열은 전 세계가 다 알아줄 정도입니다. 자녀 교육열로 치자면 한국인들을 따라올 민족이 없을 것입니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이란 고사가 무색할 정도로 극성스럽습니다. 어느 사회 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자녀 양육비가 월 소비지출의 절반을 넘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약 30%-50%는 사교육비가 차지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학교 교육이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는 것은 교육 당국에도 책임이 있지만, 그 보다는 학부모들의 책임이 더 크다고 봅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내 자식이 더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에 진학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쟁적으로 과외를 시키다 보니 오늘과 같이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입니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인한 최대의 피해자는 어린 자녀들입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이 학원 저 학원을 찾아다니면서 고생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 딱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일류 대학에 들어가서 이 사회에서 행세하고 사는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는 대학 입학시험에 필요한 과목들만 잘하면 되므로 학교나 학원 그 어디서도 더불어 사는 법이나 사람 됨됨이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교육 기관마다 전인교육을 목표로 내세우지만 그것은 한갓 구호에 불과합니다. 악착같이 공부해서 남들보다 유리한 조건을 차지해야 한다고 끝없는 경쟁만 가르칩니다.

그러다보니 공부를 많이 할수록, 일류 학교를 나올수록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요즘 우리사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 그것도 일류대를 나오고 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은 우리의 교육이 얼마나 왜곡되었는가를 말해 줍니다.

그러면 가정에서라도 사람 됨됨이를 가르쳐야 할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 의식이 없는 부모가 많을 뿐 아니라, 혹 의식을 갖고 있더라도 자녀들을 가르칠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결과, 아이들이 이것저것 배워서 지식은 많이 알고 있는데 사람답게 사는 법을 제대로 모릅니다. 공부는 많이 했으나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말과 행동이 지혜롭지 못합니다.

지혜는 주입식 공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학교나 학원에서 터득할 수 없습니다. 지혜는 깊이 생각하는 훈련을 통해서 얻는 것입니다. 교육부에서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논술 시험을 치르게 하였으나 이 역시 시험을 위한 준비에 불과하므로 사색을 위해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잠언 9장 10절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그 배운 바 지식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리하여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었어도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이 아메바에서 진화했다는 진화론을 진리인양 믿습니다. 시편 14편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신 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고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를 보세요. 이들은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었을 적에 포로로 잡혀갔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소년들로서 바벨론 왕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도 왕이 하사하는 진수성찬을 거부하고 채소만 먹었습니다. 그 이유는 왕이 내리는 음식은 우상의 제물로 만든 것이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소년들은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보다 얼굴이 더 윤택하고 건강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모든 소년들보다 지혜가 탁월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다니엘서 1장 17절에는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신본주의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지혜를 주셨으므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이들을 면담해 보니 모든 방면에서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지라 측근에서 왕을 모시게 했습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의 자녀들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원하신다면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섬기는 일을 그 어떤 일보다 우선적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치십시오. 학교 공부보다 하나님 섬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자녀들에게 심어주십시오. 먼저, 하나님을 섬기고 그 다음에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게 하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어디를 가든지 빛을 발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 사랑 받는 아이가 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열 한 번 째 아들이었는데, 그만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은 이십에 팔려 먼 애굽에 끌려갔습니다. 그 때 요셉의 나이 열일곱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하던 요셉이 물설고 말 설은 타국에서 종살이를 하게 되었으니 그 고초가 얼마나 심했을까요? 그러나 정작 요셉은 어디를 가든지 주인에게 인정을 받고 대우를 받았습니다.

창세기 39장 2절 이하에는 이같이 증언합니다.

“2)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4)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5)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하나님께서 애굽인 보디발의 집에 복을 주신 것은 순전히 요셉 때문이었습니다. 보디발은 우상 숭배자였지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일로 그만 그 여자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누명을 쓰고 국사범을 가두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옥에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39장 21절로 23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21)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요셉은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지만 거기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복을 주셨습니다. 그는 그 얼마 후에 바로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삶이 이 처럼 형통하고 영광스러웠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요셉이 하나님의 사랑을 그처럼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잠언 8장 17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요셉은 하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열 두 형제 중에서 가장 신앙심이 깊은 아이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어린 요셉에게 두 번씩이나 꿈을 통해 앞날을 계시하신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다윗 왕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그러나 본래 다윗은 베들레헴 촌구석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었습니다. 그는 여덟 형제 중 막내로서 집에서도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이새도 다윗을 무시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그의 집을 방문해서 아들들을 다 불러오라고 했을 때, 이새는 다윗을 제외시키고 일곱 아들만 사무엘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셨으므로 그를 들어서 위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린 사람은 이스라엘 군대의 용사들이 아니었으며, 그의 유능한 형들이 아니었고, 시골에서 목동 노릇을 하던 다윗이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시기해서 죽이려고 수년 동안을 쫓아다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사울 왕과 그의 세 아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나자,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파격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가 지은 시편 18편 1절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성도님들의 자녀들이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앞날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다윗과 함께 하시며 그의 삶을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자녀들에게도 동일한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대한 복된 약속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하였고, 신명기 11장 13절로 15절에는 “13)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14)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녀들의 앞날을 위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식으로 자녀들을 양육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도록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요셉이나 다윗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아이들로 키우십시오. 아무리 최신 지식을 많이 배워도 세월이 지나면 구식이 되고 맙니다. 많은 재산을 물려줄지라도 그것이 언제까지나 자녀들의 수중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유력한 사람들을 많이 사귈지라도 그들 역시 세월과 함께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므로 그를 경외하는 자들을 영원히 지켜주십니다.

흔히 공부만 잘해야 성공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맞지 않습니다. 이제 학교 공부만 가지고 승부를 거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다원화된 21세기에는 창의성과 다양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르기 때문에 공부 성적이 나쁘다고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에게 있는 다른 재능을 찾아내서 연마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하나님의 신을 충만하게 하시고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를 주셔서 성막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 기구를 금과 은과 놋과 보석으로 만들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술적인 재능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신명기 6장 4절로 5절 말씀을 자주 암송합니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리고 모세는 명하기를 “6)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십시오. 그리할 때 여러분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요셉과 다윗처럼 언제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위대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아이가 되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사람을 가리켜 사회적인 존재라고 합니다. 이 말과 같이, 사람은 외딴 곳에서 혼자 살 수 없고 많은 사람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입고 쓰는 물건 가운데 우리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은 전무합니다. 다 누군가가 수고해서 만든 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른 사람들의 존재가 매우 소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서로서로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나만 잘 살겠다고 남을 짓밟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에게도 손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사는 방법을 찾아야지 너는 죽어도 나만 살면 된다고 하면 모두에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나의 권리가 중요하면 다른 사람의 권리도 중요함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윤리적인 생활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않는 것이 윤리의 기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한 차원 더 올려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친절한 대접을 받고 싶거든 내가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고 내가 먼저 상냥하게 인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인정을 받고 사랑을 되돌려 받게 됩니다.

과거에는 한 가정에 자녀들이 보통 대여섯 명은 되었으므로 부모님이 일일이 챙겨줄 수가 없었습니다. 또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경제 사정이 매우 열악했기 때문에 먹고 입히고 공부시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옷을 한 벌 사면 형부터 막내 동생까지 물려가면서 입었고, 교과서나 책가방도 물려받았습니다. 몽당연필을 붓대에 끼워서 알뜰하게 사용했고, 종이 한 장도 아껴서 썼습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우리민족 5천년 역사에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나서 고생을 모르고 자라납니다. 또 집집마다 자녀를 한 둘밖에 낳지 않고 많아야 서너 명입니다. 그러다보니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쏟아 붓는 정성이 대단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는 시대인데 부모들이 자기들이 어려서 누리지 못한 데 대한 보상을 자녀들에게 하다 보니 대부분의 자녀들이 과잉보호 상태에 놓여 있는 실정입니다.

이로 인해 생겨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자녀들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또 참을성도 부족합니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이런 식으로 양육 받은 자녀들은 원만한 사회생활을 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만 성공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끔 양육해야 합니다. 남을 배려하고 양보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자기 자녀들이 사회적으로 크게 출세하기를 바라는 경향이 강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저의 아버지로부터 “너는 이 다음에 커서 대통령이 되야지” 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아마 저의 아버지 뿐 아니라 그 당시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자기 아들들에게 그런 꿈을 심어주려고 했다고 봅니다.

선생님들도 비슷했습니다. 반 아이들에게 김유신이나 워싱톤 대통령과 같은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희도 그런 인물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꿈을 심어주려고 했습니다. 만일 그런 아버지나 선생님에게 농부가 되겠다거나 상인이 되겠다고 말했다가는 한심한 녀석이라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요즘 부모님들 가운데는 자녀들에게 그런 식으로 요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이 사회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성공 출세하기를 바라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성공 출세하는 것과 사람답게 사는 것을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새롭게 규명해야 합니다. 행복한 삶이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해서 지배하는 삶이 아니라 서로서로 돕고 협력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죄 있는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겠습니까? 또 세상에 오셨더라도 귀족의 가문에서 탄생하셔서 대접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셔서 그 자신 목수로서 생활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고달픈 삶을 몸소 체험하심으로 우리를 더 깊이 이해하시고 동정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군림하여 대접 받는 삶이 아니라 종으로서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뿐 입니까? 드디어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자기의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저와 성도님들이 구원을 받고 영생의 소망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세계를 지배한 알렉산더나 나뽈레옹과 같은 영웅입니까, 아니면 수천억의 재산을 모은 재벌 총수들입니까, 아니면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는 정치가들입니까? 그런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해 준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 가운데 그 누가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렸습니까?

우리의 자녀들 가운데서도 정치가도 나오고, 경제인도 나오고, 군인도 나오고, 학자도 나와야 합니다. 사회 각 영역에서 일할 훌륭한 인물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위치에 설지라도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이웃을 행복하게 해 주려는 사람이 되도록 어려서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자녀들 역시 이웃으로부터 사랑 받고 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본문에 보니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간략하게 진술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갓난아이 적에는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나셨으며,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지혜가 자라고 키가 자라났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시나 우리와 똑같은 성장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한 가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어려서부터 어른이 되시기까지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온전한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어려서는 순진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가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사악해지고 때 묻고 추해져 가는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 지혜롭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번창하는 사업이 교육 사업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저마다 가장 특색 있고 효과적인 교육방법을 개발했다고 내세웁니다. 성도님들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감언에 넘어가지 마시고, 오늘 말씀과 같이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침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게 하시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침으로 이웃으로부터 사랑 받는 자가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자녀들을 양육하심으로 반드시 복되고 아름다운 결과를 거두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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