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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사랑이 넘치는 가정 (엡 3: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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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복한 인생이란?

행복한 인생이란 어떤 삶을 말합니까?
여러 가지 정의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감사가 샘솟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정의 회복을 위해서는 서로를 고마워하고 사랑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사랑과 감사가 샘솟고 있습니까? 

감사는 우리의 인생을 밝혀주는 등불입니다. 감사는 인생을 살맛 나게 만들어 주는 명약입니다. 감사는 인생에 행복을 안겨주는 비방입니다. 감사가 사라진 인생은 메마른 삶입니다. 감사가 떠나간 인생은 바로 낙원을 잃어버린 삶입니다.

  오늘 많은 가정들이 이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서로를 향한 고마움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감사하기 보다는 탄식과 불만이 불끈 불끈 치솟고 있습니다. 사랑의 언어보다는 비난과 책임을 떠넘기는 말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각 가정은 언제 폭발해 버릴 지도 모를 시한 폭탄과도 같습니다. 폭발은 시간문제인 가정이 많습니다.
진정한 사랑, 진정한 감사의 회복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를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의 본래적인 모습을 시급히 되찾아야 할 때를 맞이했습니다.
  이런 숙제를 안고 대하게 된 말씀이 오늘 에베소서 3장의 말씀입니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옥중에 있을 때 써보낸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편지는 무엇을 믿는가?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는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기도 제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기도 제목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 될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사도 바울은 3:16의 말씀대로 에베소 교회 교인들, 아니 우리들의 속사람이 성령을 통하여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속사람을 새롭게 지으십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속사람을 강건케 만듭니다.

(2) 둘째는 3:17에 기록된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모셔드리는 우리의 응답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인생 속에 오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됩니다.

(3) 셋째는 3:17 후반절부터 시작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를 깨닫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 안에서 임하는 온갖 충만함으로 충만케 채움 받기를 기원했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충만케 하심을 맛보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2000여 년 전 에베소에서 살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기도 제목이며 그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는 바로 21세기, 워싱톤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향한 기원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그의, 아니 우리 주님의 간절한 기도이며 바램입니다.

여러분, 감사가 샘솟는 복된 가정의 회복도 이 말씀 속에서 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결혼생활이 벽에 부딪치고, 가정에 어려움과 탄식이 찾아오게 되는 원인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 하나는 서로가 자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 사이의 사랑도 자라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자란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한다는 것은 언제나 아픔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게 익숙하고 편했던 삶의 모습을 깨뜨리고 포기해야 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아픔을 기꺼이 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변화의 아픔, 사람이 성숙해지는 길을 외면할 때, 가정 안에서 감사의 샘은 메말라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부부의 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하고 탄식과 후회가 우리의 가슴속에 밀려올 수 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부부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Flexibility, 유연성입니다. 변화의 아픔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Openess, 열려있는 마음입니다. 보다 성숙한 사랑을 향해 자라가는 노력입니다. 이 열린 마음이 없으면 가정은 쉽게 권태에 빠져 들 수 밖에 없습니다. 기대와 흥분이 떠나간 자리에 씁쓸한 후회와 안타까움만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사랑은 자라야 합니다. 성숙함을 향해 끝없이 자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부가 성숙함을 향해 자라가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함께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은 우리 인생에 변화를 가져오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보다 성숙한 인생, 보다 성숙한 가정에 이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바로 내 생각, 내 주장을 상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절대적임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으라고.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배워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랑의 네 차원,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살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사랑의 네 차원, 우리가 배우고 자라가야 하는 사랑의 네 가지의 모습을 함께 찾아 보시겠습니다.

[2] 우리가 배우고 자라가야 하는 사랑의 네 가지 모습

(1) 사랑의 넓이의 차원

첫째로 사랑의 넓이란 사랑의 폭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넓이에 한이 없으셨습니다. 그 넓이가 얼마나 넓으신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그 원수를 위해서 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이 폭넓은 사랑을 가정에서 배워가야 합니다.

여러분, 성숙한 사랑은 장점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단점도 이해하고 받아드립니다. 마음에 드는 모습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의 폭은 대단히 제한적이고 좁을 수 밖에 없습니다. 폭넓은 사랑은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이해하고 받아드리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넓이란 부족한 점, 모자라는 점, 단점을 포용하는 폭을 말합니다. 이 폭이 열려있어야 합니다. 이 폭이 넓어져야 합니다.

(2) 사랑의 길이의 차원

둘째로 사랑의 길이의 차원입니다. 길이란 사랑의 불변성,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함이 없는 사랑의 모습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사랑이 퇴색되어가고 메말라 가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랑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오히려 더 깊어지고 아름다워져 갑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이 사랑을 배우고, 이 성숙한 사랑을 향하여 자라가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길이의 차원에서도 자라가야 합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그 사랑이 변함이 없고 더욱 풍성해져야 합니다.

(3) 사랑의 높이의 차원

셋째로 높이의 차원이 있습니다. 높이란 주는 사랑, 사랑이 갖는 희생적인 차원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성숙한 사랑은 언제나 희생의 차원을 갖기 마련입니다. 많은 경우 부부의 갈등은 서로가 받으려는 데서 생깁니다. 왜 나의 필요를 상대방이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가? 에서 불평과 불만이 싹틉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은 바로 이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로마서 5:8에서 사도 바울이 외치는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증해 주셨기 때문이 아닙니까?

  결혼 주례를 할 때마다 늘 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바로 결혼생활에서도 Golden Rule, 황금률이라는 말씀입니다.
  똑같이 직장에서 일하고 돌아왔는데, 남편은 TV보면서 쉬고, 아내는 식사준비하고 설거지하고 집안 정리해야 한다면, 여러분,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닙니까? 아내가 음식준비 한다면 설거지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설거지 해주는 남편의 모습 앞에서 쫌스럽다고 비웃을 아내가 있겠습니까? 
 
  사랑의 높이, 고귀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사랑의 높이가 없다면 그 사랑은 입술에만 머물고 말 것입니다. 구호에만 그치는 사랑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은 높이의 영역에서도 자라가야 합니다. 이 높이의 차원이 자라갈 때, 진정으로 성숙한 관계, 서로를 고마워 할 수 있는 관계로 나아갈 것입니다.

(4) 사랑의 깊이의 차원

  넷째 차원은 깊이입니다.
  깊이는 사랑이 감정의 차원을 넘어서서 전인격적인 사랑으로 나아가야 함을 깨우쳐 줍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단순히 감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는 생각하는 이성과 행동하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죽음 앞에서 고민하며 슬퍼하셨지만, 십자가의 언덕을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가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지정의적인 사랑인 전인격적이어야 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의 이 사랑의 깊이를 우리로 배워야 합니다. 심리학자들은 가슴 뜨거운 사랑은 길어야 2년에 머문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감정으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감정이 식으면 사랑도 식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랑의 관계에서 감정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감정이 사랑의 전부는 결코 아닙니다. 감정은 부분일 따름입니다.

  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The Road Less Traveled'란 책을 쓴 Scott Peck 같은 사람은 감정은 오히려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까지 말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상대방을 향한 배려나 책임보다는 자신의 욕구 충족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 보다는 상대방의 성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책임있는 배려임을 강조합니다.
 
  부부의 관계에서도 사랑은 이 차원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감정도 중요합니다. 정이 떨어지면 함께 살아가기가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보다 깊은 차원, 전인격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깊이 있는 사랑을 향해 자라가야 합니다.

[3] 사랑이 샘솟는 가정을 이루어 나가는 비결

감사와 사랑이 샘솟는 가정, 어떻게 이룩해 갈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진정한 사랑, 사랑의 넓이와 길이, 높이와 깊이에서 자라가면 우리는 감사를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네 차원에서 끝없이 자라가는 성숙한 사랑을 가꾸어 갈 때 우리의 가정, 부부의 관계는 감사로 채워져 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가로와 사랑의 사랑을 나타내는 징표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사랑의 가로인 사랑의 넓이와 길이를 배우고 자라가며, 세로의 사랑인 예수님의 높이와 깊이의 사랑을 배우고 자라갈 때 십자가의 사랑의 능력이 우리에게 흘러 들어 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깨닫게 되고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고 아가페 사랑의 능력을 갖게 됩니다.
이때에 나에게는 십자가가 플러스의 사랑의 힘을 나타내게 됩니다.

  남편이 아내가 고맙고, 그를 만나 함께 살아가게 된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가정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이런 가정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의 모습입니다. 아니 이렇게 서로를 고마워 하며 감사가 샘솟는 가정을 이루라고 주님께서는 결혼제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4]  결 론

  이제 설교를 끝맺으면서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저도 남자입니다만, 남편들이 가정이 회복되는 이 일에서 먼저 앞장 서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역할도 먼저 회복해 가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남편을 아내의 머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남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아내들에게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아내의 순종과 남편의 사랑은 선후를 따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태여 따진다면 남편이 먼저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되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먼저 사랑하셨기에 교회가 순종하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남편은, 아버지는 가정의 회복에서 앞장서야 합니다.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먼저 마음을 열고 성숙한 사랑을 향해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교회를 사랑하셨듯이 남편들이 먼저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느끼고 고마워하는 아내는 순종하지 말라고 해도 순종할 것입니다. 아내의 수고를 인정해 주고 먼저 사랑한다면 진정한 가정의 회복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 곳을 직장이라고 한다)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용(龍)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고개 숙인 아버지들이 많은 요즘,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작자 미상의 글이 인터넷과 입소문을 통해 번져가면서 잔잔한 감동과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로 시작하는 이 글은 A4용지 두 장에 걸쳐 이 시대 아버지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 글에 나타난 아버지는 우선, 속을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이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또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따뜻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깊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배쯤 될 것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간다."
이러다 보니, 아버지는 때로 이중적인 사람이 됩니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속담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이다. 늘 자식들에게 그럴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자식들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며 어릴 때 아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 점차 나이 들면서 아버지를 기성세대로 치부하고 무시하는 자식들의 보편적 정서도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자미상의 저자는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아버지는 뒷동산의 바위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 큰 이름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최근 아버지를 여읜 40대 가정주부는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라는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말했습니다.
1남 1녀를 둔 40대 회사원은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용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라는 대목을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정년 퇴직을 앞 둔 50대 후반의 직장인은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라는 구절이 특별히 마음에 와닿았다"며 친한 친구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글이라며 이메일로 보내주었는데 내용이 감동적이어서 나도 여러 사람에게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아래 시를 말씀드리며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부부가 그리고 가족과 이웃을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후회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전문)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 곳을 직장이라고 한다)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龍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 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때--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때--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때--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때-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때-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이가 나요.
25세때-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세때-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때-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前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때-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때-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꼭 助言을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後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이다.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車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간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 큰 이름이다.

이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아 그에 자라 가는 여러분이 되셔서 주님 안에서 행복한 가정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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