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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자녀를 살려내는 부모 (출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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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철봉 목사 (사직동교회)

[1] 레위 족속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었더니
[2]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3]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4]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5]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에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6]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7]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2004년, 한국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 중 우리를 더욱 어둡게 만드는 것은 유기(방치, 내어버림, 당하는 것)되는 어린이 숫자가 자꾸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6.25전쟁의 참화로 생겨난 ‘전쟁고아’ 이후로 가장 많은 고아들이 2004년 지금 이 땅에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슬프게 만드는 것은 이 고아들이 부모 없는 고아가 아니라 부모 있는 고아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집집마다 아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대개가 한 둘임) 고아 숫자가 갈수록 증가한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잘못 되어가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출애굽기 2장에는 살려내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자녀를 살려내는 놀랍고 감동적인 어느 한 부모의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주전 1500년 경, 이집트가 세계 역사의 패권을 쥐고 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불행하게도 애굽 땅에서 노예신세가 되어 비참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심한 학대를 받는데도 이스라엘 여인들은 건강하였으며 자녀를 많이 생산하였습니다. 애굽 왕(바로)은 이에 불안을 느꼈으며 마침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혹한 명령을 내렸으니 곧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죽여 버려야 한다는 천인공노할 법령이었던 것입니다.(1:22)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마다 통곡과 탄식이 끊어질 아니하였습니다.

그 때 아므람이라는 남편과 요게벳이라는 아내가 결혼하여 장남과 장녀(아론/미리암)를 낳아 ‘노예생활’의 고통 속에서도 아이들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쁨 때문에 인내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왕)의 금령이 발표된 이후 세 번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요즘 젊은 엄마들은 바로 왕의 저 무서운 금령에 비교하면 하나도 겁나지 않고 별로 힘들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아이들을 포기하고 내버립니다. 그러나 저 이스라엘 가정의 부부는 바로 왕의 무서운 법령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합니다. 총칼을 가지고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아이를 살리기로 決心합니다.

산모의 이름은 요게벳입니다. 요게벳은 하나님께서 주신 산모의 창조본능을 발휘합니다. 아이를 해산하여 살펴보니 참으로 준수합니다. 너무나 잘 생겼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모든 아기는 준수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의 몸(뱃) 속에서 열 달 동안 자라고 있었던 생명입니다. 함께 먹고, 함께 숨쉬고, 함께 걷고, 함께 잠을 잤습니다.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웃었습니다. 그러다가 열 달만에 엄마의 몸을 벗어나 밖으로 나온 것이 여러분의 아기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준수해 보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준수한 아들을 어찌 포기할 수 있습니까? 누가 아무리 무서운 법령을 만들어 公布한다 할지라도 어머니는 자기 아이를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살려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요게벳은 숨겨서라도 아기를 살리기로 결심을 합니다. 바로 왕의 저 무서운 감시와 수색과 처벌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요게벳은 무려 석달동안이나 아기를 숨겨서 길렀습니다. 요게벳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런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子息을 살려 내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자식을 살려낼 수 있다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포기하면 안됩니다. 약해지면 안됩니다. 물러서면 안됩니다. 요게벳은 애굽왕 바로 에게 맞서 싸우면서 아기를 지켜 내었습니다. 당시 히브리(이스라엘)인들의 자녀를 죽여서 아예 씨를 말려 버리려는 바로 왕! 저 바로 왕을 충동질하고, 조종하던 마귀는 3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 나라 이 땅에서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자녀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타락한 세속문화가 우리 아이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대학 입시가 우상이 되어 우리 아이들을 자기에게 무릎 끓게 합니다. 대학 입시 앞에서는 주일성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포기됩니다. 신앙인 에게 주일성수를 포기하는 것은 ‘죽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불 신앙과 타락한 문화가 우리 아이들의 그나마 남아있는 신앙의 명맥마저 송두리째 뽑아 가려고 합니다. 여기서 지면 우리는 정말 소망이 없습니다.

어머니 여러분은 이 사악한 세력들을 대항하여 맞서 싸워야 합니다. 어머니가 각오하고 나서면 그 누구도 함부로 우리의 자녀를 손대지 못합니다. 어머니는 강합니다. 자식을 지켜내고 살려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본능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어머니들은 이 본능을 믿고 이 능력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자녀를 살리고 지키는 일에 남자를 믿지 마십시오. 남자들은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여기 애굽왕 바로가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내아이들을 다 죽이고 있습니다. 어린 모세까지도 죽이려고 합니다. 모세는 결국 나일강으로 떠내려갑니다. 나일강에는 악어들이 득실거립니다. 오늘도 악어들이 득실거리는 나일강 위로 떠내려가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대로 놔두면 죽습니다. 아버지 아므람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모세를 살려내는 일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저 불쌍한 모세를 살려낼 것입니까?
그 여자가, 모세를 잉태하였고, 낳았고, 위험에서 숨겼고, 젖먹여 살려 내었습니다.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에 담아 나일강 하수의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2-3절) 어머니(요게벳)가 아들을 살려 냅니다. 어머니의 이 불굴의 의지 앞에 나일강도 이 갈대 상자를 뒤엎지 못합니다. 나일의 악어들도 갈대 상자 속의 아기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갈대 상자는 의외로 강력합니다.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였으므로 나일강 물이 스며들지 못합니다. 그리고 독특한 냄새 때문에 맹수들도 쉬 접근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기 모세는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들이시여! 여러분의 자녀를 견고한 갈대 상자 속에 보호하십시오. 이 갈대 상자는 오늘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물 샐틈 없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를 교회라고 하는 갈대 상자 안에서 자라나게 한다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감히 손댈 수 없고 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머니 요게벳 다음으로 그 누이가 모세를 살려내고 있습니다.
그 누이의 이름은 미리암입니다. 어린 동생, 석달 밖에 되지 않은 불쌍한 동생을 홀로 내버려둘 수 없어서 어린 누이가 갈대 상자를 지켜보고 있습니다.(2절) 이 장면은 참으로 가슴 뭉클합니다. 누이는 잠시도 한 눈 팔지 않고 아기 동생이 담겨있는 갈대 상자를 뜷어지게 쳐다보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당돌하게 다가가서 제안을 합니다. 성경은 이 때의 모세 누이 미리암을 ‘그 소녀(the girl)’라고 기록했습니다.(8절) 소녀의 머리에서 어른의 지혜가 번쩍입니다. 울고 있는 아기를 쳐다보면서 어떻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당황해 하고 있는 공주에게 아기에게 젖을 물릴 수 있는 ‘Hebrew여인 유모’를 소개해 줄 수 있다고 제안을 합니다.(7절) 어떻게 어린 소녀의 입에서 이런 앞 뒤 사정을 감안하는 지혜의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공주님, 이 아기는 사실 제 동생이에요. 그리고 저-기 우리 엄마가 숨어서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 엄마를 데리고 올까요?’ 이렇게 말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소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산모(어머니)와 아기(동생) 둘 다를 보호해야 한다는 지혜와 의지가 깔려 있는 제안입니다. 그리고 발견된 이 아기는 이미 공주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확신을 공주의 마음속에 돌이키지 못하도록 각인 시켜 주는 말이 되었습니다.(-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세 번째로 아기 모세를 살려낸 여인은 ‘바로의 딸’이었습니다.(5,6,8-10절)
아버지 바로 왕은 모세를 죽이려고 하고, 그 바로의 딸은 모세를 살려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현상입니다. 한 밤중 이집트 왕실의 공주가 목욕하러 나일강가로 나갔습니다. 저 이집트의 날씨는 덥고 건조하여 공주는 이따금 시녀를 데리고 나일강을 찾았던 같습니다. 하필 이 시간에 맞추어 모세를 담은 갈대 상자가 목욕하고 있던 공주 일행 앞으로 떠내려 온 것입니다. 한 시녀가 상류로부터 떠내려오는 물체를 발견하고 다급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공주님, 뭔가 떠내려와요!’ 시녀의 외침 소리에 놀란 공주는 그 물체를 건지게 하였고, 시녀는 공주 앞에서 갈대 상자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 속에는 포대에 싸인 한 아이가 누워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아기가 울었습니다. 아이의 울음소리에 공주의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주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모성애를 강하게 작동시킨 것입니다.(할렐루야) 어떤 사연으로 이렇게 잘 생긴 아기를 무서운 나일강 위로 떠내려보내야만 했는지 공주는 그 부모 되는 사람들을 원망하면서 이 아기를 살리고 보호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뜨겁게 일어났습니다. 이토록 순진무구한 어린아이까지 살해하면서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아버지 바로가 경멸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 잔인한 아버지에게 맞서서 이 아기를 양육하고 지켜주리라 결심을 합니다. 그리하여 바로의 딸 공주는 모세의 나이 40이 될 때까지 무려 40년 간 살벌하고 의심과 위험으로 가득한 애굽 궁정 안에서 모세의 확고부동한 보호자가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제 10절을 보십시오.
“그 아이가 자라매(the child grew older...)"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토록 아슬아슬하게 무수한 고비를 넘어온 끝에 드디어 아이 모세는 몰라볼 정도로 성장을 하였습니다. 온전한 하나의 생명체로, 인격체로 성장해 낸 것입니다. ‘그 아이가...the child" 주어로 등장하는 첫 번 구절입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하나의 불완전한 생명, 어리고 연약한 생명체로서 위험한 환경 속에서 보호받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 모세를 여성 세 사람이 살려낸 것입니다. 이처럼 한 생명을 살려내는데는 세 사람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 여자가/ 그 누이가/ 바로의 딸이...‘ 여기다가 나중에 십보라가 다시 한 번 모세를 살려내게 되니 모세를 살려낸 네 사람 모두가 여성들이었습니다. 그 여자 즉 요게벳은 집에서, 그 누이 미리암은 나일 강가에서, 바로의 딸 공주는 궁정에서 그리고 십보라는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를 살려내었습니다.
이 네 번의 상황은 모두가 한결같이 죽음에의 절대절명의 위기요, 고비였습니다. 이 속에서 그들 네 여성들은 어머니로서, 누이로서, 양어머니로서, 그리고 아내로서 모세를 살려내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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