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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하며 살아가기 (마 5: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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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이웃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생명 사랑 나눔 축제가 시작하는 특별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셨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축제는 저녁 시간부터 시작합니다만 형편상 오전에 오신 분들도 있기 때문에 아침부터 이곳저곳에서 잔치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기독교 하면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비록 우리 믿는 사람들이 사랑을 실천하는 데는 느리고 둔하지만 예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하신 것은 틀림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에도 예수님의 말씀이 분명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사람들은 원수는 미워하고 동족은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원수는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간단하지만 결코 쉽지 않는 주님의 교훈입니다.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생각보다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말씀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따라 살다보면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는데 달리 할 일이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시간 밖에 없었죠. 하는 일이 시간 죽이는 일입니다. 그는 방안을 한번 둘러보고 있었는데 벽 틈에 종이 하나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빼서 보니 거기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는 말씀이 적힌 성경 조각이었습니다.

그는 코웃음을 치고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면서 다시 그것을 꽂아 두었습니다. 하지만 뒷날에도 감옥에서 할일이라곤 없었습니다. 심심해서 다시 꺼내 읽고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고 하면서 다시 꽂아 두고. 그 다음날도 할일이 없으니깐 또 그 종이를 빼서 읽고 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원수를 사랑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 세상이 바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월남 이상재 선생님이십니다.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라도 귀담아 들으면 삶이 바뀝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여러분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쫓아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분을 품고 화를 내는 것보다는 용서하며 사랑하는 삶이 훨씬 더 나은 삶입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의 지혜서인 잠언이란 격언모음집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잠25:21-22) 우리나라 사람들은 “먹이라”는 말씀에 감동을 많이 받습니다. 배고파 하며 살았으니깐.

하다못해 “톱밥”이라고 하면서 무엇에든지 “밥”이라고 갖다 붙이면 기분이 좀 낫습니다. 그러나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는 마시는게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목말라 하거든 물을 주라는 겁니다. 물을 안 주면 죽어 버리는 환경입니다. 원수가 목말라 하면 못 본척해 버리면 됩니다. 대체로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곤경에 빠지면 선뜻 무언가 하려고 하지만 평소에 좋지 못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곤경에 빠지면 속으로 사실 쾌재를 부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이 배를 곯고 앉아 있거든 밥 한끼라도 대접을 하고, 목말라 하거든 차 한잔이라도 사주면서 그의 사정을 들어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그동안 미워하던 사람도 베푸는 선행에 놀라고 하나님께서는 그 선행에 대해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그 대상에게도 복이 되지만 베푸는 자신에게 엄청난 축복을 안겨줍니다. 이웃과 더불어 “평화를 꾀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다.”(잠 12:20, 표준 새번역) 

#누구를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
“원수”입니다. 자유대한민국에서 여러분을 향해서 길거리에서 총을 겨누는 그런 원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힘든 상대가 있습니다. 살다보면 더 이상 친구관계를 유지한다는게 쉽지 않고 서먹해 지는 관계도 생기고, 급기야는 힘들게 지내다가 미워하는 관계로 전락해 버리는 사람도 생기게 마련입니다.

큰 사업을 하든지 조그마한 슈퍼를 하든지 경쟁상대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서울에서 철물점을 하는데 자기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할 생각은 않고 길 건너편 철물점으로 가는 손님들 때문에 하루종일 배 아파하는 사람을 봤거든요. 큰 사업을 해도 마찬가지죠. 상대방은 생각지도 않고 이윤추구를 하고 다른 회사는 부도나든 망하든 생각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이전에 친하던 친구가 여러분의 감춰둔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니기도 합니다. 사실 그대로만 말하면 괜찮은데 악의적인 해석과 각색을 해서 온 동네에 유포를 시킵니다. 직장에 가도 우리를 괴롭히는 상사가 있기 마련이고 나보다 늦게 입사한 후배사원이 도무지 상급자의 권위를 인정치 않고 일마다 도전적일수 있습니다.

어디 사회생활만 그렇겠습니까?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으로 만난 배우자와의 관계도 어느날부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수 있습니다. 한번 싸우고 나면 연 사흘을 말 안하는 집안도 있거든요. 보기만 해도 가슴 설레게 하든 그 여자 친구가 마음에 상처를 안겨다 줄수 있고 아버지가 우리의 자존감을 짓밟기도 합니다.

원수는 사랑하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 나에게 웬 원수냐고 생각하시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멀리 가지 않아도 찾을수가 있습니다.

원수라고 특별한 대상이 아니라 누구라도 될 수가 있습니다. 그 대상이 여러분에게 누구입니까? 마음속으로 그림을 한번 그려보십시오.

#무엇을 하라고 명합니까?#
누가 원수인지 그림이 나오면 성경이 그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는지를 살펴봅시다. “원수를 사랑하라고”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그런 인간을 사랑하라고요” 예. 여러분 기분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명령은 분명하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그러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더 이상 경쟁하기를 그치라는 말씀일까요?

아니면 이번 주말부터 골프라도 같이 치러 나가라는 걸까요? 예수님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가족간의 사랑이라든지 무슨 로맨틱한 사랑, 아니면 친구간의 사랑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말은 감정이라기 보다는 태도와 행동을 얘기하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우리는 겸손하고 이타적인 태도로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을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의 최선의 것을 찾는 심정으로 다가서라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우라고 잠언은 말합니다. 비록 그들은 여러분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질 않아도 여러분은 그들을 선의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 집 사업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자녀들이 잘되기를 축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예, 계속해서 경쟁관계로 남을 수 있으나 공정한 경쟁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지 좋아하라고는 말하질 않았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좋아할려면 감정이 같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강제로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도록 자신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 마음에 드는 대상을 강제로 붙잡아 와서 사랑하라고 하는 법은 없잖아요.

힘들게 괴롭히는 원수를 좋아하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은 감정의 문제이지만 사랑하는 것은 순종의 문제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여러분들에게서는 순종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그들이 우리에게 행한, 또 다른 사람에게 행한 온갖 잘못에 대해서 인정해 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이 공의롭게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제부를 주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잘못에 대한 결과를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 말씀하시는 바는 우리가 그들을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든지 하나님에게 소중한 이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소중한 사람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무슨 짓을 했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 소중히 여기시는 것처럼 그렇게 그들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을 때에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에게 속섞이고 하나님을 거스리고 할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2천년전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우리의 반역에 대해서 선으로 갚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늘로 갈수 있는 화해의 길을 열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해 주셨는 가를 생각만 해 보면 우리의 원수에게 어떻게 해야 되는지 정답이 나옵니다.

#왜 사랑해야 할까요?#
달리 말해서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따라 원수를 사랑하면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물론 유익을 바라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씀대로 순종하다 보면 반드시 거기에 유익이 있습니다.

원수를 왜 사랑해야 되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사랑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요즘 복음송 하나가 전 국민들의 애창가요로 뜨고 있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맞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고 그것은 진리의 한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부분도 맞습니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지만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도 맞습니다.

사랑받고 사랑할 때 사람이 사는 즐거움을 맛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독일군들이 아주 못된 짓을 많이 했는데 그중에 어떤 실험을 했는가 하면 길에 널버러진게 아이들이니깐 그 고아들을 데려다 키우면서 먹을 것은 제 시간에 맞춰서 주되 애정표현은 못하도록 해서 한 그룹을 그렇게 실험을 해봤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제때에 먹을 것을 주는데도 불과하고 아무도 애정표현을 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깐 아이들이 죽어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아이들 뿐만 아니고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도록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입니다. 뭐 그렇게 배우자가 미스 코리아처럼 이쁘지 않아도 되요, 그렇지만 그 여자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면 우리는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파괴되면 산다는 것이 고달픈 겁니다.

#1). 사랑하면 신체적인 유익이 있습니다. #잠언 14장 30절은 말합니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이렇게 표현한 잠언의 말씀은 수사학적인 묘사가 아니라 실제로 현대과학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마음에 기쁨이 있고 평화가 깃들면 몸에 생기가 도나, 질투를 하게 되고 증오심을 가지게 되고 미워하게 되면 뼈까지 썩는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몸까지 상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는 건강을 엄청 챙기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파트를 지어도 건강에 손해가 없는 소재를 사용한다고 선전을 합니다. 우리는 건강해지고 싶어서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먹는 것도 비싸지만 유기농을 찾고 건강증진센타를 찾아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요즈음 과학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면서 분노를 품고 있으면 신체적인 건강에 큰 손해를 준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줄 담배를 피우는 것보다도, 음식을 많이 먹는 것보다도, 과체중보다도 더 위험한 것은 분노를 억누르며 지내는 것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실험을 했습니다. 그들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대해서 용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쉽게 삶을 회복할 수 있었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그 수용소에서 받았던 상처 때문에 원한을 품고 있던 그룹은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데 훨씬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2). 사랑하면 심리적인 유익이 있습니다.# 잠언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언23:7상) 미운 감정이나 원한을 품고 사는 사람은 화를 잘 냅니다. 고함도 잘 칩니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 되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하겠죠. “내가 지금 화 내지 않게 되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를 설득할려고 합니다. 그럴수도 있죠. 그렇지만 화를 내는 것은 화를 내게 하는 주변 사람이나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더 문제입니다. 그래서 무슨 모임이든지 그냥 막 설치는 사람을 보면 병든 사람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기 마음에 평화가 있으면 왠만한 상황속으로 던져져도 평강을 누리며 살수가 있습니다. 20년전에 어떤 교수님이 나에게 그렇게 묻더라고요. “너는 주위에서 떠들고 시끄럽게 해도 괜찮나, 너가 하는 공부에 지장이 없어?”하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때 나는 아무 지장이 없다고 했어요. 세월이 흘러 제 방에서 설교 준비하다 보면 저녁 예배를 위한 찬양 연습을 한다고 굉장합니다. 그래도 저는 한번도 화가 나지 않더라고요.

마음이 평안하더라고요. 저는 제 일하고. 누가 나의 귀를 잡고 자기 얘기를 들어 달라고 당기지만 않는다면 별 문제가 없거든요.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해서 용서를 하면 그때부터 자기 자신에게 치유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자기의 삶에 고통을 준 사람, 어떻게 보면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도우려할 때 비로소 자신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용서할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이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3). 사랑하면 인간관계에 유익이 있습니다.# 역시 잠언으로 돌아갑시다. “허물을 덮어 주면 사람을 얻고, 거듭거듭 허물을 들추어내면 친한 벗도 등을 돌린다.”(잠17:9. 현대어성경) 우리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에게는 호감이 갑니다. 그런데 자꾸 허물을 찾아서 지적하고 또 지적하고 하면 힘들잖아요.

저는 완전한 삶을 살수 있어서 목사가 된게 아닙니다. 그런데 저보고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한다고 자꾸 지적하면 목사라도 힘들어 지는 거예요. 훨씬 더 잘할수 있는데. 이번에 김삼환 목사님 설교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물 만난 고기처럼 사람이 자기 역량을 발휘할수 있는 여건만 되면 훨씬 더 능력있게 일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도 여기서 툭 치고 저렇게 가도 저기서 툭 치고 하면 나중에는 마음에 기가 죽어서 아무것도 못하게 되고 맙니다. 아이들을 키울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가 따라 다니면서 “양말도 제대로 못 벗냐. 옷도 그 나이 되어서도 못 챙겨 입냐?”고 잔소리하는 엄마를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5월달 어버이날에 카네이션 사서 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악을 선으로 갚기로 결심하면 원수도 친구가 됩니다. 사랑은 원수를 친구로 만드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4). 사랑하면 영적인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하면 이 두사람의 관계를 떠나서 하나님이 좋아하신다니깐요.하나님이 좋아하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기쁨이 바로 전달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안하고 남이 조금만 잘못해도 마음이 꽁해서 앙심을 품고 살면 하나님이 그런 나를 보고 더 측은해 하신다니깐요.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좋아집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면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질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갖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 수용하시고 이해해 주세요.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질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최선의 관계를 갖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서 용서하지 않는 태도를 고수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여간한 잘못도 다 사소한 것이 될 것입니다. 

잠언서는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은 풍성하게 복을 받으리라”(잠언11:25, The Message) 다른 사람을 축복하면 자기가 먼저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5) 우리가 사랑하면 하나님의 나라에도 큰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데 큰 유익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게 되는데 아주 도움이 됩니다.  이 진리는 여러 면에서 입증되지만 영적인 면에서도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46절에서 말합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유대사회에서는 “세리” 즉 “세무서 직원”하면 다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조차도 자기가 사랑할 사람만 사랑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을 보세요.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은 사랑할 만한 사람이 못되니깐 미워하는 겁니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면 세상의 조명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인 상식을 거스리기 때문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고 선을 선으로 갚은 것은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일상적이 아니기에 세상은 주목합니다. 우리가 악을 선으로 갚는 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큰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할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 하라”(롬 12:18) 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면 그럴수 있습니까?

#(1)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시간이 많아서 소일거리고 하는게 아닙니다. 신앙이 좋은 것을 폼 한번 잡을려고 한시간 기도시간의 자리에 앉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사실 우리 삶의 절실한 것을 하나님께 아뢰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그 사람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용서하고 싶은 맘이 손톱 끝만큼도 없어요. 그 사람을 용서하라면 하나님 당신이 도와 주셔야만 될 것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 정직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까지 폼잡고 안그런 척하고 해서야 어디가서 복을 받겠습니까?

자기 남편이나 아내에게는 좀 숨기는게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적어도 정직하게 무릎 꿇을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있는 그대로. “하나님,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하는게 쉽지 않습니다. 내 힘 가지고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좀 도와 주셔야 겠습니다.”..이렇게 솔직하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기도를 교회나와서 새벽기도시간에 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자유기도 시간에 큰 소리로 이름을 들먹여 가면서 “김 아무개 집사님 있잖아요, 하나님 그 집사님 손 좀 봐주세요” 하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여러분은 솔직하게 다 털어 놓는다고 하지만 그 기도소리를 다 듣는 사람들에게는 시험거리가 됩니다.

최근에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웃에 있는 시민교회 새벽기도회에 가서 자유기도 시간에 당회의 모든 사람의 이름을 낱낱이 거명해 가면서 고발을 하는데 보니깐 시민교회 사람도 아니더래요. 남의 교회 사람이 자기 교회를 새벽에 와서 온갖 장로님들, 목사님들 헌담을 다 하고 있으면 그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은 마치 그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깐 솔직히 털어놓는 것은 좋지만 장소를 가려서 해야 됩니다. 남의 교회에 가서 그것을 기도라고 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또 골방에서 기도한다고 해도 우리 남편 엄마 뭐뭐 하면서 기도하지 말고 내 남편을 낳아 줬다는 것 말고는 내가 시어머니를 좋아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또 큰 소리로 기도하면 시어머니가 듣고 상처 받습니다. 솔직한 기도도 좋지만 상식선 안에서 해야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자기안에 내재한 감정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털어 놓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5:44)

그리고 마태복음 6장 28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동일한 가르침은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8)#

가끔 우리는 힘든 사람을 만납니다. 계산해서 우리를 괴롭히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대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더 이상 만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분을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순종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려고 몸부림칠 때 하나님은 우리의 화평이 되십니다.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고 교제의 악수를 나누게 하십니다. 그에 대한 나의 태도를 바꾸시고 나에 대한 그의 태도도 변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2)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처지를 생각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레위기는 말합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8) 다른 사람의 입장이 한번 되어 보십시오. 그 사람의 신발을 한번 신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 본다고 해도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면 각 사람은 눈이 자기 이마에 붙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여기서부터 사물을 보기 때문에 자기 관점에서 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깐 남의 처지를 이해한다는게 쉽지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감정을 한번 헤아려 주십시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지금 이 사건을 한번 보자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관계가 변할수 있습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만 가지고 따지면 나는 그 사람하고 관계 개선하기가 힘듭니다. 북쪽에 있는 우리 동포들 사랑하는 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하는 행동만 보고 하려면.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가를 따져보면 답은 쉽습니다.

이리 폭파 사건 났을 때 우리가 당했던 그 심정을 가지고 룡천에서 일어난 폭파 사건을 보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된다는 답이 나옵니다. 상대방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면, 하나님께 엄청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나도 새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게 됩니다.

하는 짓을 보면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면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문들어 져서, 훼손이 되어 제대로 작동이 안되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참 힘들게 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있게 마련이지만 그런 사람을 볼 때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이 만들었을 때는 저렇게 살아가도록 만들지는 않았을 텐데 그렇게 밖에 못사는 것을 볼 때 참 많은 훼손을 당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깁니다.

여러분을 제일 괴롭히고 이해가 안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지음을 받아 저렇게 밖에 못 산다는 것은 살면서 그렇게 구겨지도록 한 과거가 있었겠구나. 이렇게 한번 되돌려 놓고 생각하면 사람들이 불쌍해집니다. 사람들을 사랑할 여유를 가지게 됩니다. 나에게 그렇게 나쁜 짓만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형상이 많이 망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하나님의 형상이 죄로 인해서 더럽혀 지고 망가지기는 했지만 말끔히 지워지고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진주에 묻어 있는 진흙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진흙 속에 있는 본래의 진주를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시각을 가지면 그들이 하나님에게 소중한 존재이듯이 나에게도 엄청 소중한 존재로 다가옵니다.

#3)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 합니다.#
잡지 중에 “좋은 생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좋은 생각”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좋은 생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한 행동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눅6:27)#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미워하는 자에게 선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잠언 25장 21절을 다시 되새깁시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점심이라도 대접하고 목말라 하거든 차라도 같이 하면서 사정을 좀 들어주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최근 고난 주간을 지내면서 Q.T를 한 것을 제가 읽어 봤습니다.

“남편 친구와 그 아내가 우리 가정에 늘 피해를 준다. 1년 넘게 차로 데리려 다니고 지금은 교회에 잘 정착해 다니고 있다. 하지만 너무 이기적인 행동에 지금은 내가 지친다. 물질적 손해를 입히고도 미안하다는 말도 없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친다. . . . ”

그런데 주님을 잡으려고 온 것을 보고 베드로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내려치는 것을 보고 주님은 참으라고 하시며 오히려 다친 상처를 싸매어 주시는 모습을 통해서 온전히 순종하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멀리서 따르는 베드로와 같은 자기의 모습을 발견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다음에 어느 날 결심을 하고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자기를 괴롭게 하던 상대방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추어 만나러 가서 솔직한 심정을 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만나고 싶지도 않고 더 이상 거래하고 싶지도 않지만 말씀 읽으니깐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나왔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워하는게 너무 힘들어, 미워하기 싫다고 하면서 막 우니깐 듣던 사람도 울고. 그래서 얽힌 것들을 일정한 선에서 정리하고 돌아서는데 마음이 아프더래요. 이렇게 하면 될 걸 왜 서로 힘들게 살았는지 생각하니깐 마음이 아팠다고 하면서 기록해 놓은 것을 읽어 본적이 있어요.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은 일입니다. 그것도 내가 베푼다고 했고 내가 최선을 다하여 했는데 상대방이 전혀 인정을 하지 않고 들어오면 그게 고통스러운 겁니다. 난 소련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하지 않다는 것 때문에 한번도 마음에 상처 받아 본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 쪽에 투자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내가 무언가 하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때는 섭섭한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것은 멀쩡한 정신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겁니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도와야만 가능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솟아나게 해 주십시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쳐 나게 해 주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영으로 지배당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몸부림 칠 때 가능해 지는 것이고 그럴 때 영광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을, 아직도 내게 가장 좋은 것만 보시고 인정해 주시는 그 하나님에 대해서 소개할 기회가 있죠.

자기 할말 다하고 자기 기분대로 하고 자기 하고 싶은 것 다하는 사람을 보고 누가 감동을 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자기를 저주하는 사람을 위해 복을 빌 때에, 우리에게 험담 하는 자를 위해 축복할 때에, 조롱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 할 때에 세상이 충격을 받는 겁니다. 자기가 욕을 하면 되받아서 욕을 할줄 알았는데 욕을 하지 않거든요. 자기가 침을 뱉으면 되 뱉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거든요.

그럴 때 사람들은 눈을 크게 떠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무언가 다른게 있는 가보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4)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누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잠28:9) 우리 가운데서 아무리 착하고 바르게 살았다고 해서 “내가마음을 이제 깨끗하게 했다, 더 이상 죄짓고 싶은 마음 요만큼도 없다. 내 죄를 말끔하게 했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과연 있겠습니까?

아무도 세상에는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가 봉착한 어려움에는 일정부분 우리 자신의 잘못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원수를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화가 나면 저 사람은 왜 저런지 모르겠다 싶죠. 여러분은 다 잘하는 것 같고 저쪽이 다 잘못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교통사고 나면 어떻게 합니까? “당신 60% 옳고, 상대방 잘못은 40%”....이런 식이죠. 나는 그게 처음에는 이해가 안되더라고요. 보험 하는 사람이 우리를 완전히 가지고 노는 것 같더라고요.

우리는 옳고 바른 것을 밝혀 달라는 것이지 몇 %는 내게서, 또 몇 %는 저 사람에게서 돈 가져 와서 갚아주라고 하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억울한 것을 밝혀 달라는 것인데 세상은 그렇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깐 그것도 맞더라고요. 부부끼리도 그렇지 않아요. 제 같은 경우를 볼 때, 제 아내는 저보다 머리가 좋은 것 같아요.

수십년 전에 제가 저질렀던 잘못부터 시작해서 차례차례 말하는 것을 보면 제가 한 가지도 방어할 재간이 없어요. 나는 기억도 안나는 일을 그렇게 소상히 기억을 하고 이야기를 하고 하는데 다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마지막에 가서 한마디만 하죠. “참 이상하다. 성경에는 모두 죄인이라고 했는데 어떤 죄인은 100점이라 하고, 어떤 죄인은 0점을 맞아야 되는지 참 이상하다” 하고 말죠.

화가 나면 여러분이 잘한 것 같고 상대방은 모든 게 다 잘못된 것 같아요.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일정 부분에 대해서 책임이 있어요. 여러분의 심정대로 상대방이 훨씬 더 잘못되었다 해도 여러분에게도 조그마한 잘못은 있잖아요.  하나님의 지혜는 말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28:13) 고백은 치유의 지름길입니다.

#(5)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라는 영화 보셨죠. 다시 말하면 심하게 하기는 했더라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중요한 부분들은 생략해 버렸고 매로 때려 피가 범벅된 장면만 너무 부각시켜 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을 해 볼수 있어요.

그렇게 매를 맞을때 주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내가 참아야 되나? 아니면 한번 본때를 보여줄까?’ 주님이 그렇게 생각하셨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달려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고 기도한 것을 보면 매를 맞으면서도 주님은 그 우매한 인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구속자의 길을 걸으셨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여러분, “저희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하는 것이니깐 용서하여 주십시오”...그런 식으로 용서할려고 들면 세상에 용서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거의 용서가 다 됩니다. “몰라서 그러는데 용서한번 해 주십시오, 하나님”... 이것은 세상 법정에는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몰라서 그랬다는 것이 통하지 않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주님이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되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서 사랑하며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맺습니다. 우리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살다보면 불편한 관계로 만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까지 해당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겸손, 희생의 사랑입니다. 왜 사랑해야 합니까? 사랑받고 사랑하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사람답게 살아 갈수가 있습니다.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서로간의 관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그렇게 할때에 유익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사랑해야 된다고요? 기도해야죠. 쉽습니까, 그게. 쉽지 않으니깐 기도하는게 아닙니까?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을 주시도록.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놓고도 세상을 쓸어 버리지 않은 하나님의 그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도록.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해 주십시오.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가십시오. 우리 잘못도 일정 부분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본받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주님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삶을 살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여러분이 경험해 온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항상 기뻐할수 있습니다. 감사 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찬양의 삶을 살수 있습니다.

누군가 말하듯이 사는 것이 황홀하다고 고백하며 살수가 있습니다. 이제는 지금껏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감정대로 살아오셨지만 지금부터는 여러분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 받아서 사랑하기 위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1-2)고 권면합니다.

달리 말해 예수님은 우리의 모범이 되십니다. 날카로운 채찍이 살갗에 박히는 순간에도 침묵하지 않고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고통이 우리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고통과 자만심, 편견이 침묵하는 우리를 정당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하는 짓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다시금 잠언을 살핍시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16:7)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면 우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 맺습니다. 우리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살다보면 불편한 관계로 만나는 사람부터 집요하게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겸손하고 희생적이고 용서하는 태도입니다.

왜 우린 사랑해야 합니까?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관계적으로, 영적으로, 그 나라를 위한 유익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우린 사랑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주님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삶을 살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며 사는 삶은 사람답게 사는 삶입니다. 사람답게 사는 유일한 대안은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복된 자리로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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