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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삼하 18:3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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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임대식 목사 (평화교회)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아마도 가장 잘나고 잘생긴 사람은, 다윗 왕의 아들 압살롬 왕자였을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온 이스라엘에 압살롬처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흠 잡을 때가 하나도 없는 미남은 없다”고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또한 그의 머리칼은 숱이 좋아서, 해마다 한 번씩 머리를 깎곤 했는데, 쳐낸 머리칼을 달아 보면 왕궁의 저울로 200 세겔이나 나갔다고 합니다. 숱이 많고 아름다운 머리라서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잘난 아들이 아버지의 가슴에 창을 들이대고 말았습니다. 즉 아버지 다윗 왕을 반역해서 군대를 일으키고,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아버지 다윗 왕의 군사와 아들 압살롬의 군대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때 전쟁터로 나가는 군사들에게 다윗 왕은 아들에 대해서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은 아직 철이 없으니, 나를 보아서라도, 나를 보아서라도, 너무 심하게는 다루지 말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가슴에 칼을 들이대어도 아버지는 아버지입니다. 그 원수 된 아들을 걱정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아들은 반역을 하고, 아버지는 그 반역을 피해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왕은 압살롬에게 있어서는 왕이기 이전에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마침내 전쟁은 터졌고, 압살롬의 대군은 비참하게 패배했습니다. 압살롬은 노새를 타고 울창한 상수리나무 밑으로 빠져 도망가다가, 머리가 나뭇가지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타고 가던 노새는 그대로 달아나 버리고 압살롬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 자랑스럽던 머리채가 교수형 도구가 된 것입니다. 머리채 때문에 꼼짝 못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나무에 매달려 있는 압살롬을 군대장관 요압은 창 세 개를 연거푸 던져, 상수리나무에 매달린 채 살아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찔러 죽여 버렸습니다. 아버지에 반역한 패륜아의 비극적인 종말입니다.

압살롬이 죽자 다윗의 군대는 승리의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러나 아버지 다윗은 그 아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승리의 기쁨도, 백성들의 환호성도 전연 관계하지 않고, 가슴 찢어지게 슬피 울며 외칩니다.

“내 자식 압살롬아, 내 자식아, 내 자식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이게 웬일이냐? 내 자식 압살롬아, 내 자식아”하며 목 놓아 울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부모 없이 존재하게 된 사람은 하나도,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부모님의 사랑의 젖을 먹고 다 아름답게 자라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아버지 왕좌를 빼앗으려는 야심을 갖고, 오랫동안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하며 끝내는 반란을 일으키고, 자기 아버지를 찾아 죽여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을 위해서 자기가 대신 죽지 못한 것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 울부짖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다윗이 평범한 아버지였다면 백번이라도 그 아들을 위해 자기가 대신 죽었을 것입니다.

이 부모의 슬픔과 고통을 부모가 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 된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고 잘났다고 해도 그 부모의 마음을 어떻게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천만번 죽었다 깨어나도 부모는 부모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위대하게 되고, 나이가 들어도, 자식은 자식입니다.

요즈음 세상은 똑똑한 자식 때문에 다윗 왕처럼 눈물 흘리는 부모가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비극입니다. 부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자식의 눈에는, 피가 흐르게 될 것이라는 옛말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식 된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정말 육신의 부모님께 정성과 효도를 드리는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부모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부모님들이 자식을 위해서 흘리는 뜨거운 눈물에 대해서는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조만간 갚아주실 줄 믿습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진실하고 선한 마음은 자기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람이 마음을 아시고 “악한 자라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그러지 않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식 축복하고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어버이 된 분들의 본심입니다. 악한 자식은 있어도 악한 부모는 없습니다. 자기 부모를 버리는 자식은 더러 있어도 자식을 버리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얼마 텔레비전 뉴스를 보니, 효도 관광을 시켜 준다고 늙으신 부모님을 멀리 모시고 가서 버리고 오는 자식들이 더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로원에 연고 없는 노인 분들이 많아지고 있다 합니다. 양로원에 계신 분들을 찾아가서, 자식들이 지금 어디에 사는지 물어보면, 거의 다 모른다고 대답을 하십니다. 얼마든지 전화번호도 알고, 찾아갈 수도 있건만, 자녀들에게 혹 허물이 될 것 같아 이름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합니다.

부모의 마음과 자식의 마음이 이렇게 다릅니다. 부모는 자기가 버림을 받으면서도 자식의 허물을 덮어줍니다. 덮어주는 부모의 마음은 자녀들이 다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사람됨이란 은혜를 알고 사는데 있습니다. 사람이 받은 은혜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바로 그 사람이 동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받은 은혜를 깨달으면, 그것 때문에 사는 보람이 있고, 은혜를 갚으려고 애쓰는데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버이의 은혜를 입고 태어났고, 부모님의 사랑의 은혜를 입고 살아왔으며, 지금도 부모님의 간절한 기도와 기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53년 6.25 동란, 한국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의 유명한 사회학자 몇 사람이 특별한 목적으로 우리나라를 다녀간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큰 전쟁을 치르고 나면 으례 후유증이 있게 마련입니다. 전염병이 그 하나입니다. 전쟁에서 죽는 사람보다 전염병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을 정도라고 합니다.

또 정신 이상자도 많이 생깁니다. 그리고 출산율이 높아집니다. 전쟁 동안 아기를 낳지 못하다가 전쟁 뒤에는 많이 낳게 됩니다. 또 기형아가 다른 때에 비해 많이 태어납니다. 이것은 사회학자들의 연구로 상식처럼 되어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3년에 걸친 그 무서운 전쟁을 치르고도 정신병자의 발생률과 기형아 출생률도 낮았고, 전염병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것이 이상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조사하려고 사회학자들이 파견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조사하는 중에 시골에 내려가서 두 가지 장면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그 하나가 어느 시골집 마루에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다 큰 손자의 입에다 넣어줍니다. 손자 녀석은 거리낌 없이 그것을 덥석덥석 받아먹고 있습니다. 그 모습에서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에 오가는 사랑을 보았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한 여인이 발가벗은 어린 아리를 등에 업고 머리에 무엇인가를 이고 가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손으로는 아이를 바치고, 한 손으로는 머리에 인 보따리를 붙잡고,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길을 갑니다. 아이는 어머니 등에서 고개를 젖히고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불편하겠습니까마는, 엄마 몸에 자기 몸이 닿아있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있다는 것으로 만족하여 잠을 자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는 ‘조사를 다 했노라’하고 학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원인을 깨달은 것입니다. 일찍이 역사학자 토인비는 말하기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족 제도는 한국에 있다”라고 칭찬한 바 있습니다.

한 때 우리는 온 세계가 부러워하는 가족 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제는 지난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옛날에는 참 좋았다”하고 푸념하며 살아야 할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명예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마땅히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부모님은 나를 낳아 주셨습니다. 나를 위해 희생하시고 헌신하셨습니다. 나를 키워주신 분이요,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신 분이 바로 부모님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둘째, 부모님은 인생의 경험자입니다. 인생의 선배요, 어른이십니다. 그것만으로도 그 분이 나보다 훨씬 지혜롭습니다.

셋째,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세상의 사랑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만, 부모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순수한 사랑은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에 담긴 교훈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넷째, 부모님은 나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나에게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모님은 오직 나만이 전부요, 나를 가장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며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부모님을 공경할 것입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자녀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우리 신앙인들은, 과연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효와 정성을 다 하고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다윗 왕은 그 아들의 죽음에 몹시 슬퍼했습니다.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하며 통곡을 하였지만, 아들을 위해 대신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 같은 이 못난 죄인을 위해 자기의 귀한 아들 예수님을 보내어 십자가에 대신 죽게 하시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을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천만 번 죽어도 마땅한 우리들이 살아서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압살롬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배반한 압살롬의 모습이 곧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고, 배반하고, 그 사랑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내 욕심, 내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한 오늘의 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용서하시고,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안타까워하실 뿐 더러, 한걸음 더 나아가서 친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일본의 전설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홀몸이 된 어머니가, 외아들을 정성껏 길러 결혼을 시켰습니다. 신부는 불행하게도 몸이 몹시 약한데 알아봤더니 사람의 간을 먹으면 낫는다고 했습니다.

이 아들은 자기 아내를 몹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그 병을 고쳐주고 싶었습니다. 궁리하던 끝에 끔찍한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이제 사실만큼 다 사셨는데 젊은 아내는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어머니를 깊은 산 속에 끌고 가서 그만 어머니의 가슴에 칼을 들이밀고 간을 빼내어 정신없이 달려갑니다. 무섭고 두렵고, 큰 죄책감이 온통 이 아들을 사로잡아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뛰어갑니다. 정신 없이 달려갑니다.

그 때 어머니의 간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얘야, 천천히 가라, 너무 빨리 달리다 넘어질라, 다칠라.” 물론 이것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일 뿐입니다. 그러나 몰인정한 아들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아들을 염려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잘 담긴 이야기입니다.

사실 자녀들은 어머니의 간을 먹고 삽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 때문에 늘 애간장을 녹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매 순간 순간 간이 먹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어디 그 뿐입니까? 과연 우리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애간장을 얼마나 태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토록 놀라운 사랑과 축복을 누리게 된 우리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녀 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를 위해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면서, 다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살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이것이 바로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해,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주님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크고 놀라운 사랑에 보답 할꼬, 철이 든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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