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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고향같은 교회 (시 122: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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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김성덕 목사 (내일교회)


한 시골 노인이 서울 아들집에 올라와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아버지, 심심하실 텐데 극장 구경하고 오세요 ] 라며 돈을 드렸습니다.
극장 구경이 처음인 노인은 곧바로 돌아왔습니다.
아들이 [ 아버지, 왜 벌써 돌아오셨어요? ] 하니 시골 노인은 좋아하며 대답했습니다.
[ 야야, 서울 사람들 똑똑한 줄만 알았더니 어수룩한 데가 있더구먼. 내가 30분이나 여기 저기 극장 구경을 했는데, 돈도 안 받지 뭐야. 오늘 극장 구경 공짜로 잘 했데이 ] 하더랍니다.
극장 구경하고 오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극장 건물을 구경하고 온 것이었습니다. 오늘 교인들 가운데도 교회에 나오면서도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구경만 하고 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사1:12절‘마당만 밟고 가는 사람들’이라 합니다.

시122편은 다윗의 시편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올라갈 때 사용하도록 하기 위하여 지은 시입니다.
본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드리는 자의 기쁨과 교회를 통해 우리 가정이 누리는 복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말씀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1절에 [ 사람들이 자기에게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 라고 노래합니다.
다윗이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기쁨은 교회와서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1. 1절에 다윗은 [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 라고 찬송하는데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할까요?

1) 그곳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도우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37:4절에 [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리하면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
여호와를 기쁘게 해 드리라 가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만남의 기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생명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바른 관계 하에 있는 가족은 만나면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관계와 사랑의 관계는 한 선상에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만남의 기쁨이 있습니다.
혹시 기쁨 없이 습관적으로 예배드리러 나오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없이 교회에 나오지는 않습니까?
아버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렘29:13절 [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

2) 기쁨은 예배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롬12:1절에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
나아가 사도 바울은 빌2:17절에서
[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
이 말은 예배의 본질이 기쁨에 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낸 교훈입니다. 찬43장 후렴
[ 하나님의 자녀여 크게 찬송 부르며 밝고 거룩한 길로 기쁨으로 나아가 ]
그렇습니다
예배는 기쁨 그 자체이기 때문에 교회로 나아오는 마음도 항상 기쁨이 넘쳐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아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만남의 기쁨이 회복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데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성도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특징이 무엇일까요?

2절에 보면 [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있도다 ]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에서 예배드릴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복된 삶이라는 사실을 생동감 넘치는 기쁨과 만족감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즉 내가 오늘 교회 나와서 예배드릴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 너무 행복하다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성도의 첫 번째 특징이 행복한 예배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있을 때나 그 품에 잠들어 있을 때가 가장 안정과 편안함을 느끼듯이 성도는 하나님 교회에 나아와 예배 드릴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과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바로 나의 마음의 고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 교회가 될 때 교회가 내 마음에 고향이 될 때 나는 행복한 예배자가 되고 내가 행복한 예배자가 되면
하나님은 나의 심령과 가정에 반드시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시128편이 이 진리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 라고 하며 네 가정에 네 아내와 네 자식이 복을 얻으며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볼찌어다 ] 라고 합니다.
내일교회가 마음의 고향이 되어 행복한 예배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에 자녀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는
3절에 [ 예루살렘아 너는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
이 말은 교회가 너무나 아름답고 자랑스럽고 부요하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축복받는 성도와 가정의 특징입니다.
교회가 너무 아름답고 자랑스럽고 마음의 부요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어릴 때 자랐던 고향을 생각하면 너무 아름답고 마음의 부요함을 느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내일의 가족 여러분 우리의 가정이 회복되기를 원하십니까?
내 마음에 예루살렘이 먼저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의 고향인 교회가 먼저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생애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삶의 모델입니다.
삼하5장에 보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온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이스라엘 왕이 되었고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시온성을 세우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지형적 정치적 이유보다도 다윗이 예루살렘을 택한 이유는 신앙적인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직장을 택하고, 사업장을 택할 때 지리적 상업적 환경을 먼저 고려합니다.
물론 이런 여건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우선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신앙적 조건이 어떻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택한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라는 신앙적 이유가 더 우선적인 것입니다.

1) 창22장에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 모리아 산에서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실 때 벌서 장차 성전이 세워질 장소임을 암시하였고

2) 좀더 구체적으로 신12장에 보면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행하였지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실려고 택하실 그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네게 명하는 모든 것을 행할지니라 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모실 수 있는 성전 건축의 최적 장소로 예루살렘을 택하고 정복한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무엇을 하더라도 환경이나 여건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신앙적 여건을 앞세워야 하나님이 강성케 하십니다.

그럼 다윗이 정복한 예루살렘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 곳에 다윗 성을 세우고 나니 삼하5:10절에
[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 이 구절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에
그 생애의 대 전환점을 이룸을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그 전까지는 다윗의 신앙의 영적성숙을 위한 믿음의 시련의 기간이었다면 이제 부터는 영적으로 성숙한 다윗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통치자로서의 통치해 나가는 시간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전환점이 바로 예루살렘 성의 정복으로 이루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크고 작든 계속하여 믿음의 시련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믿음의 시련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시고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우리를 신앙적으로 더 성숙케 하십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들어 쓰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일군으로 들어 쓰시는 분기점이 어디인냐?
바로 내 마음에 시온이 중심이 될 때입니다.
내 마음과 삶의 중심이 교회가 되어질 때 하나님은 그를 들어 쓰십니다. 그리고 한번 보세요 11절에
[ 두로 왕 히람이 다윗에게 사자들과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매 저희가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루살렘 정복 이후 다윗의 모든 삶과 통치의 중심이 시온이 되고 보니 하나님이 다윗에게 복을 주시고 통치력을 주셔서 그 위세가 얼마나 큰지 두로 왕 히람이 화해의 제스츄어를 해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부쳐준 것입니다.

그리고 똑 같은 예루살렘 정복 사건을 대하11장에 기록하면서
여기에도 [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 하고는 11장 12장 두장에 걸쳐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대상12:22절에 말하기를 [ 그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이 예루살렘 정복 후에 함께 하셔서 다윗이 점점 강성해지고 하나님이 물질도 사람도 부쳐주셨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그곳을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소로 삶고 이스라엘 통치의 중심으로 삼을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물질도 사람도 부쳐 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나의 삶의 구심점이 되어질 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점점 강성케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나의 삶에 중심이 된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크고 작은 방해거리가 있습니다.
다윗이 예루사렘을 정복하는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천혜적인 요새요
그곳에는 여부스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6절 [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저희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
이 말은 그만큼 예루살렘 성이 천연 요새로서 여부스 사람이 자신을 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하나님 백성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 중심적인 삶을 살려고 하면 믿음이 없어면 전혀 불가능하고 무익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실현하려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도리어 여부스 사람들이 절뚝발이와 소경으로 보였고 쉽게 예루살렘을 점령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믿음의 눈을 뜨고 보면 찬246장 5절
[ 하늘의 영광과 베푸신 축복이 진리와 함게 영원히 시온에 넘치네 ]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 시온의 축복에 눈이 뜨여지면
[ 성도의 교제와 교회의 생활과 구주와 맺은 언약을 늘 좋아합니다.]
교회가 무거운 짐이 아니라 마음의 고향이 되어
교회가 나의 신앙과 삶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교회에 예배 드리기 위하여 나아올 때 기대하고 꼭 준비되어야 할 마음의 자세가 있습니다.

4절에 보면
[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 도다 ]
이 말씀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일년에 3차씩 절기 때 성전에 올라와 예배를 드리는 전통을 상기시키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전에 올라와 절기를 지킬 때

두 가지 핵심이 있습니다.
1) 감사입니다. - 공수로 보이지 말라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감사하는 마음과 믿음으로 감사하는 예물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주일헌금이 의무금이 되지 마시고 감사예물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입니다.
시128:5-6절 [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읭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찌어다 ]
내일 가족 여러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와올 때 한 손에는 감사 한 손에는 축복의 확신을 가지고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럼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으로 나아옵니까?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요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5절에
[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 라고 합니다. 이 보좌는 바로 하나님의 보좌를 말합니다.
우리 예배를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 이유는, 예배 속에서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의 결정에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판단이란 ?
"하나님이 사태를 바로잡고 문제를 해결하시는 결정적인 말씀"을 뜻합니다. 그리고 판단의 보좌란? 말씀이 선포되는 장소이다.
또 판단은 어떤 것에 관한, 즉 사물이나 사태를 묘사하는 내용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주고 선을 집행하는 말씀을 뜻합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만큼 이러한 것들이 잘 이행될 수 있는 장소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혼자 집에 있으면서 성경을 읽는 것으로 예배를 대신한다면 많은 것을 놓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주변 문화의 지배를 받고, 무지 때문에 제약받고, 자신의 편견에 의해 왜곡된 시각으로 성경을 읽기 때문입니다.
예배 시 우리는 [ 하나님 백성의 일부 ] 가 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 백성은 성경의 모든 저자가 말씀을 선포하는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하나님 보좌 앞에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지난번 금요 철야기도회 때 김 영애 권사님 간증 중 자기 부부는 하나님의 응답의 첫 번째로 목사님 주일 낯 설교에서 찾는다고 했습니다.
꼭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예배 나아올 때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판단의 보좌 앞에 나아옴을 마음에 꼭 세기시기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우리의 가정에 복을 주십니다.
우리가 예루살렘의 복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시128:에 보면 성도의 가정에 모든 복이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5절 [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 라고 합니다.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신다는 말은 시온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바로 교회를 통해 성도의 가정이 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복을 보겠다고 했는데 예루살렘의 복이 어떤 복입니까?
시128:5절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시는데 보라! 예루살렘의 복을 ] 합니다.
예루살렘의 복을 강조하면서 확신을 심어주는 말씀입니다.
그럼 예루살렘의 복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성전을 중심해 이루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중심생활이 저들의 최대 관심사요 축복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늘 본문6-7절에 [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안에는 형통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찌로다 ]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의 복을 실감하게 된 것은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 건축이 이루어졌지만 그럴 때는 성전 귀한 줄 모르다가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훼파되고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야 성전이 귀한 줄 알고 그때사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 중에 시137:에 보면 [ 내가 예루살렘을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지 아니하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으리로다 ] 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전은 파괴되었지마는 다니엘은 자기를 죽이려는 조서에 어인이 찍힌 줄 알고서도 단6:10절에 [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 고 합니다.
비록 성전은 파괴되었지마는 다니엘은 하나님이 솔로몬을 향하여 성전 봉헌식 때 맺은 언약이 그대로 유효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지만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는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언약을 깨우쳐 주시고. 그 언약을 지키시며 그의 몸 된 지체들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복을 주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성도의 가정에 복을 주시기 때문에 교회 생활을 잘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6절 말씀은 우리 가정의 행복은 예루살렘의 번영과 불가분 관계가 있음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찬송도 그렇게 부르잖아요.
[ 하늘의 영광과 베푸신 축복이 진리와 함께 영원히 시온에 넘치네 ]
내가 출석하고 섬기는 교회가 번영할 때 성도의 가정이 번영한다는 것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교인들도 교회의 평안과 번영이 귀한 줄 모릅니다.
그러나 주위에 한 번 둘러보세요.
교회가 부흥되지 아니하고 침체된 교회에 그 가정과 자녀들이 얼마나 잘 되는가 보세요.
교회가 평안하지 못하면 가정에 평안이 없습니다.
교회가 부흥되지 아니하면 가정의 번영도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경건을 물려주되 예루살렘의 복을 물려주기 위하여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이 석유로 돈 벌기 시작할 때에 일입니다.
그 나라의 장관이 석유를 팔기 위해서 영국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아주 귀빈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호텔에 들어갔는데, 그 호화판의 시설에 놀랐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란 것은 이들이 화장실을 갔는데, 아, 글쎄 뭐 이상한 꼭지가 있는데 그것을 누르니 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기했는지 영국 장관들을 불러서 말합니다.
[ 이런 좋은 것, 영국서는 어디서나 구할 수 있습니까?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좀 많이 구해주십시오 ] 했답니다.
[ 뭐에 쓰려고요 ] 물었을 때에 그 사우디 장관들 하는 말이 가관입니다.
[ 아시다시피 우리 나라는 물이 귀하지 않습니까?
물 값이 기름 값보다 비싼데 이런 기계만 있으면 얼마든지 물을 쓸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 하더랍니다.
그들은 수도꼭지만 있으면 물은 얼마든지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복을 교회라는 저수지와 기도의 관을 통해 우리 가정에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교회를 통하여 예루살렘의 복을 누릴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8절에 [ 내가 내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찌지어다 ]
이 말씀은 내가 예루살렘의 복을 받으면형제도 친구도 그 영향력을 입어 평강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잘 되어야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를 실 때 복의 근원으로 삼았듯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때 복의 근원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나만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살 맛 나는 세상 만들어 가는 행복한 사람 될 줄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예루살렘의 복을 주셨습니다.
믿으시면 아멘~!
그렇다면 교회의 평안을 구하고 교회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 가정 뿐만이 아니라 네 형제 네 친구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복을 누리는 자가 꼭 기억해야 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9절 [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로다]
문자적인 뜻은
[ 내가 너희 선함을 보고 너에게 축복을 하겠다 ] 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그 가정에 가장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그 아버지가 축복하고 저주하는 데로 자식이 복을 받고 저주를 받습니다.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축복한 내용이 말해줍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에게는 그 자식의 앞날을 내어다 볼 수 있는 안력이 있습니다.
칼빈은 그럽니다.
목사는 성도의 영적인 부모다.
그 교회 담임 목사의 마음에 축복이 나가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성도가 있습니다.
교회의 평안을 구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와 그 가정 목사가 볼 때도 축복된 마음과 기도가 나가는 것입니다.
목사가 마음에서 우러나와 복을 구하는 성도의 가정 꼭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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