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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택받은 자의 선택(2) (창 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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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신시내티한인교회)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세 가지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는 땅을 주시겠다는 복의 약속이고, 또 하나는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복의 약속이었고, 마지막으로는 아브람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도 복을 주시고, 그렇지 않고 아브람을 미워하거나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그와 같이 대하시겠다는 이른바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복의 약속이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바로 이렇게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이 어떻게 이루어져가고 있는가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이러한 복의 약속 중에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브람 시대에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브람은 선택받은 자로서 자기를 택하신 분의 약속을 믿는 믿음 안에서 바른 선택을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땅의 복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답게 우리의 모든 삶에 약속을 믿는 믿음 안에서 바른 선택을 할 때, 기업의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능히 받을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는 복의 약속에 대한 아브람의 모습을 살펴 볼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브람에게는 친자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부터 자녀 특히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들도 없는 사람에게 많은 후손을 약속하신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모순적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지시하신대로 고향 땅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고향 땅을 떠난 지 한참 지났는데에도  아들에 대한 소식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나이가 들었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데 자식이 없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러던 가운데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것을 안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자신의 답답함을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창 15:3). 하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아주 의외의 말씀이었습니다. “엘리에셀은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바로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시면서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때는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더러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우러러 이 많은 별들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다짐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금 깊이 받아들이며 믿었습니다(창 15:4-5). 그래서 성경은 이런 아브람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이러한 일이 있고난 후에 생긴 일이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자녀를 낳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래서 그 당시 사회에서 흔히 사용하던 방법을 적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아마 10년 전에 애굽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 함께 데리고 온 몸종 중에 하갈이라는 처녀가 있었나 봅니다. 이 하갈을 그 당시의 규례대로 아들을 낳아주는 씨받이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편 아브람에게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하지 않으시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십시오. 내가 혹 그로 인하여 자녀를 얻을까 싶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아내 사래의 말대로 하갈과 동침을 합니다. 결국, 하갈이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갈은 자기가 잉태함을 알게되면서 자기의 주인인 사래를 은근히 깔보기 시작합니다. 아마 주인 아브람의 마음이 자기에게 있다고 여겼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사래는 아브람에게 오히려 앙탈을 부립니다. “내가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지 않겠습니까?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합니다”하였습니다(창 16:5). 이에 아브람은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 좋을 대로 하시구려” 하며 이 일에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견디다 못한 하갈은 사래로부터 광야로 도망갑니다. 광야의 오아시스 곁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시는 말씀이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겠다. 그리고 이제 아들을 낳을 터인데,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는 뜻이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하갈은 기쁨에 겨워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지었습니다. 이 때가 아브람이 86세 되던 때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을 떠난 지 11년이 되던 해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에서 선택받은 자로서의 선택의 모습의 또 한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핀 바와 같이 아브람이 롯과 땅 문제를 놓고 선택할 때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 따른 바른 선택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자식을 보는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선택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분명히 나타나주셔서, 엘리에셀이란 자를 상속자로 삼으려고 하는 아브람에게 “엘리에셀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친히 난 아들이 네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면서 그 약속을 확증까지 해 주셨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교감이 있었던 아브람으로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택함 받은 자로서의 바른 선택은 아닌 듯싶습니다.

이렇게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아마 이러한 모습은 아브람에게만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에게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몇 가지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보다 사람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물론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무척 중요합니다. 이러한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요소는 “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 있는 듯싶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친하고 가깝다는 뜻은 다른 말로 하면, “나도 그 사람 말을 잘 들어주고, 그 사람 또한 내 말을 잘 들어 준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사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준다는 것은 친절함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줄 수 있는 데에는 적어도 몇 가지의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는 가까운 관계의 사람일 경우, 그 말을 잘 들어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바른 말이라도 내가 친하지 않다거나, 잘 모르는 사람의 말이면 들어주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브람은 가장 가깝다고 여길 수 있는 그 부인 사래의 말을 듣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아마 부인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면, 가정생활이 조금은 불편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라도 부인의 말을 듣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말을 잘 들어줄 수 있는 또 하나의 비결은 그 말이 상식적으로나 법적, 윤리적으로 타당한 말이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래가 아브람에게 부탁한 요청은 오늘날에는 윤리 도덕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 아브람의 시대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요청에 따르기가 더 용이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상식적으로, 윤리 도덕적으로 타당하고 또 아무리 가까운 사람의 요청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과 상충될 때에는 그러한 요청이 하나님의 약속보다 앞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은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을 이미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정하심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믿는 우리들은 특별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최선의 적은 악이 아니라, 선이다.” 이 말은 마귀가 사용하는 방법인데, 그것은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최선의 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악한 것으로가 아니라, 선한 것으로 방해한다는 뜻입니다. 타당하다고 여길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한 길은 최선의 길입니다. 이 길을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마귀는 악한 방법과 같은 유치한 방법이 아닌, 선한 방법이라는 그럴 듯한 방법을 쓴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에게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이제는 말해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장래의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기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수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이라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 고백을 하였기에 칭찬을 받은 베드로는 이 예수님의 계획을 듣고는 “그리 마옵소서” 하면서 자기 나름대로는 선한 충고를 하였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충고는 베드로가 선한 마음으로 한 것이지, 악한 마음으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베드로의 선한 충고를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13 이하). 이는 마귀가 선한 것으로 최선을 방해하려 한 모습의 한 예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지향하는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알면서도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이 약해진 이유는 시간이 많이 흘러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까 소개해 드린 바와 같이, 오늘 본문 창 16장 앞의 15:1-6에는 아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다시 한 번 확인해주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이를 믿고 받아들인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모습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다음에 오늘 본문이 나오는데, 사실 이 15장과 16장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최대한 많이 흘렀다 하더라도 10년 정도일 것입니다. 이러한 10년이란 세월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그 초조함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의 결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점점 얇아져 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는 시간마저도 절대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시간의 지배를 받고 살아갑니다. 시간이 얼마만큼 흘러가면 내 이 한 몸도 죽을 것이라는 그러한 사실에 얽매여 살아가는 우리들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시간의 흐름을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레벨(level)에 놓을 때도 없잖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러한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시간의 생명이 아니라, 영원의 생명(The Eternal Life)이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시간의 흐름 속에 맡겨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의 의지에 맡길 수 있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과 자세가 택함 받은 자로서의 선택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래는 자기의 늙어감에 하나님의 약속의 기준을 삼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는 아브람도 동조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적 편법을 썼습니다. 이는 택함 받은 자로서의 바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씀드린다면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기다림이라는 선택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때가 찰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모습”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분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 4:4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에 대해서도 “때가 찰 때까지” 기다리신 분으로 말씀합니다. 또 베드로도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또한 예수님도 이러한 때가 차는 모습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열리는 모습을 소개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시는 분이심을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이야기도 하셨습니다(눅 15장).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기다릴 수 있는 자세를 우리들의 어떤 행동보다도 먼저 간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기다리지 못합니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일을 꼭 자기 시대에 해 놓으려고 합니다. 그 일에 대한 열매를 자기가 꼭 봐야겠다는 심산입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우리가 성경공부 시간에 보는 성경으로 “표준 새 번역”이란 번역 성경이 있습니다. 이 “표준 새 번역” 성경의 초판은 실패했습니다. 번역의 많은 부분에 잘못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잘못된 번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어느 신학자가 지적했습니다. 서양에서는 성경 하나를 번역하는데 시간을 두고 천천히 서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번역하는데, “표준 새 번역”은 빠른 시간 안에 번역하려고 무리하게 번역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번역자가 자기 시대에 이 번역이 꼭 나와야겠다고 무리함으로 성급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실패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번역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읽는 “표준 새 번역”은 개정판 성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리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우리의 모습에 담아야 합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의 나치 정권에 대항했던 순교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의 이 말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습은 정치적인 인간도 아니며, 윤리적이고 지성적인 인간도 아니며, 더욱이 종교적인 인간도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 하는 인간상은 바로 기다리는 인간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뒤로 하고, 인간적인 편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대로, 이삭이란 아들을 아브람의 몸에서 나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복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지도록 하나님 앞에서 기다릴 줄 아는 모습으로 선택받은 자로서의 선택을 하실 수 있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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