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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속한 사람 (빌 3: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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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정만 목사 (상동교회)

나무에서 사과가 땅을 향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하였지만 뉴톤은 그것을 이상하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왜 사과는 땅을 향해서 떨어져야만 하는 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법칙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만류인력이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 중의 하나입니다.
물체와 물체 사이에는 서로 잡아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이지요.
지구에는 바로 이런 물체를 잡아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중력이라고 하지요.

우리 모두는 이 지구상에 살면서 이런 중력의 지배를 받고 살고 있습니다.
사과가 땅을 향하여 떨어지는 것도 땅에 그 사과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우리가 무게를 느끼는 것도, 그래서 내 몸무게가 얼마다라고 측정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중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이 중력의 영향, 즉 땅의 힘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중력이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글쎄 과학자가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일견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살아갈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무중력 상태에서 우주인들처럼 유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튼 이 땅에 속해 있으면서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이 땅의 힘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닙니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측면에서도 우리는 땅의 힘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땅의 힘의 지배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땅에 속한 존재, 자연인의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피조물의 모습입니다.  썩어 없어지는 육체적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한계, 그리고 우리의 일시성, 우리의 연약함 등을 의미합니다.
땅에 속한 존재이기에 우리는 오늘도 입고 먹어야 하고, 피곤을 느끼고, 괴로움을 느끼고, 또 죽어야 하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지난주간에도 우리는 한 분 장로님 장례를 모셨습니다만 우리는 일시적으로 살다가 그 때가 되면 땅으로, 즉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들로 지음 받았습니다.
말 그대로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의 틀과 한계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땅에 속한 인간 존재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땅에 속한 인간 존재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땅에 속한 인간 존재는 강철같이 단단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좁은 육신의 틀 안에 갇혀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3장에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때부터 이들은 땅에 속하여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땅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늘의 존재에서 땅의 존재로 떨어져 나왔습니다.  이것이 타락입니다.
아담은 종신토록 땅에서 수고하여야 먹고 살 수 있는 땅에 매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하나님의 본성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땅의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로 타락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땅에 매여서 살아가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현주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선포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지금껏 땅에 속하여 땅의 지배를 받으며, 땅의 힘에 복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하늘에 속한 자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일시적이며, 죽음 안에 한계 지어진 유한한 존재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영원을 사모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땅에 속한 존재가 하늘에 속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순전히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그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땅에 속하여 땅의 생각과 땅의 존재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결코 하늘에 속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 노예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이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노예들은 한 번 노예가 되면 그 노예 상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도 노예가 됩니다.
그가 아무리 일을 열심히 잘하고, 영리하고, 주인에게 충성해도 그는 여전히 노예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는 무슨 수를 써도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그의 현실이요, 그를 둘러싸고 있는 그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를 사서 그에게 자유의 은혜를 허락해 준다면 그는 자신의 노예라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서는 주님께서 우리를 값을 주고 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자신의 몸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과거 죄의 노예로부터, 땅에 속한 존재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 자, 땅의 한계에서 해방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힘과 능력이나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바울의 회심 과정에서 이런 것들이 분명히 보여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땅에 속한 것을 추구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로를 자랑했습니다. 
자신이 지금껏 해 왔던 일이 어떤 것인가를 줄줄이 나열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과업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자랑하였습니다. 
자신은 유대인 지파 중에서도 영향력이 있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가문을 자랑하는 것이죠. 
그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의 사회적 위치를 자랑합니다.
또한 가마리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그의 학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의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과연 어디에 속한 것입니까?
학벌은 어디에 속한 것이며, 자신이 속해 있는 가문의 영광은 어디에 속한 것입니까?  지금껏 자신이 쌓아 온 수많은 행적들과 이력들은 다 어디에 속한 것들입니까?
바로 땅에 속한 것들이지요.  잠시 잠깐 있다가 사라져버릴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썩어져 없어져 버릴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껏 이와 같은 것들을 자랑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세상에 어떤 빛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강렬한 빛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지금껏 그가 추구해왔던 세상의 어떤 공로의 빛, 자랑의 빛, 학벌의 빛, 또는 신분의 빛과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빛이었습니다.
하늘의 밝은 빛 앞에 서면 세상의 어떤 것도 자신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눈이 먼 상태로 그가 다메섹에서 지내고 있을 때,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주님의 명을 받고 그에게 와서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때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을 만나기 전처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과거처럼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차원이 다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땅의 것을 보는 자가 아니라 하늘의 것을 보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이 가져야 하는 영적인 변화의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애벌레의 삶은 갇혀 있는 삶입니다.  언제나 땅에 붙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땅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소망 없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보십시오.  나비는 비상합니다.  나비는 땅에 붙어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나비와 애벌레는 같은 눈으로 볼지라도 전혀 다른 것을 봅니다. 
애벌레 때에는 모든 것들이 장애물이요, 걸림돌로 보였지만 나비가 되면 그 모든 것들을 뛰어 넘습니다.  애벌레에게는 땅의 속박이 있지만 나비에게는 하늘의 자유가 있습니다.
애벌레 때에는 참으로 중요하게 보이던 것들이 나비에게는 너무 하찮아 보이는 것이지요.
애벌레였던 바울은 나비가 되었습니다.
지금껏 그가 귀중하게 여겨왔던 모든 것들이 있었습니다.
결코 놓을 수 없다고 집착하며 붙들고 있던 땅에 속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합니다.
찬송가 204장 3절을 보면....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주님을 만나고 나니 그는 이 땅에 속한 것들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빌립보 교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늘의 것을 보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은혜를 입었는데,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땅의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땅의 것에 매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세상의 명예와 자랑과 공로를 내세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즉 하늘에 속한 이름을 갖고 있지만 이들은 땅에 속한 자로, 자연인의 모습으로 동일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것, 그것이 계속될 것인 것처럼 그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너희의 마침은 멸망이라고 선포합니다. 
너희 신은 배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배는 우리 몸의 일부분인 배를 지칭합니다.  세상적인, 땅에 속한 것, 그것들을 자신들의 신으로 섬기며, 그것들로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은 그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에 그들을 부끄럽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땅에 속한 것이요, 땅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쓸모 없는 쓰레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우리의 시민권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습니까 땅에 있습니까?
여러분들 하늘의 빛에 눈이 멀어 보았습니까?
여러분들은 애벌레처럼 땅만 바라다보고 땅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비가 되어서 새로운 하늘을 소망하고 있습니까?
땅에서 벗어나 비상하는 체험을 가져 보셨습니까?
참으로 여러분들 주님의 빛에 눈멀어 보았습니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안목과 이생의 정욕이 하늘의 강렬한 은혜의 빛으로 한 번이라도 눈멀어 보았습니까?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의미를 잃어버린 경험을 갖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그와 같은 신앙의 순간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지금껏 우리가 추구하는 삶은 과연 무엇을 추구하는 삶이었습니까?
땅에 속하여 땅의 것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땅의 것입니까?  하늘의 것입니까?
물질과 명예, 세상적인 소욕, 세상적인 자랑, 학벌, 지식, 가문, 좋은 회사....
이런 것들이 여러분들의 자랑거리가 아닙니까?
땅에 속하여 한 세대도 가기 전에 사라질 것이 여러분들의 자랑거리가 아닙니까?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어서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 온통 우리가 구하는 것들이 땅에 속한 것들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 분이 매일 매일 부어주시는 영적인 풍성함을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아니면 세속의 모든 것들만을 위하여, 나 하나의 잘됨만을 위하여 드리는 이기적인 간구, 땅에 속한 간구가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지 않습니까?

지난 번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때, 참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방화문이 닫혀서 탈출을 못하고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검찰에서는 그 방화문이 어떻게 닫혀졌는지를 조사한다고 합니다.
후에 보니 그 방화문 앞에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른 사람들의 발자국입니다.
말 그대로 이들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얼마나 절규했을까요?  문을 두드리고 걷어차면서 얼마나 그 문이 열리기를 바랐을까요.
하지만 끝내 그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제게는 영적인 도전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삶과 영원한 죽음 앞에서 우리 역시도 그와 같은 문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혹 내가 하나님 나라 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그런 존재가 된다면 어찌할까요.
세상에서 언제나 세상적인 것만을 추구했습니다.  그것이 계속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때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지 못하고 문 밖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절규하는 존재가 된다면 얼마나 불쌍한 존재이겠습니까?
오늘 말씀처럼 우리의 낮은 몸이 주님 닮아 하늘의 몸으로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여야 할 텐데요....  그래서 하늘의 시민권자가 되어야 할텐데요.
그 은혜를 누릴 수 없다면 어찌 할까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졌다고 스스로 자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땅의 중력의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땅의 일,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땅의 일 넘어를 바라봅시다.  애벌레가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산 소망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속하여 하늘의 것을 귀히 여기며 그 나라를 소망할 수 있는 주의 백성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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