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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전도!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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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신삼철 목사 (천호교회)

시작하는 말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고 가신 부탁의 말씀 중 가장 요긴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성령님의 보혜사 되심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되어 영원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것을 세상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전도란 입으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 주는 것을 말합니다. 생활로 보여 주는 것을 말합니다. 현대는 듣는 라디오 시대가 아닙니다. 눈으로 보는 영상 시대가 되었습니다.

1. 개척자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쫓아 내시면서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으리라"(창3:17-19)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최후의 선고입니다. 세상법정의 선고도 최종 확정 선고라면 그대로 실행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리신 최종 선고의 말씀을 인간이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최후의 선고는 평생을 개척자로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그때부터 하나님의 선고대로 종신토록 얼굴에 땀을 흘리며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캐내며 개척자의 생활을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을 출발하여 북부 팔레스틴을 향하여 진군했습니다. 막바지에는 여리고 동편 모압지방에서 서부 팔레스틴 개척을 위해 진군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에게 서부개척이란 그렇게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물고 물리는, 쫓고 쫓기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그후에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청교도"라는 말을 많이 들어 왔습니다. "청교도"라는 말은 원래 영국의 "엘리자베드"시대에 생겨난 말입니다. 영국에서 보통 영위하는 생활보다 더 절제하는 생활을 살고자 했던 모든 이들에게 적용된 이름입니다.

17세기에 와서 그 이름이 보편화 되었습니다. 백스터는 자기 아버지를 이웃 사람들이 청교도라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자기 아버지는 관습을 따라 다른 이들이 춤출 때 성경을 읽었고, 다른 이들이 주교들을 비난할 때 비난하지도 않았고, 주정뱅이들이 술을 마실 때 자기 아버지는 오히려 그들을 비난했기 때문에 청교도라고 불리워 졌다고 했습니다.

청교도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나, 퀘이크 교도라는 말과 같이 처음에는 좋지 못한 비아냥 거리는 말로 사용되었지만 나중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애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청교도들은 영국이 자기들과 자손들이 마음놓고 신앙생활을 할만한 곳이 못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청교도 신앙을 위해서는 많은 땀과 피를 바쳐야 했습니다. 급기야는 생명까지라도 바쳐야 했습니다. 

개척(開拓)이란 원래 "산야나, 황무지를 일구어 전토를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 우리 시골에서는 산야에 손바닥만한 공간이나 틈만 있어도 개간을 하여 감자를 심고, 조를 심어 초근목피와 함께 생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교회가 이루어지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 개척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루디아의 집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이 수감되었던 감옥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상의 모든 교회는 은혜받은 성도들의 개척정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개척정신으로 똘똘 뭉쳐야 합니다. 개척정신이 생활화 되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홀로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생활했습니다. 몰려오는 사람들에게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3:11)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 광야에서 홀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개척 전도를 위하여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거기서 비로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고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전도하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전도는 땀과 눈물과 피로 얼룩진 개척정신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개척정신으로 생활하는 자만이 전도할 수 있습니다. 영혼을 구원시킬 수 있습니다.

2. 양육자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고 축복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축복대로 가인과 아벨을 잉태하여 생산했습니다. 그리고 셋을 낳았고, 그후 아담은 930년간 생육하고 번성시키며 살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어서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에게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3:16)고 선고하셨습니다.

양육자는 여성적인 기질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데는 여성의 역할이 필수적입니다. 남성적인 기질로는 양육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남성의 기질은 폭팔성이 있습니다. 여성의 기질은 참을성이 있습니다.

잉태하는 고통은 여성만이 참을 수 있습니다. 입덧은 여성들만이 당해야야 할 고통입니다. 게다가 임신 중독증까지 걸리면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됩니다. 잉태의 고통은 10개월동안 당해야 합니다. 그래도 생명을 품고 있다는 생각에 참고 견딥니다.

잉태하는 고통이 지나가면 또 해산의 큰 수고와 고통이 옵니다. 해산의 고비는 2-3일이지만 산모와 아기가 죽을수도 있다는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여성들은 잘 참아냅니다. 건강한 아기를 낳습니다.

여성들의 사명은 아이를 낳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이를 강건하게 양육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이를 잉태하여 낳는 것보다는 기르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고들 합니다. 낳는 것보다는 양육하는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 하나 길러내는데는 어머니 한 사람이 밤낮 주야로 매달려도 힘겹습니다. 자기 희생과 봉사정신이 없이는 도저히 아이를 길러낼 수 없습니다.

현대 사회는 여성들이라도 희생정신과 봉사정신이 결여되어 아이들을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양육자의 책임의식이 있을 때 새가족들이 정착하게 됩니다. 양육자의 자세를 보여 줄 때에 교회가 부흥하게 됩니다.

전도의 대상자에 대한 희생과 봉사가 뒤따라야 합니다.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따사로운 햇빛같은 감정을 나타내야 합니다. 영혼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책임감에는 끈기와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4:15-16)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이래라 저래라고 하는 가르치는 자는 많습니다. 그러나 친 자식을 대하듯 아비나 어미의 노릇을 하는 자들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안에는 이래라 저래라고 하는 자들보다는 부모처럼 사랑하고 돌보는 자들이 필요합니다. 

3. 도우미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도우미(배필)로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가 서로에게 도우미 역할을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우미 역할을 잘 할 때에 그들은 정이 들었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했습니다. 난간을 극복하며 살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인생의 맛을 잃은 자들이 이외로 많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들, 불치의 병환자들, 도박에 빠진자들, 사업에 실패한 자들, 소외되어 외롭고 쓸쓸한 자들, 희망과 소망이 없는 자들, 이외의 불행한 일에 사로잡힌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자들에게 도우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러한 자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받은 자들에게 소금을 치는 듯한 행동을 할수도 있습니다.

상처받은 자들의 상처를 더 쓰라리게 하는 소금이 되어서야 어찌 전도자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상처받은 자들의 입맛을 돋구어 주는 맛나는 소금의 생활을 하여야 전도자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사에 신자를 대하건, 불신자를 대하건 전도자의 생활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전도자로서 합당한가 아닌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 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칼날같이 실수없이 날카롭게 사는 것보다는 엄벙 덤벙 덤비며 실수 투성이라해도 따뜻하고 착하게 살아야 전도가 됩니다. 착한 행실을 보고 전도의 대상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불신자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세례요한의 소리시대도 지났습니다. 최봉석 목사님의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전도 방법도 어려워졌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복음을 보여주고, 에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을 보여주고, 천당과 지옥을 보여 줄 때에 영혼을 깨울 수 있습니다. 영혼을 건져 낼 수 있습니다. 

끝맺는 말

4대에 걸쳐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과 헌신을 바쳐온 언더우드가가 한국을 떠난다고 합니다. 1885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우리 이름으로 "원두우"목사님이 첫 장로교 선교사로 이 땅에 발을 디딘지 119년 만입니다.

언더우드 1세가 연세대와 새문안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YMCA를 조직해 캄캄하고 암울했던 이땅에 빛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3대가 이 땅에 뼈를 묻었습니다.

그의 증손인 "원한광" 한미교육위원회 위원장은 "우리 일가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봉사는 다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을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들 일가를 통해 많은 것을 얻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생활로 우리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언더우드 1세의 동상에 새겨진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의 명문은 "고심으로 조선 민중의 믿음과 슬기를 돕는 그의 평생을 생각할지로다. 베푼 바 날로 늘어감을 따라 우리의 사모 갈수록 깊다."라고 적힌 글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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