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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참 좋은 가정을 만듭시다 (잠 15:16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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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구원 목사 (갈보리교회)

칼빈은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모든 경건한 자의 가정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라고 했는가 하면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정들은 수많은 작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 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가정을 가져보지 못한 존 하워드 펜이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이라는 노래를 만들어서 모든 이의 애창곡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내도 자식도 가정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 즐거운 나의 집을 부른 것은 아마도 가정이 너무 그리운 나머지 불러본 혼의 노래가 아닌가 봅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가정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말하기를 “가정은 크리스챤의 인격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은 장소이다.” 라고 했습니다.

오늘 저는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해서 설교제목 자체가 너무 흔하고 쉬워서 소홀히 여겨질까 염려되는 가운데 ‘참 좋은 가정을 만듭시다’ 라고 하는 지극히 대중적인 제목을 선택해 보았습니다.

‘참 좋은 가정’은


Ⅰ.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입니다.

본문 15장 16절에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했습니다.

이사야 33장 6절에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르아트 예호바)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무작정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성품을 바로 알아서 두려운 마음으로 공경하고 예배하며 복종하고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여호와를 경외했던 가정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노아의 가정이 그러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정이 그러했습니다. 가이사랴의 고넬료 가정이 그러했고 빌립보의 옥사장 가정이 그러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마가 요한의 가정과 가버나움의 베드로 가정과 골로새의 빌레몬 가정과 라오디게아의 눕바의 가정과 겐그레아 교회에는 뵈뵈 집사의 가정이 그러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말은 사유(思惟)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인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두려움과 복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참 좋은 가정’은


Ⅱ. 신의에 기초한 가정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했습니다.

신의에 기초한 가정은 성부 하나님의 창조와 그의 거룩한 언약을 견지하고 성자 예수님의 구속에서 새롭게 되고 성령 안에서 성화적 삶을 살아가는 신성한 안식처요 곧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했습니다.

참 좋은 가정은 신본주의 가정입니다. 곧 십자가의 구속으로 은혜의 지배를 받으며 진정한 신앙고백이 생활화된 가정입니다.

‘참 좋은 가정’은


Ⅲ.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가정 입니다.

여호수아 24장 15-16절에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임종을 눈앞에 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바알 우상이냐 하나님이냐를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고 천명하는 여호수아를 따를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했던 이유로 1940년 제 4차로 검속되었다가 1944년 4월 21일에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은 최후로 산정현 교회에서 한 5종의 나의 기원이라는 설교를 하셨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자식들을 여러분에게 짐되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무소불능하신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는 때는 철석같은 마음도 변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 자식의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선 신자도 허다합니다 인간의 얽히고 얽힌 인정의 줄이여! 나를 얽어매지 말라! 주님 따라가는 나를 얽어매지 말라! 부모나 처자를 예수 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예수께 합당치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참 좋은 가정’은


Ⅳ. 거룩한 문화적 사명을 다하는 가정 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거룩한 문화와 세속적 세속문화를 한사코 구별하는 이유는 세속문화는 인간의 요구이고 거룩한 문화는 하나님의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 22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가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작은 왕국입니다. 따라서 첫째는 만물을 다스리는 왕적 사명에 익숙해야 합니다.

둘째는 만물을 개발하는 선지자적 사명에 투철해야 합니다.

셋째는 만물을 정복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장적 사명에 인간된 존재의의와 가치를 찾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 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참 좋은 가정’은

Ⅴ. 탁월한 윤리와 도덕성을 견지한 가정 입니다.


1) 부모에 대한 공경윤리 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

십계명 중에서 부모 공경에 대한 것은 제5계명으로 인간에 대한 계명 중에는 으뜸이 되는 계명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명에 차등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의 ‘공경’은 히브리어로 ‘카베트’(???)인데 이것은 ‘간’(肝)이란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무거운 것’, ‘영광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부모를 무겁게 여기고, 존경하고 간(肝)처럼 소중하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부모는 이 땅에서 자녀에게 하나님을 대행하는 명령권자입니다.



2) 자녀에 대한 사랑윤리입니다.

에베소서 6장 4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부모가 자녀를 분노케 하는 말이나 행동을 삼가라는 의미 외에 부모의 권한을 남용하여 자녀에 대한 절대적인 주권자로 군림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에서 “자녀는 우연의 열매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분깃으로 나누어주신 열매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성도들의 자녀는 거룩하게 태어난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자녀는 태중에 있을 때에 이미 영생의 언약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의 트랜트 회의에 대한 반박논문에서 강변했습니다. 이러한 필연적인 사실에 너무 고무된 나머지 자녀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자녀에 대한 부권과 모권이 상실되어 가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의 역할이 다분히 도구적 수단으로 변해가는 서구에 비해 한국의 가정은 유교적 가정윤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부모의 역할이 정적(情的)유대를 바탕으로 하는 애정 제공적인 것에 머물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최근 서양식 자유주의 교육이란 미명아래 무관심 내지는 자유방임적인 방향으로 급선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권상실과 모성애 결핍, 부모와 자녀간의 대화단절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한 맹목적인 자유가 사랑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되며 부권과 모권이 자기의 위치를 일탈(逸脫)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3) 부부에 대한 애정윤리입니다.

마태복음 19장 4-5절에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 5절에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칼빈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괴물(monster)과 같다고 했습니다. 부부가 일부일처의 원리를 잠시 마음속으로라도 벗어나는 것은 죄악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일부다처에 대하여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부다처는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의도하는 이상적인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일부다처는 인간의 죄의 실제적인 상황에 대한 하나의 조정으로서 단지 묵인되거나 허용된 것입니다. 일부일처는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으로 교훈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연합이 일부일처였습니다.

일부다처는 하나님을 배역한 죄 많은 사회에서 발생한 것입니다(창 4:23).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한결같이 일부다처로 인하여 인간들은 고통스러웠고 더우기 솔로몬은 일부다처로 인하여 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일부다처를 의도하거나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이 사악할 정도로 완악하기 때문에 다른 죄들과 같이 일부다처를 허용 내지는 묵인하신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 만큼 일부다처를 심히 미워하십니다(말 2:16). 왜냐하면 일부다처는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인 교회와의 관계를 증거하는 남편과 아내의 이상적 관계를 흐려놓기 때문입니다.



4) 형제에 대한 화목 윤리입니다.

잠언 17장 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형제들과는 서로 용서하고 화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화목은 희생과 용서와 사랑을 담고 있는 그릇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작금에 일어나는 가정 파괴현상을 보노라면 우리는 가정을 사수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가정파괴의 일차적인 원인을 찾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가정이 절단나는 원인들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자고 나면 끔찍한 일들이 아침뉴스를 가득 메우고 있는가 하면 각종 일간지와 주간지, 월간지도 한결같이 가정붕괴와 함께 인간성을 상실한 엽기적인 행동들로 헤드라인을 깔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2500여명이 들어가서 술을 마실 수 있는 초대형 유흥업소가 생겨나는가 하면 더욱 한심한 일은 그곳에서 남녀들이 각기 다른 이성들과 만난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카드 빚 때문에 어린 자녀 셋을 때려서 죽이는가 하면 “아빠, 죽이지 마! 죽기 싫어!” 하며 울부짖는 자식을 로프로 묶어서 차안에 태우고 호수 속으로 뛰어들어 동반자살까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짐승 중에 가장 무서운 짐승이 사람이라는 옛사람들의 말이 생각납니다.

이쯤 되고 보니 결혼을 기피하는 여성들이 갈수록 늘어나는데 대해 그 누구도 그들을 백안시(白眼視)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어서 자녀가 장성하여 고등학생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혼수 문제로 야기된 앙금 때문에 이혼을 해야 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은 자족할 줄 모르는 상대적 빈곤함이 가져온 증후군이 분명합니다.

물론 우리주변에는 절망적인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5월 6일(목)에 방영된 (KBS 2TV) 다큐멘터리 인간 시대 5부작 ‘옥탑방 3자매’ 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가정이 얼마나 소중하며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서로 희생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이들은 갑자기 아버지 사업이 부도가 나고 빚 독촉에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집을 나가게 되지만 큰 딸은 굳은 의지하나로 그 어려운 환경에서 공주사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골프장 캐디를 하는 둘째와 고등학교 1학년인 셋째가 위암말기인 홀 아버지를 간병하며 살고 있습니다. 군포의 어느 좁은 옥탑방 한 칸을 얻어 그곳에서 아버지가 사업으로 진 빚을 갚아가며 살아가는 3자매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논픽션 드라마 이상의 것이 분명합니다.

가정은 순결한 것입니다. 그것은 결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16절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가정은 인간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의한 것입니다.

시편 127편 1절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고 했습니다.

참 좋은 가정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가정에 주인이 되어 있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정의 가훈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수요와 공급이 결정되고 수입과 지출의 계정과목이 설정되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정에 입법이 되고 사법이 되고 행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가정의 출발이 되고 그 가정의 계승이 되고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이 그 가정을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가도록 해야 합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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