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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증인들의 힘 (행 1:1~8, 신 34:7~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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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석공 목사 (광야교회)
 

  사람은 누구나 꿈을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은 사랑하는 조국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꿈이 스승인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도, 친구도, 생업도 다 버리고 예수님만 열심히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어느 날 갑자기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그와 함께 제자들의 꿈도 사라져버린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그들은 각기 살 길을 찾아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흩어진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 사십 일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은 잃어버린 꿈을 다시 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그들의 꿈은 삼 년 동안의 충분한 교육과 또 사십 일 동안의 재교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세속적인 차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에 관한 것은 하늘 아버지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알 바가 아니라고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대신 제자들이 정말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은 사도행전 전체를 푸는 열쇠와도 같은 말씀입니다. 또 주님의 제자로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반드시 붙잡아야 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지시하시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먼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복음의 중심 내용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즉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볼 것 같으면 모여서 기도하던 무리에게 성령이 강림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성령 강림이라고 하면 방언하는 것, 세찬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 또 불의 혀 같은 것이 보이는 것 등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령 강림과 충만의 확실한 증거는 이런 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람들이 마침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베드로가 한 설교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리가 다 성령 충만하여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은 놀라고 또 어떤 사람은 그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일어서서 뭐라고 외쳤습니까?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행전 2장 36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아무나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하반절 참고)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인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땅 끝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과연 사도행전은 복음이 어떻게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땅 끝까지 나아가고 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처음에 예루살렘의 작은 다락방에서 시작된 복음의 역사는 마침내 그 당시로서는 땅 끝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과연 사도행전은 그 땅 끝, 즉 로마 감옥에서 죄수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땅 끝까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실 은혜를 받고 성령을 체험해도 내 가족, 내 교회, 내 민족이라는 극히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초대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핍박을 주셨습니다. 핍박은 결코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을 땅 끝까지 흩어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해져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어디이고, 유대는 또 어디입니까? 사마리아는 과연 어디이고, 또 땅 끝은 과연 어디입니까? 이것을 지리적으로 표현할 것 같으면 예루살렘은 우리가 사는 지역이고, 유대는 아마 남한이 될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북한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고, 그리고 땅 끝은 미전도 종족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표현할 것 같으면 예루살렘은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한 내 가족이고, 유대는 구원받지 못한 내 친구나 이웃이 될 것입니다. 사마리아는 나와 관계가 좋지 못한 사람들 중 아직까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고, 땅 끝은 지금까지 내가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여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세상 어디에나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할 우리에게 예수님은 능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능력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눈먼 자가 눈을 뜨고, 귀신이 쫓겨가는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짜 능력의 실체는 복음 증거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 증거의 사명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런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만 하더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이 능력을 받게 되자 어떤 변화가 생겼습니까?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힘이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물론 하늘로부터 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말씀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죽음은 결코 끝이 될 수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직접 체험한 제자들은 이제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복음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힘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신명기 34장 7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출애굽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모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죽을 때의 모습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영어 성경 The Living Bible은 좀 더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 he was as strong as a young man." 젊은이처럼 강건했다는 말입니다. 죽음 앞에서, 또한 죽을 때까지 그가 어떻게 그렇게 젊은이처럼 강건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충만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짐 엘리엇이라는 사람이 친구 네 명과 함께 에콰도르 원주민 선교를 위해서 떠났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들은 현지에서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고 모두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만약 총을 쏠 것 같으면 원주민 선교의 문은 영영 닫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 꿈을 품고 갔지만 결국 그 꿈을 펴보지도 못한채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젊은 선교사들의 순교 소식은 미국 교계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기자 한 사람이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 엘리엇 선교사의 부인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부인이 정색을 하고 말했습니다. “비극이라니요? 말씀을 삼가 주세요. 남편은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 거기에 갔습니다. 자기 목숨을 바치기 위해서...”

  그리고 남편이 대학 다닐 때 쓴 큐티 노트의 한 부분을 펴 보여 주었습니다.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이 있는가 하면, 결코 놓칠 수 없는 것도 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을 위해서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그것을 바치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적어 놓았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그것을 위해서 끝까지 붙들고 있을 수 없는 것을 바치겠습니다. 오, 하나님! 오래 살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주의 뜻을 이루는 일에 제 삶이 쓰임 받기를 소원합니다. 주여! 나를 불태워 주옵소서!”

  이와 같은 사연이 소개되자 많은 사람들이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섯 명의 선교사 부인들은 남편들이 순교한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신 앞에서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남편들이 이루지 못한 그 사명을 우리가 이루자!” 그리고 모두 그 마을로 이주하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그들은 모두 20대였습니다. 그로부터 거의 반 세기가 지난 지금 그 마을은 복음의 땅으로 변했습니다. 선교사를 살해한 다섯 명의 원주민 가운데 네 명이 목사가 되었고, 천여 명의 주민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알고 보면 우리도 믿음의 조상들, 즉 순교자들이 흘린 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혹시 우리가 그 복음의 종점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분명히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 십자가로 날 구원하신 주님의 그 말씀에 순종하여 충만한 성령의 능력을 받아 목숨을 걸고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땅 끝까지 전하고 증거하기로 다짐하고 결단하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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