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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삼상 1: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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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철 목사 (대구감리교회)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22)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 23)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25)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26) 한나가 가로되 나의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주 당신 곁에  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구 409)


충북 제천은 1895년 을미사변 직후 유인석(柳麟錫)이 의병을 일으켜 전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항일투쟁을 벌였던 곳입니다.

제천시는 의병정신을 이어받자는 취지로 의병 창의(倡義)1백주년인 95년부터 제천문화제 명칭을 '제천의병제'로 바꾸고 매년 10월에 이 행사가 열립니다.

그 가운데 대중 가요 가수들이 와서 노래 부르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 안치환이라는 가수가 이런 노래를 부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정지원 시. 안치환 곡)"

강물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되지 음 알게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 안은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지를 으음-음--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되지 음 알게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 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기-ㄹ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사랑


대중 가요를 들으며 이렇게 전율한 적이 없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그 아름다운 사람 중에 주님께서 아름답게 칭찬한 부류가 바로 어린이었습니다. - 흠 없고 순전한 어린이,

한 가정을 이룬 젊은 부부에게 결속력을 강화시키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게 되는 절대적 요소 중의 하나인 자녀, 그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누리는 행복과 자랑은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나에게는 이 자녀가 없었고, 그 남편의 사랑이 아무리 지극 정성이라 할지라도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자녀 없이 사는 삶은 특별히 유대 여인에게 치욕이고, 저주요, 그 삶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지난 주 야베스의 기도를 통하여 나누었던 은혜의 핵심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아픔을 아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 한나는 눈물어린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기도할 수 없어서 아들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합니다. 그 아들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로 양육할 것을 서원합니다.

삼상 1:10~11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11)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삼상 1:20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그 여인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아들을 소원하고 기도의 응답을 아들을 얻은 이 여인, 이제 상황 종료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간절히 기도하여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풀리면 상황 종료가 아니라 그 때부터 새로운 시작입니다.

1. 그의 소망은 산 소망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삶을 봅시다.

벧전 1:3~9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사도 베드로는 바야흐로 로마 황제 중 가장 악명 높은 폭군 네로가 집정하던 시기에 그 핍박의 강도가 날이 갈수록 더해가던 시기에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이 편지를 씁니다.

핍박하는 주인공은 악명 높은 네로 황제입니다.

그는 어머니와 스승 세네카의 도움을 받아 로마의 황제가 되었지만 자신의 권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를 살해하고 마침내는 스승 세네카 마져 차례로 죽인 비인간 적인 인물입니다.
아직 이방세계에서 연약한 교회는 여러 면에서 로마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습니다.
황제 숭배 놀음에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습니다.
신분의 질서도 무시하고 함께 모이는 것이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자기네끼리 매주일 뭔가 먹으면서 이것은 내 살이니.. 이것은 내 피이니... 라고 합니다.
그래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의 살과 피를 마시는 식인종이라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분 나쁜 것은 그들의 삶이 자기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물귀신과 같은 심보가 있습니다. 자기 혼자 더러우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범죄를 하는데도 친구를 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르게 사는 사람을 보면 괜스리 배가 아픕니다.

"카타곰의 순교자"라는 책을 보면 로마에 카타콤이라는 지하 동굴이 있는데 핍박을 피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기서 살았다고 합니다.

미친 네로의 광기가 점점 더해갈 때 배교하는 사람들이 늘어갔습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압박을 가해옵니다. 그러한 시기에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십니다.

벧전 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입문할 때 시험도 안치르고 재수, 삼수도 안해 보셨으니 그런말 하시지 어떻게 오늘 시험점수가 시들시들, 비틀비틀한데 기뻐하란 말씀입니까?

베드로, 당신이 부부싸움 해보았나요?
사업에 실패해 보았나요?
빚쟁이들에게 정신없이 시달려 보았나요?
사랑하는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죽는 아픔을 겪어보셨나요?
멀정한 젊은 아들을 잃고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애통해 보았나요?
육체의 질병으로 말할 수 없는 절망과 무기력감을 경험해 보셨나요?
그렇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시련중에 크게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항의 한다면 베드로는 별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스승의 죽음을 앞에 놓고 겁에 질려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 쳤던 사람이니까요.
그러나 이 말은 그의 말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임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히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시험당할 때 크게 기뻐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친히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고통 중에 기뻐할 수 있습니까?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단테의 신곡 이라는 유명한 책에 보면 지옥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큰 글자로 쓰여있다고 합니다.

"너희들 이곳에 들어가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지옥이야말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세게입니다.
희망이 없는 세계가 지옥이라는 말도 되겠지요.
살아 있는 사람은 크건 작건 간에 누구든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이 없이는 인간은 한 순간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생명의 세계는 반드시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이 없는 세계는 죽음의 세계입니다.

전 9:4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

죽어버린 시체한테는 더 이상 희망을 걸 것이 없습니다.
등신이라도 살아있는 사람에게 희망이 있고 희망을 걸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소망은 죽은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입니다.
[산 소망]이라는데 주의를 기울입시다. 산 소망이란 살아있는 소망 그 이상의 것이다.
산 소망이란 우리의 신념에서 나오는 심리적인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며 궁국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 소망의 본체이십니다.
죽은 소망은 우리가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로터 참 기쁨과 평안을 앗아가버립니다.

죽은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의 썩어 없어질 죽은 것에 소망을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망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낸 환상도 죽은 소망입니다. 뿌리가 없기 때문에 죽은 소망입니다.

세상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참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환란을 이길 힘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산 소망을 곡 붙들때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환란을 [믿음의 시련]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그 시련을 크게 기뻐하라고 합니다.
그러한 고통스러운 환경을 제거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지 않은 점을 기억하십시다.
이 고통스러운 환경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자세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환란을 보고 겁먹거나 절망하거나 원망하거나 또는 격분하지 말고 오히려 크게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자굴에 들어갈지라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어 달릴지라도 크게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기 어려워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부부싸움 했어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했어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빚쟁이들에게 정신 없이 시달리고 있어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잃는 극한 슬픔 속에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멀쩡한 젊은 아들을 잃고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애통하면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으로 말할 수 없는 절망과 무기력감을 경험하면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닥치는 환란 풍파가 아니고 우리가 참 소망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붙들었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폭풍치는 갈릴리 바다를 걸어갔을 때 주님을 똑바로 바라보았을 때는 폭퐁이나 시퍼런 바다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그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께서 눈을 돌렸을 때 그를 둘러싼 환경이 두려움과 공포로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풍랑에 이는 파도가 문제가 아니라 베드로의 믿음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믿음이 문제입니다.


2. 소망 가운데 약속을 지킵니다.

우리 옛 말에 "칫간에 갈 때와 올 때가 마음이 다르다"고 합니다. 여러분 혹시 이웃에게 아쉬운 소리 해 본적 있습니까?

"내일 모레 꼭 갚을테니까 5만원만 빌려줘", "이자 4부 쳐 줄께".

그러나 정작 내일 모레가 오늘이 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사정 사정하던 이 돈 필요했던 이 사람. 이제는 역전되어 돈을 꿔간 사람이 배짱을 내밉니다.

한나가 아들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렸던 약속은 이제 한나의 삶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삼상 1:23~24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견에 선한 대로 하여 그를 젖 떼기까지 기다리라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그 여자가 그 아들을 양육하며 그 젖 떼기까지 기다리다가 24)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수소 셋과 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

한나는 젖을 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젖을 떼자 마자 아이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갑니다. 보통 젖을 떼는 기간을 3년으로 봅니다. 3년이란 기간동안 아이를 잘 양육하다가 젖을 떼자마자 아직 어린아이인 사무엘을 데리고 성전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 3년이란 기간은 약속을 잊어 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어렵게 낳은 아들인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한나가 알고, 우리가 압니다.
3년이란 꿈같은 기간동안 적당히 잊을 법도 합니다. 이제 겨우 젖을 뗀 어린 아이 아닙니까? 성전에 올려 맡겨 버리면 기도의 응답을 받은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여인은 잊지 않습니다.

시편 15편 말씀입니다.

시 15: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그 여러 대답 중에 이런 답이 제시됩니다.

시 15:4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한나는 바로 이런 점에서 다른 사람과는 다릅니다.

3년이면 그가 기도하던 그 때의 응답받은 감격과 간절하던 심정을 잊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한 사람입니다. 진실한 믿음을 잃지 않습니다.

삼상 1:27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28)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그렇게 서원을 지키는 한나에게 하나님은 더 큰 복을 주십니다.

삼상 2:21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

해가 될지라도 서원한 것을 지키는 한나에게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복을 더하여 주십니다.
한나의 이런 모습은 오늘 기독교 교육 진흥 주일을 맞은 우리들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자식 사랑은 참으로 유별납니다. 그러나 그 자식 사랑이 오히려 자식의 미래를 망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망칠 수 없습니다.

잘 양육해야 합니다. 어떻게 양육해야 합니까?
그저 품에 안고 있다고 그 자녀를 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세태는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바른 믿음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우선합니다.
정직과 순결보다는 출세와 명예를 더욱 귀히 여깁니다.
상황과 환경을 탓하면서 하나님 중심의 공의로운 삶을 포기하는 일을 식은 죽 먹듯 합니다.
그것은 자녀를 성공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닙니다.

자녀를 믿음 안에서, 소망을 갖도록 양육하고 지도하는 것은 부모된 우리들의 믿음을 다지는 일이 먼저 우선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분명히 이 세상의 어느 무엇보다도 아름답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렇게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잃지 마시고, 그 아름다움을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아름답게 보존할 수 있도록 가르치시고 양육하시어, 하나님의 더 큰 복락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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