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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권능을 받고 (행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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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기 목사

‘보혜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보혜사. 이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파라’라는 단어와 ‘클레토스’라는 단어가 하나가 된 말입니다. ‘파라’라는 말은 ‘곁에’라는 뜻이고, ‘클레토스’라는 말은 ‘부르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파라클레토스’라는 말, 즉 보혜사라는 말은 ‘곁에서 돕도록 부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누구의 곁에서?
바로 하나님의 백성,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 바로 여러분과 저를 돕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 받은 자가 곧 성령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함께 하시면, 그 분 곧 성령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을 돕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실 그랬거든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숨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어느 날 거리로 나가서 복음을 외쳤습니다. 이제는 담대하게 나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너희가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주가 되게 하셨다“고 외쳤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가 성전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 사람은 나면서부터 한 번도 일어나 걸어 보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데려다 성전 문 앞에 앉혀 놓으면 종일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구걸하여 그 생명, 그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앞을 베드로와 요한이 지나갔습니다. 이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구걸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눈 여겨 보고,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못 걷는 사람이 무엇을 얻으려니 하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그러면서 그 못 걷는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더니, 그 사람이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못 걷는 사람을 누가 걷게 하였습니까? 베드로입니까? 요한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십니까? 그 못 걷는 사람을 걷게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하신, 내가 가면 보내 주리라 약속하신 바로 그분,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일이 보통일입니까? 나면서부터 한번도 걸어 보지 못했던 사람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지, 얼마든지 할 수 일입니까?
영국의 노부나 장군이 1대 10의 불리한 병력으로 적진을 공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승리 하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부하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공격 목표를 향해 행군하던 중에 묵념을 마친 노부나 장군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내가 지금 이 동전을 위로 던져 땅에 떨어뜨리겠다. 만일 동전 앞쪽이 나오면 우리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러나 뒤쪽이 나오면 우리는 패할 것이다. 자! 이제 우리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장군은 동전을 높이 던졌습니다. 놀랍게도 동전은 앞쪽이 나왔습니다. 병사들의 사기는 높았고, 그래서 신들린 듯 싸워 이겼습니다.

50대 50일까요? 동전의 앞과 뒤. 그런데 그 동전은 양면이 똑 같았습니다. 노부나 장군은 양면 다 앞쪽으로 만들어 던졌던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앞에서 담대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도 실상은 마음먹기에 달려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 척 장신의 골리앗 앞에선 다윗. 이스라엘 군대는 “때려눕히기에는 너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커서 돌로 맞히기에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 하면서, 생각하기에 따라 강할 수 있고, 약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유명한 영국의 정신 병리학자 J. A. 하드필드는 <힘의 심리>라는 그의 책 가운데, 악력계를 사용해서 정신 암시가 힘에 미치는 영향을, 세 사람에게 동시에 세 번의 다른 조건 하에서 실험한 실험 보고서가 있습니다.

첫 번째 실험은, 보통의 각성 시에 테스트한 경우로, 그들의 평균 악력은 101파운드였습니다. 다음에는 그들에게 최면술을 걸어 “당신은 참으로 약하다”고 암시를 준 후 재어 보았더니, 29파운드로 보통 힘에 1/3 이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은 강하다”는 암시를 준 후 재어보니 평균 악력은 142파운드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 못 걷는 사람이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게 된 것이 마음먹으니 된 것입니까? 생각하기에 따라 그리 된 것입니까? “당신은 얼마든지 일어나 걸을 수 있고, 뛸 수 있습니다.” 그렇게 최면을 걸거나 자기 암시로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누구의 이름으로?
그런데 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에. 그렇다면 지금 베드로를 움직이고, 그 베드로를 통해 못 걷는 사람을 일으켜 걷기도하고 뛰기도 할 수 있도록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그 분이 바로 예수님께서 내가 가면 너희에게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 성령이십니다.
그럴 때 성령과 예수님이 다른 분입니까? 아닙니다. 하나이십니다. 그래서 그 되어진 사건에 놀라서 하는 사람들에 베드로가 하신 말씀은,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어찌하여 이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신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행3:12)

그리고 3장 16절, “그런데 바로 이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힘 있어서 된 것 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그 믿음이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서게 한 것입니다.”  누가 그 사람을 일어나 걷게 하고 뛰게 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께로 보내신 성령께서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보내주신 성령의 역사 입니다.

그런 사건이 있고, 베드로가 그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고 있었는데,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님의 부활을 내세워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을 선전하고 있는 것이 격분해서, 사도들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이튼 날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서 세워놓고 물었습니다.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이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으나 하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된 것 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들 집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 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베드로를 보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놀랬습니다.
보세요. 이들은 어부입니다. 소위 권력이나 재물이나 지식이나 뭐 좀 가졌다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별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 일도 놀랍고, 지금 하는 그 말도 놀랍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불과 50일전 그들은 모두 도망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유대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이나 걸어 잠그고 숨어있었습니다. 그랬는데, 이들이 태어 날 때부터 못 걷는 사람을 일으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게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앞에서기만 해도 덜덜 떨었던, 유대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사람들 앞에서,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너희들 집 짓는 사람들에게는 버림 받은 돌이지만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이 예수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을 없습니다.”
그렇게 당당하고 대담하게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사도행전 4장 8절에 있습니다. 거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무엇이 충만하여? “성령이 충만하여” 바로 여기에 베드로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그것이 베드로와 요한의 권능이었습니다. 힘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걷게 하여 뛰게 한 것도 바로 이 권능이고, ‘내 노라’고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권능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권능입니다. 이것이 곧 성령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일도 삶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착각 중 하나는, 교회의 건물이 커지면 교회가 부흥할 거라는 겁니다. 천만에요! 교회 건물이 커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부흥하니까 교회가 커지는 것입니다. “교회 재정이 넉넉하면 선교도 하고 뭐도 할 텐데…….” 하고 말합니다. 천만에요! 성령의 역사로 선교하니까 선교를 위한 제정이 충당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초대교회에 큰 건물이 있었나요? 제정이 넉넉했나요? 아닙니다. 그런데도 복음은 널리 널리 펴져나갔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초대 교회는 성령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담대하게 믿음을 지켰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의 말씀은,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 가면 너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겠다. 그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도 하고 내가 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8-11절에,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분은 자기가 원하는 데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왜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각각 은사를 주십니까?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힘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이 힘이 없으면, 세상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하나님의 일, 교회 일 하는 게 힘들고, 모든 게 다 부담됩니다. 예배 참석하는 것도 그렇고, 헌금 하는 것도 그렇고, 찬양하는 것, 기도하는 것, 다 재미도 없습니다.
아직도 그렇다면 스스로 진단하십시오. “난 신앙생활을 성령의 능력으로 해 온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 해 왔구나.” 그리고 그런 깨달음이 있다면 성령 충만함을 받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말씀을 읽고 들으십시오. 이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십시오.

성령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요한복음 16장 8-11절에,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의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하는 것이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 하십니다.
살인은 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인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 때문에 살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 돌아가는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설사 살인하지 아니했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살인은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이 죄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성령은 바로 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의롭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의로움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 죄인인데 어떻게 스스로 의롭게 할 수 있을까?

어떤 흑인 소녀가 백인 소녀들에게 놀림 당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수세미로 그 피부를 박박 밀었습니다. 피가 나지만 그 피부가 하얗게 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 됨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죄인이 의인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의인이 되는 겁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죄에 대해 용서함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용서는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승천하심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증거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죽으셨을 때, 사람들은 세상의 권력에 놀랐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는, 때로 병자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신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본디오 빌라도가 심판자인 줄 알았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도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용포를 입고 왕좌에 좌정하고는 백성들에게 연설했습니다. 백성들은 그 소리를 듣고 “신의 소리다.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헤롯이 심판자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죽었고, 당시의 권력을 자랑하던 로마제국도 멸망당했습니다. 성령은 바로 하나님께서 심판자이심을 증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죄에서 해방되게 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게 하셨으며, 끝내 심판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들을 가르치고, 깨닫게 하시고, 그래서 믿게 하신 이가 곧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들을 진리 가운데 즉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약속대로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행전 2장 4절,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말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입니까?

사도행전 2장 14절 이하의 베드로의 설교는, 요엘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성령을 주셨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메시아이시며, 그것은 다윗도 증거 하였다는 것입니다.
36절,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 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3장 12-26절, 솔로몬 행각에서의 베드로 설교는,
이스라엘 동포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빌라도는 그를 놓아주려 하였지만,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운 그를 거절하고 살인자를 놓아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15-16절,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증언하는 증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또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에 힘입어서 된 것이니, 예수로 말미암아 그 믿음이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성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분을 믿으면 구원과 생명을 얻습니다. 그것을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신 이가 성령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성령은 그러한 사실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하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난 예수 믿어”라고 말하면서도 전도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반쪽인 셈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으로 감동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사람은 “예수는 주님이시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혼자 하는 고백이지만, 동시에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8장 14절 이하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믿기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외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 입니다. 성령의 권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나라, 주님의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결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교회가 디기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오늘이 요한 웨슬리 회심 266주년 기념주일입니다.
1737년 12월 22일, 조지아 선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쓴 그의 일기입니다. “나는 인디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하지만 나를 회심시킬 자가 누구랴? 나는 쾌청한 여름철 신앙을 가지고 있다. 나는 말도 잘할 수 있다. 아니, 위험이 가까이 없는 동안에는 자신이 있다. 하지만 죽음이 나를 정면으로 노려보기만 하면 내 영혼은 쩔쩔매고 만다. 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두려움에서 건져 줄 것인가.”

분명, 그는 예수 믿었고, 그래서 목사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방황했습니다. 이런 방황의 나날을 보내던 그의 1738년 5월 24일 일기를 보면, “저녁에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은 채 올더스게이트 가(Aldersgate Street)에 있는 어느 회에 갔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9시 15분전쯤 되어서 그가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역사를 하신다고 설명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믿는다고 나는 느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씻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나는 악의적으로 나를 이용했거나 박해한 사람들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생전 처음 내 마음 속에 느낀 것을 거기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터놓고 간증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원수 같은  마귀는 넌지시 이렇게 속삭였다. “이것은 믿음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기쁨이 어디 있느냐?” 그 때에 나는 배웠다. 평화와 의에 개한 승리는 우리의 구원의 대장되시는 주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통 처음에 생기는 황홀한 기쁨 특히 심히 애통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기쁨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때로는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주지 않으시기도 한다는 것을 배웠다.

집에 돌아온 후에 나는 여러 가지 시험으로 몹시 괴로웠다. 그러나 큰 소리로 외쳤더니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 시험은 자꾸 되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을 들어 주님을 향하자 주께서는 “주의 거룩한 곳으로부터 나에게 도움을 보내주셨다.” 나는 여기서 이런 체험과 주로 전에 일관되었던 나의 신앙상태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싸웠다. 그렇다. 나는 율법 아래서 뿐만 아니라 은총 아래서 역시 있는 힘을 다하여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자주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때때로 승리하였다. 그러나 현재에서 늘 승리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 그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는 대단히 훌륭한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습니다. 생각도 깊은 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성경 벌레, 규칙쟁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그의 생활도 모범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식, 그의 깊은 생각, 그의 삶이 참된 가치를 갖게 된 것은 그의 영적체험이 있은 후부터였습니다.
마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그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을 때,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며 살 때, 그의 지식, 로마 시민권 등이 참된 가치를 발휘 하였듯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정말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삶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성령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증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성령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주님의 뜻에 내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십시오. 내 모든 죄를 회개하고 죄 용서 받으십시오.
일본의 유명한 기독교인 우찌무라 간조는, “성령은 그리스도인이 제일로 구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업의 성공, 가정의 평화, 교회의 부흥, 전도의 성공, 이것보다도 오직 성령을 제일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으로 충만 하십시오. 성령의 권능으로, 어디서나 담대하여 주님께서 하신 일 보다 더 큰일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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