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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을 회복해야 삽니다 (삼상 4: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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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황요한 목사 (평안의교회)


지난 11일부터 20일까지 우리 부천남지방 24개 교회 목회자 부부들이 소아시아 7교회 순례를 마치고 강건함으로 돌아왔습니다. 개척교회 목회자와 사모님들까지 지방내 교회들이 정성으로 후원하고 협력하셨기에 모두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성지순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분들마다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은혜롭고 고마울 데가 어디 있는냐며 부천남지방을 부러워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회심 266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1703년 영국 중부 에웹이라는 곳에서 사무엘 웨슬리와 수산나 여사의 15번째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많은 형제들과 넉넉지 못한 목회자의 가정에서 너무나도 어렵게 자랐지만, 철저한 어머니의 신앙교육의 덕분으로 그는 옥스포드 대학을 졸업하고 링컨칼리지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20대 초기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홀리크럽을 만들어 영성훈련에 몰두하였고, 이 멤버 가운데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화이트필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성공회 목사로 안수를 받은 뒤 부친의 교회에서 3년간 부목사로 재직하기도 했던 그는, 1735년 복음선교회의 후원으로 미국 조지아주의 선교사로 가 선교적비전을 실천하려고도 했었습니다.

선교사 시절 그는 특별히 당시 성행하던 노예무역과 음주를 강력히 금했는데, 이는 목화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남부에서는 수많은 노동인력이 필요한데, 당시로서는 손쉽게 얻을 수 있었던 노예들을 포기하라는 권면은 남부지역 정서와는 크게 다른 것이어서 많은 마찰을 갖게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한 여성을 사모하던 그로서는 결혼문제까지 원만히 해결되지 못하게 되자 결국 선교사로서의 길을 접고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웨슬리의 마음 속에는 늘 허전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자기와 가까이 지내는 피터 뵐러 목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설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그 말씀을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볼러목사는 웨슬리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중단하지 마시요. 당신에게 믿음을 통한 구원의 확신이 생길 때까지 믿음에 관하여 설교 하시오.’

사실 그의 권면은 웨슬리로 하여금 마지막 꺼져가는 등불만큼이나 위태롭던 영성을 회복시키는 전기가 되었습니다. 그 해 5월 24일은 수요일이었습니다. 교회에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마지 못해 저녁예배에 참석 했었노라고 당시의 상황을 자신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집회에서 회중가운데 한 사람이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던 중에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속함을 받았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받았기에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확신이 그에게 생긴 줄 믿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오순절 다락방 성령체험 사건 이후에 담대함과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 자신을 핍박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앞에서 "너희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선포할 수 있었고, 놀랍게도 말씀을 듣는사람들 중에 마음에 찔려 어찌할 바를 모르자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증거하여 그 날에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3,000명이나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말씀을 듣을 때 마음에 찔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찔린 심령이 회개의 길로, 은혜의 길로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분노의 길로 가거나 시험의 길로 가면 자기의 손해지요. 똑같이 복음을 전했는데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찔리기는 하지만 분노의 길로 가 결국 집사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웨슬리의 변화를 통해 가장 먼저 달라진 것은 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가 쓴 일기를 보면, "그동안 나를 미워하고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증오했었는데 이제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미워하는 사람 있지요? 이렇게 얘기하면 머릿 속에 쫙 지나갈 거예요. 어떻게 보면 미움의 대상이 있는 것이 정상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사탄의 유혹을 받아 시기와 미움의 늪에 빠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고나면 미움의 대상이 기도의 대상이요 축복의 대상으로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웨슬리는 또 달라졌습니다. 그 전에는 늘 설교가 윤리적이고, 교훈적인 설교였어요. 그런데 이 은혜를 받고 나서 첫 번째 그의 설교가 너무나 달라졌어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영국사회가 발칵 뒤집어 졌어요. 여러분들은 그 제목을 들으면 그 뭐가 대단하냐고 그러지만, 그 18세기에 당시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그 말씀도 선포도 선포려니와 그런 제목을 가지고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당시의 교회의 분위기는 우리가 모든 신앙에 있어서 구원의 부분들이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그 행위를 윤리적으로 강조하던 그런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웨슬리 자신도 그런 곳에서 훈련이 되고, 그런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회를 하면서 늘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거예요. 결국은 내가 더 이상 설교할 수 없다고, 설교를 포기해야 되겠다고 그렇게 고백할 정도까지 이르렀던 그가 성령의 충만함으로 마음이 뜨거워진 이 후에 이제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랬더니 영국국교회가 웨슬리를 환영하고, 점점 더 사람이 많아져서 앉을 자리가 없어지고, 그것을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웨슬리를 성공회 강단에 서지 못하게 했습니다. 결국 웨슬리는 공원으로, 공장터로 나갔습니다. 사거리로 나갔습니다. 나가서 설교를 했는데, 사람들이 구름떼와 같이 몰려들었어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감리교회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Methodist'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Methodist라고 하는 것은 '규칙적인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기도, 모임, 성경공부 등 영적인 생활들이 규모있고 반듯하기에 친구들이 붙여준 별칭이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이 사회가 왜 이렇게 혼란스럽습니까?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가 혼란스러운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지도자들이 규칙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규칙은 약속입니다. 여러분들 빨간불이 들어오면 건너지 않도록 한 것은 사회적 약속이예요. 그 사회적 약속,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운전하는 사람이나 보행하는 사람 중에 하나는 크게 상처를 받는 거예요. 정치는 정치의 규칙이 있어야 하고, 경제는 경제의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회적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매년 대통령만 새로 되면 그 전에 규칙을 지키지 않아서 생겼던 문제들 해결하느라고 2- 3년 보내잖아요.

그래서 온통 나라는 10년이 넘도록 그냥 정신이 없어요.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약속된 삶을 살아간다고 하면 우리는 과거에 얽매여서 설거지 하느라고 시간 다 보내는 일 없을 거예요.

오늘 우리 주님께서 사무엘상 4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은 그것입니다. 내용의 일반적인 의미는 엘리제사장의 몰락의 이야기입니다. 슬픈 이야기지요. 사십년동안이나 이스라엘의 제사장이요, 사사였던 엘리가정이 몰락하는 장면입니다. 엘리제사장도 죽고, 두 아들도 죽고, 며느리도 죽고, 법궤도 빼앗기고, 여기 17절에 보면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자가 와서 소식을 전하는데 이스라엘사람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했다. 전쟁에서 패했다는 말입니다. 백성 중에 큰 살육이 있었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희생됐다는 말입니다.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결과입니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것은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만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겼다고 하는 말이 5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 엘리 가정이 몰락한 원인은 전쟁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 엘리가정이 멸망한 이유는 전쟁에서 실패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실패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적인 몰락의 이유는 사람이 죽고, 법궤를 빼앗기고, 이런 것들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영적으로 그들이 몰락했기 때문이예요. 자신들이 변화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법궤만 전쟁터에 가져온다고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이 이기게 하실 거라는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 모릅니다.

마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읽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서, 머리 두통 치통, 생리통에 그 성경책에 베고 자면 날거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 이게 무슨 부끄러운 일들입니까?

여러분들의 삶은 하나님 앞에 변하지 않으면서 주일날 1부 예배 드리고 놀러가면 사고 나지 않을 거라는 그 생각, 얼마나 한심한 생각입니까? 1부 예배가 그래서 생긴 것입니까? 어떤 교회는 1부 예배가 7시에도 있어요. 어떤 교회는 1부 예배가 토요일날 저녁에도 있습니다. 왜? 주일날 놀러가야 하는데, 주일날 예배 드리면 거추장스러우니까 토요일날 일치감치 예배 드리고 떠나라는 거지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거예요. 뭘 열심히 일했는데요? 그러고 가면 사고 안 날거 같고, 그러고 가면 행복할 거 같아서 가는 그 예배, 그 예배가 예배 입니까? 그것은 이미 예배는 아니예요.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는 그 마음의 가짐, 우리가 그 엘리가정의 몰락과 이스라엘의 민족의 몰락을 보면서 우리는 분명한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전쟁에서의 실패는 군사의 수요가 적은 것도 아니요, 칼과 창의 수요가 적은 것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 성도의 모든 삶 속에서 세상의 삶으로 표현되는 전쟁, 학문도 전쟁이요, 사업도 전쟁이요, 사랑도 전쟁입니다. 우리가 이 전쟁에서 실패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을 보면 그것은 바로 외형적인 부분이 아니라 내면적인 문제가 실패의 원인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도다. 이제 소아시아 7교회를 제가 주일 저녁에 차례대로 자료를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만은, 여러분들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환경이 더 나아지면 신앙이 더 좋아질 거 같지만, 실제로 우리가 보는 것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자동차가 있으면 더 교회 자주 올 거 같은데 그렇지 않잖아요. 여러분의 집이 조금더 평수가 넓으면 속회 예배, 월례회, 기도회 더 자주 할 거 같은데 안 그렇잖아요.

그냥 장판에 구성지게 살 때는 속회, 월례회 와서 아이들이 요구르트 쏟고, 과자부스러기 떨어 뜨려도 그냥 빗자루로 한 번 쓸면 끝나는데, 맨션 아파트 입주한 후에는 장난감만 가지고 오면 기겁을 하는 거지요. 상처 날까봐, 낙서할 까봐 겁나지요, 더 행복해 졌나요? 우리의 환경이 좋아진 만큼 우리의 영적 생활이 더 나아졌나요? 아니잖아요. 놀랍게도 우리의 환경이 좋아진만큼 신앙이 정비례해야 할 텐데,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법궤만 가져가면 이길 거라는 이 추상적인 신앙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문제는 법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있었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제사장이 법궤를 가지고 가서 마음이 두근반 세근반입니다. 어떻게 됐을까? 그래서 엘리 제사장은 자기 의자에 앉아서 초조하게 전쟁의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앉았던 의자는 아무 의자나 앉은 것이 아니예요. 의자를 히브리어로 키세라고 하는데, 이 의자는 제사장이 앉는 의자입니다. 의자는 그의 직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의자입니다. 그 의자에 앉아있습니다. 98세나 되었다고 했어요.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다고 하였고, 비둔하였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서 사회적인 제도를 생각해 봅니다. 왜 은퇴 제도가 생겼을까? 보통 직장이 55세, 60세, 65세, 70세, 각 직장마다, 각 직종마다 은퇴의 연령이 있습니다. 사실 지금 사무엘상을 보면서 엘리를 보며 느끼는 것은 이미 나이가 998세나 되면서 비둔했고, 그리고 눈이 어두웠고, 이런 외형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이미 그는 영적인 리더쉽을 잃어버린 상태였어요. 어느 정도로, 국가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리더쉽 뿐만 아니라 자기 가정의 리더쉽도 이미 상실된 지 오래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아버지로써, 어머니로써의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도 나이가 많아서 부모로써,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는 입장에서의 권위가 아니라 신앙적인 믿음의 아버지로써, 믿음의 어머니로써의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까? 불행하게도 엘리제사장의 가정은 영적인 부모로써의 권위도 잃어버렸습니다. 엘리제사장이 실로의 성전 입구에 앉아서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립니다.

소식을 전하는 자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소식을 전합니다. 전쟁에 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당신의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법궤도 빼앗겼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18절에 보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할 때에 그는 의자 뒤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종말을 맞았습니까?

저는 사람이 죽는 것도 잘 죽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죽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어떤 계획들을 하고 계십니까? 내가 임종할 때는 자녀들에게 어떤 말을 남길 것인가를 준비하고 계십니까? 어떻게 어떤 분위기에서 임종할 것인가를 계획하고 계십니까? 어떤 찬송을 부를 것이며, 어떤 성경을 읽을 것이며, 어떤 말로 나의 자녀들에게 권면하고, 유언을 남길 것이라는 것을 계획하고 계시느냐는 말입니다. 앗 소리도 못하고, 그냥 불행한 임종을 맞아서는 안 됩니다.

엘리제사장은 한 마디도 못 하고, 법궤를 빼앗겼다는 말을 듣는 것과 동시에 생명이 떠났습니다. 그 소식을 들으면서 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진통이 왔습니다. 조산을 하게 된 거지요. 갑자기 아파서 해산을 했습니다. 이 여인도 아이를 낳고 나서 죽었어요. 그가 낳고 나서 한 일이 하나 있는데, 주변에서 해산을 돕던 여인들이 ‘아들을 낳았어요. 아들을 낳았다니까요.’라고 소리쳤지만, 그는 기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는데 아들인들 무엇이 기쁘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는데 내 인생에 무엇이 기쁨이 있을 수가 있으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기쁨은, 행복은 무엇입니까? 찬송의 고백처럼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주님의 기쁨일 때 행복인 줄 믿습니다. 주님의 영광이 여러분의 삶에서 나타날 때 여러분의 삶에 목적과 의미가 있는 줄 믿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서 떠나고, 우리 민족에게서 떠났다고 하면 그것보다 불행한 것이 없어요.

비느하스의 아내는 아들을 낳았지만,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자녀도 주님 안에 동행할 때 기쁨이지요? 여러분 자녀를 양육하시는 분들은 마음 뼛속까지 새기셔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주님과 동행할 때 기뻐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자녀는 기쁨일 수가 없어요. 아들이어도 기뻐할 수 없습니다. 좋은 대학 나오고, 돈 많이 벌면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삶, 성령께서 동행하시는 여호와이레에서 내 평생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셨으니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고 88세의 삶을 마감하고 하나님 앞에 부름받으면서 요한웨슬리 목사님은 그렇게 고백했어요. 그렇게 행복했던 순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느끼고 확인할 때 여러분의 행복이 임마누엘이고, 여러분의 자녀의 기쁨이 임마누엘이시고, 이 나라 이 민족이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할 때에 비로소 기쁨이요, 비로소 소망이요, 비로소 우리가 주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그러한 환경인 것을 기억하시고, 오늘 그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삶을 경주하는 평안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며 칭찬받는 자들을 초대교회 집사의 선정기준으로 삼으셨고, 책망할 것이 없고, 남편이 되면, 자녀를 단정케 신앙으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는 자들을 초대교회의 감독의 조건으로 삼았던 주님,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가정, 민족, 희망이 비전이 없음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아버지, 이제 다시금 돌이켜 말씀 속애 마음에 찔림이 있게 하시고, 돌이켜 회개하게 하시고, 자신에게서 가정에게서 이 나라 이 민족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언제나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삶의 공동체가 되기를 위해서 생명을 다하는 성도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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