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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안에서 멋지게 살아봅시다! (롬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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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영신교회)

우리는 아무리 세찬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모진 날씨 속에서도 더 높은 곳에는 청명한 하늘의 햇살이 눈부시게 이 땅을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간사도 매한가지입니다. 힘들고 어렵고 곤고한 일이 있더라도 높은 곳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더 신비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세상 귀한 것들은 다 높은 곳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높은 곳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큰 것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 앞에는 모든 혼돈과 흑암과 공허가 다 물러갈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경제가 어려워서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달프고 슬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땅에서 사람의 마음이 황폐한 것처럼 고달프고 슬픈 것은 없습니다. 지금 들판이 황폐해졌다, 산이 황폐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가장 황폐해졌습니다. 눈은 황폐하여 빛을 잃었습니다. 입은 황폐하여 미소를 잃었습니다. 가슴은 황폐하여 따뜻함을 잃었습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주변의 사람들의 가슴이 따뜻합니까? 안타까운 것은 제일 가까워야 할 사람들의 마음도 따뜻하지 않습니다. 손은 황폐했고 봉사를 잃어버렸습니다. 섬김을 잃어버렸습니다. 생활은 황폐하여 시와 때를 잃어버렸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신뢰와 애정과 대화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던 창조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눈에 빛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입에 미소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따뜻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손에 봉사와 섬김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그의 생활에 시와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애정과 신뢰와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삶에 지치고 피곤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내일에 대한 신선한 꿈을 가득 안으십시오. 그래서 황폐한 심령 속에 꿈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어디에 새 길이 있을까? 지금 모두가 길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안에는 분명히 인생의 새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인생에 더 좋은 길도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우리의 귀로 듣지 못하고, 미쳐 우리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한 하나님의 공개되지 않은 축복의 길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그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예비된 축복의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은 아이에게 "달리다굼!"라고 말씀하셨더니 죽은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황폐한 아이의 심령에 "달리다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더니 꿈을 안고 일어났습니다. 황폐한 산, 황폐한 벌판에도 하늘의 것만 내리면 새 생명이 약동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임하면 생명의 신비가 꿈틀거릴 것입니다. 마음의 황폐함도 성령의 단비만 내리면 살 길이 있습니다. 지금의 내 마음이 황폐해졌고, 그래서 썩어서 냄새가 난다고 할지라도 성령이 임하시면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 이 땅에, 지금 이곳에, 내 마음에 하늘의 단비만 내리면 살 길이 있습니다. 죽었던 아이가 소망을 안고 살아났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소망을 가득 안고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내 심령에 성령의 단비를 뿌려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성령의 단비여 지금 이곳에 임하시옵소서!"
산을 보십시오. 산은 높아도 귀하지만 산은 숲이 울창하기 때문에 더욱 귀합니다. 생명의 신비가 뒤엉켜져 있는 울창한 산의 숲 때문에 매료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산이지만 벌거벗은 민둥산은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산은 보기에도 섬뜩하지만 홍수와 산재로 그 산은 인간에게 반드시 복수를 하고 맙니다. 민둥산은 틀림없이 복수를 합니다. 황폐한 인간의 심산도 마찬가지입니다. 황폐한 인간의 심산은 민둥산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줍니다.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심산이 벌거벗은 민둥산이 되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산에 숲을 세우듯 우리의 심산에 하나님의 성령의 숲을 세워야 합니다. 은혜의 울창한 숲을 세워야 합니다. 성령의 푸른 숲을 가꾸어야 합니다. 생명의 신비한 숲이 우거져야 합니다. 숲에는 무수한 생명이 있습니다. 무수한 생명이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민둥산에는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황폐한 심령에 하나님의 성령의 숲을 이루십시오. 믿음의 숲을 이루십시오. 소망의 숲을 이루십시오. 사랑의 숲을 이루십시오. 여러분의 심령에 하늘의 숲이 우거지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어떤 민둥산의 심령으로 왔어도 하늘의 신령한 푸른 것들이 충만하게 우거지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했을 때에 중요한 것은 예수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닮아간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 시간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삶의 모습으로 철저하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그것까지 가르쳤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행복의 길입니다. 이것이 잘사는 길입니다. 이것이 가치 있게 사는 길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으로써 멋있게 살아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우리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닮아간다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이어야 합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병든 자를 고치고, 예수님처럼 서른 세살에 죽어야하고, 그래서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닮아간다고 했을 때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의 인간됨을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요약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으로써 멋지게 살아가는 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 여정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는 더욱더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만을 위해서 살다가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좋은 부모입니다. 남편이나 아내만을 위해서 살다가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부모님만을 위해서 살다가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효자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가 멋진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착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믿음의 사람으로써 멋진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후회 없는 멋진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여러분이 이 땅에서 멋진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여러분의 생각과 사고를 바꾸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우리 강한 자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즉 예수 믿는 사람과 강한 사람을 한 말씀으로 묶어 놓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왜 우리가 강한 자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강한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강해집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강하고 담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마음을 강하게 하십시오. 담대하십시오. 그렇다면 누가 강한 자입니까? 여기에서 강한 자는 권력자가 아닙니다. 정치가도 아닙니다. 돈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 정말로 강한 자는 인격적으로 성품적으로 강한 자입니다. 그러니까 생각과 사고가 건강한 자가 정말로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생각과 사고에서 강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는 이해에 있어서 강한 자가 되십시오. 내 마음이 넉넉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도 이런 환경도 저런 것도 다 넉넉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강한 사람입니다. 이해를 못하고 조그마한 일에 걸려서 넘어지고 오해가 되고 원수 맺고, 울고 짜고 절망하고. 이것은 약한 자가 할 일입니다. 흔히들 속되게 말할 때에 '밴댕이 속 같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약한 사람입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육체가 약하면 환경에 민감합니다. 그러니까 몸이 약해서 민감합니다. 그래서 음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강한 사람은 언제나 넉넉합니다. 놀랄 것도 없고,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도 사랑하고 못된 사람하고도 같이 지낼 수가 있습니다. 언제나 상대방을 깊이 이해합니다. 환경도 이해합니다. 이해하는 마음이 넉넉합니다. 이것이 정서적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해심이 넉넉한 멋진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생각과 사고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깨달은 바 진리를 자기 생활 속에서 구체화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들으면서 바로 "아, 그렇다. 이제부터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라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을 생활 속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 사람이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듣고 삶에 적응하고자 하는 소화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것을 못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진리대로, 신앙은 신앙대로, 행위는 행위대로, 성품은 성품대로 따로따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생각과 사고가 약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언제나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생각만큼이나 행동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민합니다. 그래서 좌절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들 가운데 경건의 모양만 있는, 그래서 진리는 진리대로 신앙은 신앙대로 행위는 행위대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없기를 축복합니다. 경건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한 마디를 배웠든, 두 마디를 배웠든 배우면 배우는 데로 자기 생활 속에서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면서 적응해 나갑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생각과 사고가 건강한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경건의 능력이 있는, 그래서 정서적으로 강한 사람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사람이 인생을 멋지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사고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실천 지구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입니다. 가만히 보면, 알기는 많이 아는데 도무지 행함이 없습니다. 사랑해야 될 줄을 알면서 사랑하지 못합니다. 용서해야 될 줄을 알면서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용서했다가도 비슷한 일이 생기면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실천 지구력이 없는 사람, 정서가 건강하지 못한 사람은 결단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곳에 갑니다.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 짓을 합니다. 생각으로는 이제부터는 술을 먹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몸으로는 술을 먹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2장 22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한다" 실천의지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휘청 휘청합니다. 생각과 사고가 약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언제나 불안합니다. 간혹 보면 목사인 제가 여러분을 볼 때에 불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닌데, 저렇게 살면 안 되는데. 걱정과 염려로 가득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들이 보기에 불안한 그런 삶을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어떠한 복도 주시기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수고하고 고생해도 헛되고 헛될 뿐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의지력이 강한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강한 사람은 다릅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한번 시작했다 하면 끝을 봅니다. 생각과 사고가 강한 사람은 두 가지를 분명히 합니다. 하나는 그곳으로부터의 단절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것으로부터의 단절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가지 말아야 할 그곳에는 더 이상 가지 않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그것을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생각으로는 가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간다면 그는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생각으로는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 짓을 하고 있다면 그는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의지력이 약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자신도 피곤하고 힘들지만 가족과 주변 사람들도 힘들고 피곤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에서만 머물지 마십시오. 생각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곳과 그것으로부터의 단절을 분명히 하십시오. 오늘 저는 우리 모두가 실천 의지가 분명하고 강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모름지기 생각과 사고가 분명하고 건강한 사람이 인생 여정에서도 멋지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 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이 땅에서 멋진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웃의 짐을 함께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1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여기에서 약점이라는 말은 양심의 주저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의지가 약해서 일으키게 되는 잘못을 말합니다. 이것을 소위 무기력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무기력한 사람을 우리 강한 자가 담당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해도 못하고 구체화도 못하고 실천도 못하고 꾸준하게 끌고 나가지도 못하는 약한 자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담당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내가 대신 하는 것입니다. 약한 자의 약점을 내가 담당한다. 여기에서 담당하다는 말은 짐을 진다는 뜻입니다. 그의 짐을 자발적으로 내가 대신 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도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내가 맞을 것을 그가 대신 맞습니다. 내가 받을 비방을 그가 받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고난을 그가 대신 당합니다. 그 성품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담당하는 것입니다. 책임을 대신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연약한 자의 짐을 내가 대신 지고 그를 세워 가는 삶, 이런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가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의사로 분주하게 다니는 부인이 어느 날 보니까 자기 남편이 밖으로 돌다가 에이즈 병에 걸려 가지고 왔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그는 남편을 앞에 놓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의사로서 바삐 돌아다니느라고 아내 구실을 못해서 당신이 밖으로 돌다가 이렇게 됐으니 이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이대로 죽으면 당신을 죽인 내가 어떻게 평안하게 살수 있겠느냐고 여기서 둘 다 같이 에이즈 걸려서 죽는 것이 나를 위해서도 좋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0년 동안 별거하던 사람이 다시 만났습니다. 다시 부부생활을 합니다. 에이즈 환자하고 죽기를 결심하고 말입니다. 이 뜨거운 사랑으로 인해서 두 사람이 다 건강해 졌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 책임입니까? 모든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보면 나는 책임을 다했다. 밥을 안 줬냐? 옷을 안 줬냐? 너 할 일이나 똑바로 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됩니다. 남편이 밖으로 도는 것은 내 책임입니다. 아내가 잘못하는 것은 내 책임입니다. 내가 담당을 하는 겁니다. 저주를 받아도 내가 받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그가 무기력한 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내 짐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이 됩니다. 사회의 평화도 여기에서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는 내 책임까지 남에게 돌리려고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그가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약점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자기 책임으로 돌리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성품 자체가 약한 자의 약점을 비판하지 않고 내가 대신 자발적으로 담당하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본문에 보니까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 자기 중심적인 마음을 한 번 딱 떼어버리면 어떨까요? 이제까지는 나 중심으로 살았으니까, 이제부터는 나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것 없이 살아보겠다고 한번 확 뒤집어 보시면 어떨까요? 분명히 새로운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살아가는 순간 순간이 행복할 것입니다. 이후의 그의 삶은 참으로 보람있고 멋진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일에서 나를 잊어버리십시오. 내 명예, 내 지위, 내 뜻, 내 고집을 다 잊어버리십시오. 나를 기쁘게 하는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면 그 순간 여러분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기쁨과 행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멋진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선을 이루고 덕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본문 2절의 말씀입니다. 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이웃을 기쁘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일에서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을 편하게 하고 남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바로 행복의 근본입니다.

수학분야에 있어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졌던 사람 기꾸찌 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기꾸찌 교수가 옥스퍼드 대학에 다닐 때 수학의 천재가 돼서 항상 1등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국 백인들이 기분이 나빴습니다. 동양 사람한테 영국 사람이 진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브라운이라는 영국 학생이 항상 2등을 합니다. 이 기꾸찌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이런 경쟁관계에 있었는데 마침 기꾸찌가 독감에 걸려서 몇 주 동안 학교에 못나왔습니다. 이것을 알고 "옳지, 이번 학기는 브라운이 1등할 것이다. 백인이 1등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꾸찌가 또 1등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브라운이 매일같이 강의들은 노트를 가지고 가서 기꾸찌 친구에게 전달강의를 했다는 겁니다. 왜요? 당신이 감기로 인해서 1등에서 내려앉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는 겁니다. 얼마나 깨끗한 마음입니까? 남을 기쁘게 하고 그래서 밀어주고, 이해해주고,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그것이 남을 기쁘게 하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마음이야말로 진정 내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일 것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이웃을 기쁘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어야 합니다. 덕을 세우는 삶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세운다는 말은 가족이 거하는 집을 세운다, 공동체가 거하는 교회를 세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덕을 이루는 삶이 집을 세우고 교회를 세운다는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덕스러운 행동이 공동체를 든든하게 세워갑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덕스럽지 못한 행동이 공동체를 위태롭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 안에서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 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든든하게 세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모름지기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성품을 하나 씩 하나 씩 본받아 가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정말로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뜨겁게 사랑하면 닮게 되어 있습니다. 아내건 남편이건 누구든 간에 열렬히 사랑하면 알게 모르게 그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앙망하고 사랑하고 높이고 존경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갑니다. 본받아서 그의 길을 따라 우리도 행복하고, 그의 길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주 안에서 참으로 멋지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안에 완전히 미쳐보십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몸부림쳐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이 훨씬 행복해질 것입니다. 훨씬 기뻐질 것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의 본질에 더 가까우면, 항상 모든 삶의 분야에서 더 많은 기쁨과 행복과 평안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대저 그 마음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힘은 위대합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마음에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에 결단을 하셨다면 이제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것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시간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모두가 주 안에서 멋진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훗날 주 앞에 섰을 때에 지나온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참으로 멋진 인생 여정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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