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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도 생명도 자라가야 한다 (고전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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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서정호 목사 (영암교회)

미숙한 사람의 모습

다섯 살짜리 아이와 일곱 살짜리 아이가 어머니 생일에 선물을 사는데, 7살짜리 아이는 그래도 생각이 있어서 루즈를 사는데 5살짜리 아이는 장난감을 삽니다. 자기가 좋아하니까 엄마도 좋아할 줄 압니다. 이것이 미숙입니다. 약한 것과 미숙한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언제까지 미숙아로 남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다 자라가야 합니다. 자라지 못함은 육적이건 영적이건 기형적인 모습입니다. 언제나 우유와 젖을 먹고 살수는 없는 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그들이 자라가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대하는데 있어 밥으로 대하지 못하고 젖으로 대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서 그들이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고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이 성장하여 마땅히 밥을 먹고 성장을 해야 하지만, 그들의 수준이 밥을 먹을 수준이 되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기고 있습니다.

자라가지 못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불행이지만, 지켜보고 있는 부모의 입장에서도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햇빛을 보지 못하고 늘 그늘에서 자라 가는 나무는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여 죽어갑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분명 죽습니다. 자라가지 못함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뿐 아니라, 나의 영적 믿음과 생명도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얕은 개울가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깊은 영적 바다에서 내가 헤엄치기를 주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깊은 심연의 바다에는 지금 내가 알지 못하는 영적인 보화들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어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말할 수가 있을까요? 자라고 성숙해져 어른이 되면 어린아이일 때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듯이 영적인 세계에도 분명 어린아이의 수준에서 알지 못하는 세계가 존재할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다 자라갑니다. 나 자신은 오늘 성장하고 있는지, 자라가고 있는 지 한번 생각해 봅니다. 생명의 씨앗을 섭취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영적 유아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육신에 속한 사람”(살키노스)이라고 책망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여 새롭게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자들이지만 계속해서 성장하기를 멈춘 신앙의 유아들이었습니다. 신앙의 초기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에 대해서는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을“육신에 속한 사람”이라고 판단하게 된 근거는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교회 안에서 생긴 성도들의 시기와 분쟁 때문이었습니다. 즉, 자신들에게 복음을 직접 전했거나, 세례를 직접 주었거나, 인간적으로 더 끌리는 복음의 일꾼들에 따라 분파를 나누어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영적으로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자들이라고 책망합니다.

내 신앙의 주인

고린도에 복음을 전했던 바울과 아볼로는 어떠한 자들입니까?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 또 그 외의 복음전도자들을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해 택하신 일꾼이요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이들의 일하는 시기나 사역의 강조점에 다소간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이들은 모두 복음의 유일한 초점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같은 목적으로 부름 받아 함께 일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인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은사와 부르심에 따라 그 사명을 감당한 대로 하나님의 인정과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나 복음을 받는 자들은 우리 각자가 동일한 하나님의 소유임을 기억하며, 같은 마음을 품어 복음 안에서 같은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가 되어 나아가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영적 성숙 

1960년대 유명한 복음주의자이며 교회의 선지자적인 역할을 감당한 토저 목사는 오늘날의 교회에 세 가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믿는 자가 성장하지 않고 항상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으며 다만 살만 찌는 것 

둘째는, 믿는 자가 교회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하고 오직 참관만 하는 것 

셋째는, 믿는 자가 서로 일치되지 않고 분열과 다툼만 일삼는 것. 

토저 목사는 이것을 오늘날 교회의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하나님을 알 때'만이 가능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나아갈 방향을 알아야 하며, 나아가야 할 때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고자 하시는 계획을 알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품을 줄 알고, 더 많은 사람들을 세워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성숙이며 영적 성장의 기반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성장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내 영적 수준은 성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영적 갓난아이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성장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지금껏 해 오던 세상의 방식을 벗어나 하나님의 방식을 따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 훈련은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할 것입니다. 성장의 기쁨, 이것은 어린아이로서는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동역해야 할 대상 : 육신에 속한 자

육신에 속한 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로 밥을 먹지 못하고 둘째로 시기와 분쟁이 있습니다. 밥을 먹지 못한다는 것은 말씀의 깊은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아직도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며 젖을 먹기에만 만족합니다. 더 깊고 오묘한 말씀을 맛보지 못합니다. 또한 이들에게는 시기와 분쟁이 있는데 왜냐하면 사람을 따라 행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자기중심적이며 사람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육신에 속한 자입니다. 아직도 사람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달라지며 화평하기보다 불평이 먼저 앞서는데 더욱 성숙하고 신령한 성도로 자라야 하며 성령께서 깨우쳐주시는 말씀을 맛볼 때에 비로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육신에 속한 교인들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진행하십니다. 하나님은 많은 이들을 사역자로 쓰십니다. 은사와 성격과 사명에 따라서 쓰시며 그들에 따라 상급도 다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사람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일할 때 나의 행위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농부가 많은 고생과 노동을 통해서 가을에 수확을 하지만, 먼저 햇빛을 주어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하듯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모든 사역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사람을 세우고 자라게 하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때 분쟁과 시기와 다툼이 없어지고 서로 화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동역자들

사도 바울은 동역자의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역을 하려면 마음이 맞아야 하고 서로를 배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동역하기를 원하시며, 다른 성도들과도 동역하기를 원하십니다. 육신에 속한 자를 동역자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속하여 아직 미숙하고 자주 싸우지만 그들도 또한 하나님의 열매가 열려질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동역해야 할 이유입니다.

고린도교회를 세운 이는 바울도, 아볼로도 아니고 하나님이신데 이 하나님이 높임을 받지 못할 때 그 안에서 분열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높임을 받지 못할 때 어느덧 인간들에게 익숙한 경쟁이 싹트고 그로 인해서 분열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경쟁심으로 분열된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사실 여기서 나오는 하나님의 성전은 고린도 교인 개개인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교인 전체가 하나님의 성전임을 뜻합니다. 고린도 교인 전체가 하나님의 성전인데 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 높이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경쟁사회 안에 있었던 고린도 교회는 분열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미 경쟁하려하는 순간 참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아닌 꾸며낸 나의 모습이 되어집니다. 이미 속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라

사도 베드로는 고린도 전서3장7절에서 구원받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곧 성장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두 가지를 함께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는 왜 성장을 해야 하는가? 두 번째로는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장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까요? 베드로 후서 3장 18절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장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는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첫 번째는 도의 초보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바꿔 얘기하면 구원받은 것 하나로 만족하고 거기서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테 나아갈지니라"(히 6:1-2)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초보에 머물러 있으면서 구원받은 하나만 가지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그것만 가지고 기뻐하려고 하지 말고 성숙하라고 하십니다.

구원은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구원받았으면 됐지" 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  만족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라기 위해서는 이에 도의 초보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고린 도전서3장7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사람이 씨를 뿌리고 물을 주었다고 그것이 자라는 것 아닙니다. 화분에 꽃씨 하나 심었어요. 열심히 물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랍니까? 하나님께서 허락 안 하면 자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장도 또한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심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뢰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본질적으로 성장을 방해하는 원인들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본성이 우리의 성장을 가로막습니다. 자기만족과 자기 기쁨만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 성장을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이 성장을 방해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도우시는 분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무능함, 힘이 없음을 아시고 도와주십니다.


건천과 같은 신자와 옹달샘 신자

아프리카에는 건천이 많다고 합니다. 건천은 큰 강 또는 개천인데, 비가 오는 우기에는 강물처럼 물이 창일하다가도 우기가 끝나 비가 그치면 금방 흐르던 물은 마르고 강은 바닥을 드러내어 모양만 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건천의 존재 이유는 우기에 의존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주변에서 건천과 같은 신자들이 많습니다. 위로부터 은혜가 임하면(우기) 어쩔 줄 몰라 합니다. 헌신하기도 하고, 원수를 사랑하기도 하고, 물질을 드리기도 하고, 아멘도 크게 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섬기기도 하고, 눈물로 찬송하기도 하고, 교회서 살기도 하고,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가슴 뭉클해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평생을 선교사로 헌신한다고 베드로의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은혜의 우기가 끝나면, 곧 심령의 바닥(본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면, 큰물로 가라앉았던 강바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감추어 졌던 육의 본성과 애굽의 근성이 송두리째 드러납니다. 성질이 올라오고, 짜증이 나고, 원수를 맺고, 이웃을 미워하고, 조급해지며, 마음은 좁쌀처럼 오그라듭니다. 예배가 짐이 되고, 헌금이 아깝고, 헌신이 유치하게 느껴지게 되고, 걱정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또 비가 내리면, 다시 물이 흐르지만, 비가 그치면 언제나 바닥을 드러냅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끝없이 건천이 아니라고 정당화 시키며 자신을 위로하지만, 어쩔 수 없는 바닥은, 신앙생활을 무미건조하게 만들며 타성과 위선의 십자가를 지게 합니다. 분명, 물이 흐르던 골짜기의 흔적은 있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흔적 눈물로 기도하며 손들어 찬송하던 흔적 가슴을 설레이며 말씀에 춤을 추던 흔적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했던 흔적도, 낮은 마음으로 섬겼던 흔적도, 아까운줄 모르고 나누었던 흔적도, 큰 골짜기를 이루지만 골짜기뿐, 그곳에 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습니다.

그 시절을 그리워 하지만 한번 메마른 건천은 다시 회복되지 않습니다. 막연히 우기만 기다릴 뿐입니다. 하루는 건천 바닥을 드러내고, 하루는 생수신앙의 흉내로 가슴앓이 합니다. 건천은 땅인지 강인지 비가 오지 않으면 구분이 어려운 곳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건천이 되면 그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인지? 안 믿는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혹, 여러분의 영혼이 쩍쩍 갈라지는 건천의 바닥처럼 건천심령은 아닙니까? 교회 다녀와도, 예배를 드려도, 기도를 해도, 밤새워 주의 일에 힘을 써도 여전히 심령이 메마르고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건천 신앙의 반대는 옹달샘 신앙입니다. 옹달샘은 화려하지도 큰 웅덩이도 아니지만 끝없이 솟아오릅니다. 건천의 존재이유가 외부에 있다면 옹달샘의 존재이유는 내면에 있는 것입니다.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밖에서 흘러들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충만함의 근거가 우기에 의존된 것이 아니라 내면에 존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주님이 생수이십니다. 그 주님과 끝없이 교제하며 관계를 유지함으로 속에서 솟아오르는 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닌 것은 곧 마르고 닳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곧 바닥을 드러내고 말 것입니다. 오직 생수의 근원되시는 주님만이 마셔도 먹어도 목마르지 않을 생수이십니다.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감옥에서 독방에서, 오지에서, 교회도 없이, 신앙서적도 없이, 부흥회도 없이 목회자도 없이 기도원도 없이 홀로 충만함을 주체할 수 없어 밤이면 밤마다, 솟아나는 기쁨과 환희의 샘을 경험했습니다. 그분들은 하나같이 외부의 우기를 의존한 것이 아니라, 내면에 계신 주님과 사귐으로 옹달샘 같은 생수를 마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상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주님이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는 목마르지 않으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사실은 충만의 흔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 충만함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용어를 사용한다고, 영적인 지식이 뛰어나다고 영적인 사람이 아니며, 영적인 것을 사모하고 좋아한다고 영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면에 솟아오르는 옹달샘의 존재 유무입니다. 건천 신앙인도 열심도 있고, 영적인 지식도 많고, 영적인 용어도 사용합니다. 간첩이 서울말을 사용한다고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뿌리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새 중에 자고새라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다른 새들이 알을 품으면 따라서 알을 품는 시늉을 하는 새입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 이런 자고새 성도가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영적이지 않는데, 거룩하지 않는데, 충만하지 않는데, 주님을 품은 듯 모양만 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고새가 날아가 버리면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기도 후에, 예배 후에, 말씀 묵상 후에, 헌신 후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아 기진해 하며, 허무해 하는 성도들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취미삼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념도, 아닙니다. 지식은, 더 더욱 아닙니다. 체험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풍성함이며, 실재입니다. 은혜가 되어야 기도가 되고, 은혜가 임해야 아멘이 나오고, 은혜가 뜨거워져야 찬송을 크게 부르고 한다면 당신은 건천 신앙인일 확률이 아주 높은 것입니다.

그러지만, 상황이 최악이며, 사방이 가뭄인데도, 어디서인지 솟아오르는 생수를 경험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옹달샘 신앙입니다. 옹달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전심으로 간구하십시오. 마음으로 간청하십시오. 당신은 비오기를 기다리는 우기형 성도입니까? 아니면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옹달샘 신자입니까? 여러분은 자고새입니까? 아니면, 실제로 주님을 품고 사느라고 힘겨운 참새입니까? 지금은 건천신앙으로는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승리는 겨우, 근근이 하는 승리가 아닙니다. 넉넉하게 충분하게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건천신앙에서 생수신앙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만사를 중단하고서라도 이 일에 목숨을 걸어야만 합니다.

진짜 은혜는,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때문에"의 은혜가 아니라, "찌라도"의 은혜가 진짜 은혜입니다. 들어오는 은혜와 솟아나는 은혜는, 우리를 자고새와 참새로 구분하게 될 것입니다.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은혜의 힘으로 최악의 상황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가뭄 같은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즐거움으로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겨우, 겨우 하는 일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집중해서 사명으로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주변의 소리보다, 주님의 내성이 더 크게 들리며 주변의 외부의 환경보다, 솟아오르는 내면의 은혜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옹달샘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살아있는 한 자라가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살아 있다면 매일 매일 자라가야 합니다. 매일 젖만 먹는 어린아이가 아닌 밥도 먹고 딱딱한 것도 능히 소화 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직은 육신을 입고 살지만 육신에 속한자로 육신에게 져서 육신을 따라 살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어느 사람에게 속한 자가 아니니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칭찬을 듣기 위해, 내가 영광을 얻기 위해 애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혹 내가 어떤 일에 대해 심기도하고 물도 준다고 할지라도 더 잘나거나 특별할 수 없고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뿐 인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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