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와 보라 (요 1:35-42)

  • 잡초 잡초
  • 531
  • 0

첨부 1


- 설교자 : 이용호 목사 (영천교회)

  저는 종종 교인들 가정에 초정을 받아서 심방을 가고, 식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또 가정이 아니더라도 식당에서 교인들에게 대접을 받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요즘은 초청문화시대입니다. 우리가 손님을 모시려고 하면 음식을 장만하고, 집안청소를 하고, 어떤 집에는 그릇도 새것으로 사서 준비를 합니다. 준비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음식을 장만하고 환경을 깨끗이 하는 준비도 좋지만, 제가 경험한 것은 손님에게 가장 보람이 있고 의미가 있는 준비는 주인과 손님이 서로 의미 있는 대화를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제가 교인들 집에 갔다 오면 두 가지 감정을 느낍니다. ‘내가 그 집에 뭐하러 갔나?’ ‘밥 한 끼 먹으러 갔나?’ 주인하고 마음에 있는 대화를 한마디도 못하고 오는 경우입니다. 이처럼 허전한 심방이 있는가 하면 평소에 못 나누던 뜻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오는 심방도 있습니다. 그래서 구역예배를 드리든지, 입주감사예배를 드리든지, 이사예배를 드리든지, 어떻게 하든 교인들을 초청해서 예배를 드릴 때는 음식에 너무 신경을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것이나 장만해서 아무 것이나 먹어도 괜찮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은혜를 받는 일에, 축복을 받는 일에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은 제쳐 놓고 외형상으로만 손님을 대접하는 형식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은혜받는 일에 관심을 집중하라

  예수님께서 한 번은 베다니 나사로 집에 초청을 받아갔습니다. 마르다는 음식을 장만한다고 분주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무릎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언니 되는 마르다가 예수님께 와서 동생 마리아더러 내가 하는 일을 좀 도와주도록 당부를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마르다 편을 들지 않고 마리아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마르다야 너는 지금 많은 일로 분주하구나. 그러나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했다. 마리아가 지금 여기 앉아서 말씀 듣는 이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고 손님을 맞이할 때는 그 예배가 얼마나 은혜로운가, 얼마나 축복된 예배인가를 준비해야 합니다. 마르다 모형이 가끔 우리들도 범하기 쉬운 실수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주인이 자꾸 자리를 떠서 부엌으로 간다든지 하면 안 됩니다. 주전자 물도 예배 마치고 끓여도 됩니다. 예배 시작할 때 주전자를 얹어 놓고, 예배 시작할 때 밥을 앉혀 놓고는 이 압력 밥솥이 예배 중에 돌아갑니다. 이것은 곤란합니다. 미리 하시든, 하고 나서 해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또 은혜를 진정으로 사모하거든 전화코드를 빼 놓으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는 그렇다 해도 예배 마치고 나서도 주인과 손님은 함께 식사를 나누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주인은 마냥 일만 하고 객들끼리만 식사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손님과 주인이 대화를 하려면 차라리 외식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같이 앉아서 끝까지 식사하고 대화를 나누면 됩니다. 집에 모시는 성의는 알겠는데 주인은 밥상에 앉지도 않고 하는 것은 심방으로서는 아쉽습니다. 손님을 모실 때는 무슨 음식으로 대접할까는 2차로 생각하시고 제일 먼저 ‘오늘 내가 이 손님을 모시고 무슨 대화를 할까?’하는 대화를 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무슨 앨범을 보여줄까?’ 앨범을 보여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르다도 예수님 앞에 점수를 잃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마르다는 부엌에서 혼자 바쁜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청시범과 안드레의 실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을 초청하는 일들이 더러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께 호기심을 가지고 갔습니다. 세례요한이 복음을 전하는 주님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주님은 그들의 나아옴을 보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제자들이 말하기를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까?” 이것은 아주 현대적인 질문입니다. 우리도 사람들 만나서 인사할 때 “어디 사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요즘은 대화중에 묻지도 않았는데 “내가 한 달 전에 큰 집으로 이사를 했다”고 큰집에 사는 것을 은연히 자랑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랍비여 어디 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와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시는 거처로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이 사시는 거처는 동굴입니다. 주님은 거처가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사시는 집은 볼품이 없는 집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와 보라”고 하신 것은 그 거처를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나를 보라” 즉 예수님 자신을 주목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와 보라”는 말은 내게로 와서 나를 만나보라는 것입니다. 그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안드레입니다. 안드레가 예수님께 가서 예수를 만나보니 그가 바로 메시야였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 안드레는 자기 형제 시몬 베드로를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가자”하고 베드로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와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빌립도 친구 나다나엘을 보고 “와 보라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하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와 보라” 하고 기어코 친구 나다나엘을 예수께로 끌고 왔습니다.

  “와 보라”는 것은 예수께서 사람을 초청하는 예수님의 전도의 첫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교회에 와 보라” “예배에 와 보라” 이 말은 예배드리는 광경을 보라. 목사님을 보라. 우리 교회 인테리어를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로 오라는 말은 교회를 보라는 뜻이 아니고 여기 와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말씀을 듣는 중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보라. 그래서 교회로 오라. 예배에 오라는 초청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오는 사람이 있고, 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과 누가복음 14장에 왕이 아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고는 사람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거절하고 오지 않습니다. 거절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입니다. 한 사람은 내가 밭을 샀기 때문에 일하러 가야한다, 또 한 사람은 장사해야 한다, 또 한 사람은 장가들었기 때문에 못 간다고 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왕의 초청 자체를 멸시합니다. 일치하게 사양합니다. 그런데 아주 고약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초청하는 종들을 때리고 구박했습니다. 왜 심부름 하는 종들을 때립니까?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이 분노해서 군대를 보내어 그 동네를 진멸했습니다. 그 임금이 얼마나 악합니까? 초청에 응하지 않는다고 군대를 보내다니 그런 임금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복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5절에 “저를 믿는 자를 영생을 얻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3장 18절에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저희가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설명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영생에 이르지만 끝까지 잔치에 오는 것을 거부하는 자는 지옥의 형벌을 받으리라는 멸망을 예표하는 것이 왕이 군대를 보내어 동네를 진멸했다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강권성 있는 전도가 마음을 움직인다

  예수 그리스도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이 “와 보라”고 하신 이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전도의 방법과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누가복음 14장 23절에는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강권하여’는 말은 강력히 권유한다는 뜻이지만 헬라어의 의미를 가지고 풀이하면 “기어코 설득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설득당할 때까지 강권하는 것입니다. 적당하게 강권이 아니고 기어코 설득당해서 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와 보라”고 할 때 그냥 부드러운 표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안 오면 안 될 정도로 기어코 설득하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전도를 말할 때 이렇게 강한 용어를 사용하시는가? 예수님이 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길거리에 나가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기어코 설득하여 데리고 와서 내 집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전도에는 정석이 없습니다. 전도 방법, 이론이라는 것은 사실은 정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을 안다고 해서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의 정석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와 보라”고 강권하는 것이 전도의 정석입니다. 우리가 전도에 있어서 결정적인 약점은 강권성이 없습니다. 기어코 설득하는 강권성이 없습니다. 강권성이 있는 전도가 전도의 정석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 성명, 주민등록번호 등 신상조사를 해서 구해줍니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은 머리채를 잡아 무조건 끌어내야 합니다. 거기에 신상파악이 필요합니까? 평소에는 머리채를 잡아채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실례입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질 때는 머리채가 아니라 어디를 잡고 건져도 건져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강권의 뜻입니다.

  전도는 무슨 준비하고 격식 갖추는 것이 아닙니다. 강권성입니다. 이 강권성을 설명하는 전도이론에 보니 장소를 무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장소를 무척 따집니다. ‘집에 가서, 사무실 찾아가서 해야지’가 아닙니다. 장소를 무시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는 그 자리가 전도할 장소입니다. 시간도 무시해야 합니다. 그 사람과 만나지는 그 시간이 전도할 시간입니다. 방법을 무시하라는 것입니다. “와 보라”는 방법이 정석입니다. 대상을 무시하라는 것입니다. 대상을 가려서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나지는 그 대상, 내가 특정한 대상을 선별해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기 때문에, 가족이기 때문에, 친구이기 때문에 내가 전도할 대상을 자연스럽게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는 전도이론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전도에 관해서 메시지를 듣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영혼을 향하여 강권성을 가지고 “와 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강권성을 가지고 “와 보라”고 할 때 상대방의 영혼이 움직여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빌립의 전도입니다. 나다나엘이 콧방귀치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기어코 끌고 왔습니다. 베드로라는 사람도 고집이 센 사람인데 안드레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확신에 찬 말로 “데리고 오니”라고 했습니다. 강권성입니다.
  달리는 전동차에 뛰어드는 사람, 전동차가 오는데 거기 뛰어 들어 자살하려는 사람은 다리를 걷어차서 넘어뜨려 못 뛰어 들도록 말려야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누군가?’ 하는 신상파악이 아닙니다. 발로 걷어차서 넘어져서 못 뛰어 들도록 해야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복음의 강권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 힘써야 할 예배생활

  2003년도에 한국의 개신교인들이 주일 공예배, 즉 주일오전, 주일오후, 수요기도회를 말합니다. 이것은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의무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 예배생활을 한 주에 한 번하는 사람이 40.5%입니다. 두 번 드리는 사람이 31%, 월 1회, 2회 드리는 사람은 9.1%, 1년에 한두 번 나오는 사람도 2.8%이고, 재적교인 중에 아예 교회와 발을 끊고 사는 통계도 11.7%로 나왔습니다. 저는 이것이 큰 위기라고 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와 보라”고 강권해야 하지만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이제는 “가보자” 예배에 가자는 열정을 가지고 강권성을 발휘해야 될 줄 압니다. 여러분들의 예배생활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공예배 3번을 비롯해서 정기기도회가 새벽기도 6번, 금요기도 1번해서 10번 있습니다. 정기예배가 10번 있습니다. 10번 가운데 한 번만 교회에 오는 성도가 40.5%라는 통계가 우리 교회에도 적용되고 있는 통계입니다. 한국교회에 적용되고 있는 평균치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기존교인들의 예배생활이 부실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은혜 받는 일에 너무 관심이 없습니다. 왜 우리는 예수께 나와야 하는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온갖 문제들은 그 근본이 죄 문제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죄가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죽지 않는 사람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과 악을 구별하는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범죄 했습니다. 범죄 함으로 죽음이 왔고, 고통이 왔고, 질병이 왔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타락한 인간을 불쌍히 여겨서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예수를 믿는 자는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의 길에, 믿지 않는 자는 멸망의 길로 가는 이 복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예배의 회복

  오늘 우리 사회는 예수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예수 없는 문화, 예수 없는 물질, 예수 없는 세상, 예수님을 등지고, 제외하고, 예수 없는 거기에 행복이 있는 줄로 착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정답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강권하여 그 분에게 오도록 해야 합니다. 불신영혼을 예수께 와 보라고 강권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부지런히 예수께 나아와서 그 분에게 은혜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다움으로 늘 무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국교회의 공예배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예배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오후예배가 청년들, 대학생들 따로 모이는 것까지 포함해도 겨우 50%입니다. 한국교회의 예배가 무너지는 이것이 또 하나의 위기입니다.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이미 믿는 우리들이 공예배를 회복하는 강권성이 발동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내 자신에게 강권성을 발동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예배를 포기하고, 양보하고, 져버립니다. 예배 때문에 육신의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것 때문에, 그것도 사소한 것 때문에 예배를 쉽게 포기하는 모습이 점점 늘어납니다.

  우리 세상을 보면 예수 없는 곳에 행복이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것입니다. 공식적인 정부 통계입니다. 2003년 1년 동안 우리나라의 결혼한 건수가 306,600건입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13년 전 1990년도에 결혼한 건수가 405,468건입니다. 근간에 가장 결혼을 많이 한 해가 1990년도입니다. 1990년도 전후로 해서 웨딩산업이 굉장히 발전했습니다. 지금은 웨딩산업이 주춤합니다. 13년이 지난 작년에 10만 쌍의 결혼이 줄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사회의 중대한 위기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결혼할 자녀수도 줄었다는 것이고,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전보다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무혼, 불혼, 불임 이런 풍조가 우리 사회에 자꾸 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우려하는 것은 1987년도에는 373,000쌍이 결혼했는데 이혼은 41,000명이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3.5배나 이혼이 늘었습니다. 결혼하는 비율은 10만쌍이 줄었는데 이혼은 3.5배로 늘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위기입니다.

  이혼을 분석해 보면 이전에는 배우자의 불륜 때문에 이혼하는 사례가 가장 많았는데 그것은 요즘 8.6%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제는 배우자의 불륜쯤은 한두 건은 참아 주는 것이 예사로 생각하는 풍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이혼율이 높은 조건은 44.7%가 성격차이입니다. 14.4%가 가족간의 불화입니다. 부부불화가 아니라 가족끼리, 시부모, 시누이하고 불화입니다.

  전문가는 이렇게 우려합니다. 44.7%가 성격차이 때문에 이혼하는 것은 너무 참을성이 부족하다, 적응력이 부족하다, 갈등을 이겨내는 면역이 없는 것입니다. 성격이 맞지 않는 것은 본래부터 맞지 않는 것입니다. 부부 싸움할 때 거짓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맞지 않는가?” 이것은 참말입니다. 처음부터 안 맞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갈등을 극복하는 면역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요즘 결혼문화는 도가 넘어도 보통 도가 넘지 않습니다. 우리 세대에는 결혼사진도 네 번만 찍으면 끝났습니다. 저는 큰 사진이 두 장 밖에 없습니다. 주례자와 부부사진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앨범 사진을 며칠씩 찍는 사람이 있습니다. 옷도 수십 번 갈아입고 찍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거기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녀들이 신혼여행 근사한데 갔다 오면 행복할 줄 알아도 그건 하나의 부수적인 것입니다. 무엇을 갖추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있어야 그 믿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이 있고, 은혜가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예수 없는 호화로운 세상문화 속에 행복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생의 답이 있다고 강권하여 “와 보라”고 할 이유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끌려 왔던, 강제로 보쌈을 해서 왔든지 와서 예수를 만나고, 예수 믿고 구원 받으면 그것은 보쌈도 정당한 것입니다. 보쌈 당한 것도 정당한 것입니다. 강권하라는 말은 그런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불문하고 예수께로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맺는 말

  “와 보라.” 예수님의 전도정석입니다. 예수님의 이 전도방법은 시대를 초월하여 아무나 할 수 있는 전도의 정석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와 보라”고 강권하는 전도의 음성이 들려지고 선포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너무 조용하게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와 보라’고 강권하는 소리가 여러분의 입에서 나오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이웃, 가족, 친구, 동네사람을 “와 보라”고 강권하기 위해서 시끄러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런 소란은 아무리 일어나도 소망이 있는 소란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이 벙어리 개와 같이 전도의 부르짖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 입으로 짖어야 합니다. 와 보라고 짖어야 합니다. 복음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와 보라. 그리고 강권해야 합니다. 인사치례로 말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어코 설득하시기 바랍니다. 오는 주일날 강권하여 “와 보라”고 하는 여러분의 음성과 동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예수께로 와보는 역사가 일어나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