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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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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아오신 이웃 여러분, 지난 주일에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정 광욱 목사님을 통해서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에 대해서 복된 말씀을 들으셨지요? 언제나 귀한 말씀의 사역을 감당했기에 마음의 부담을 덜고 인도를 다녀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금 사랑실천하기 50일 시리즈 설교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설교로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잘 생각해 보면 우정을 파괴하는 주범은 분노가 아닙니다. 참지 못함이나 무관심도 아니고 불친절도 아닙니다. 그것은 시기입니다.

대부분의 죄악의 배후에는 시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3장 16절은 말합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약3:16) 그렇습니다. 시기와 이기적인 욕망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일이 있다는 말은 맞습니다.

시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투사가 되기도 하고 일에 중독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이렇게 설파합니다. “또 내가 모든 수고와 일의 모든 성과를 살펴보니 그것도 사람들이 서로 질투하는 데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이것도 바람을 잡듯 헛된 일이다.”

그러므로 또한 잠언서도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는 암과 같다고 말합니다. 산채로 여러분을 삼킵니다. 안에서 시작해서 비참하게 만듭니다. 가족관계도 형제관계도 파괴합니다. 형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해서 죽입니다. 사업을 망치게 만듭니다. 나라들로 전쟁에 몰아넣습니다. 시기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닙니다.

우리의 삶을 철저히 파괴하는 시기를 어떻게 몰아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정말 시기로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주제가는 “잘 살아보자, 더 많이 가져보자, 네가 가진 것을 내가 갖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우리 삶에 깊이 자리한 시기심을 뿌리 뽑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포도원의 품꾼들 이야기를 통해서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인력 시장에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하루해가 거의 지는 시간까지 품꾼들을 다섯 차례 고용했습니다. 처음 데리고 온 사람에게 하루 일당인 한 데나리온 (오만원쯤 될까요?)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적당한 품삯을 주기로 하고 데리고 왔습니다. 나머지 사람들로서는 일할 기회를 늦게나마 잡은데 대해서 감사하면서 주는 대로 받을 각오를 한 사람들입니다.

하루해가 떨어지고 모두 각자의 품삯을 받아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늦게 온 사람부터 시작해서 처음 온 사람까지 차례로 품삯을 주었습니다.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주인은 하루 일당 전부를 주었습니다.

어쩌면 돌아가면 기다릴 가난한 집 식구들을 생각해서 늦게 와서 비록 한 시간만 일했지만 하루 일당을 주기로 결심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처음 온 사람에게 주기로 한 품삯을 적게 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하고도 하루 품삯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볼 때에 먼저 온 사람은 화가 났습니다.

그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 일을 한 사람들로서는 받아야 할 만큼 받지를 못했다고 느낀 것입니다. 사실은 뒤에 온 사람을 시기하게 되어서 주인에게 불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시기하지 않는 다섯 가지 처방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1. 시기하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비교하는 것은 모든 시기심의 뿌리입니다. 비교라고 하는 것은 이 품꾼들이 범한 첫 번째 실수입니다.

우린 일을 더 많이 했으니까 더 많이 받을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더 받아야 마땅해”라고 생각하면서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자주 그렇게 말합니다. 비교하지 말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비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얼굴생김새나 버는 돈이나 하다못해 지능지수까지도 비교하지 말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 아이들이나 여러분의 직업이나 그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째는 여러분은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특별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여러분처럼 생긴 존재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아무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비교하기 시작하면 언제나 둘 중 하나의 잘못을 저지릅니다. 교만한 마음이나 시기심을 갖게 합니다. 사는 아파트나 타고 다니는 자동차나 비교하기 시작하면 남보다 더 나은 것을 갖고 있으면 잘 난체 하게 되고 못한 것을 갖고 있으면 시기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진 것을 척도로 삼지 마십시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얼마만큼 가졌느냐가 아니고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 입니다. 대기업을 몇 개씩 가지고 있어도 관계가 망가진 인생은 불행합니다. 해마다 새로 결혼을 해서 아내를 맞아들인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은 관계입니다. 천국에 도착하면 하나님께서 물으실 질문은 사업을 하면서 몇 번 실패를 했느냐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인간관계를 맺고 살았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은 모두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전하기 위해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세상 살면서 사랑하기에 실패하면 불행한 존재입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아도 가정에서 평화를 누리지 못하면 실패자의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인생을 피상적으로만 보면 부러운 사람도 있습니다. 샘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어 보입니다. 시기라는 것은 사람을 가까이 친밀하게 알지 못할 때 일어납니다. 멀리서 보면 대단해 보이고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친밀하게 알게 되면 그들에게도 상처와 실수, 실패와 아픔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마다 숨겨진 고통도 있고 밝히고 싶지 않는 약점도 있습니다. 다만 멀리서는 그 고통과 상처가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멀리서 보면 시기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명인이나 연예인들이 인기를 끄는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가까이 가보면 멀리서 생각하던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가까이 접근하면 아무도 보기처럼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걱정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의 삶에 보기처럼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정직하게 말하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들일 수록 더 많은 아픔들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시기에 대한 처방은 사람을 가까이 사귀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소그룹에 속해야 합니다. 소그룹의 장점은 사람들을 가까이 알고 사귈 수 있는 것입니다. 가까이 가서 사귀어 보면 부러워하고 시기하는 대신에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면 시기할 수 없습니다. 구역모임도 좋습니다. 가까이 서로 사귀게 되면 가로 막던 벽은 사라지고 서로를 연결하는 새로운 가교가 만들어 질 것입니다. 시기는 갈라놓습니다. 교제는 서로를 묶어줍니다.

시기심의 역사는 사실 깊습니다. 사람들이 동굴 속에 살던 시절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시기심을 우리의 삶에서 몰아내려면, 그리고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려면, 비교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부디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2. 함께 기뻐하고 즐기도록 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함께 기뻐하고 즐기십시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선하시고 은혜로우심을 보게 되면 그것을 인해 화를 내는 대신 즐기는 것을 배우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이 누군가를 복주시면 그로 인해 여러분도 행복해 해야할, 기뻐해야할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와 같은 죄인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배워야만 합니다. 타인이 받는 복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은 배워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선하심으로 인해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배워야만 합니다.

이 포도원의 품꾼들은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하루 종일 일한 친구들은 계약한대로 받았습니다. 속임 당한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꼭 같이 받는다는 사실에 분노했습니다. 늦게 온 사람들도 관대한 주인 만나서 먹거리를 사서 배고픈 식구들에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함께 기뻐하는 대신에 그들은 분노했습니다.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받고 나서, 포도원주인에게 투덜거렸습니다. 그러자 대답합니다. “내가 뒤에 온 사람에게 후하기 때문에 당신 눈에는 잘못되어 보입니까?” 그들은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성경이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닙니다. 여러분 관점을 바꾸어 보십시오. 하루에 한 시간 밖에 일 못했다고 해서 돌아가게 되면 열 두시간 일해서 버는 한 데나리온이라야 한 식구가 하루 살아갈 수 있는데, 품군이란 본래 그런 것 아닙니까? 일당 받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십이분의 일 받아가서 어떻게 식구들이 먹고 살 수 있습니까? 그러기에 주인이 후하게 준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 와서 불평하는 사람들하고 기본적으로 상당히 동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래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로마서 12장 15절은 말합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라”(롬12:15, 표준새번역) 지난번에 우리는 이 구절의 뒷부분을 살핀 바 있습니다.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 이 뒷 부분은 첫 부분보다 훨씬 쉽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은 차라리 쉽습니다.

어떤 사람이 힘이 빠져있고 어려움을 당할 때에 동정하는 것은 그나마 쉬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은 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성공을 했을 때 잘 처신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사실로 인해서 위협을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세상이란 갈라먹어야 하는 피자조각처럼 느끼나 봅니다. 다른 사람의 조각이 커지면 내가 먹어야 하는 조각이 작아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 채울 수 있는 피자를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그 분의 축복은 다함이 없습니다. 그분의 은혜는 바닥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풍성히 베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복 주신다고 해서 여러분이 복이 줄어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꼭 같이 복 주실 않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건강의 복을 주시고 다른 이에게는 큰 일을 하는 복을 주시고 또 다른 이에게는 좋은 가족을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의 기쁨에 함께 기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시기란 여러분이 관심을 가진 분야나 아니면 여러분이 특히 잘 하는 분야에서 나타납니다. 운동선수는 다른 운동선수를, 음악가는 다른 음악가를 시기하기가 쉽습니다. 저는 한번도 바이얼린 잘 타는 사람을 시기해 본적이 없습니다. 정근두 목사가 시기를 할 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목회자이겠죠. 설교하는 사람이겠죠. 나보다 더 설교를 잘하고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을 시기할법 합니다. 형제간끼리 시기하기 쉽고 자매끼리 시기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시기란 숨은 죄라서 우리는 그것이 나쁘다고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파괴적이고 비열한 죄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평가절하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망치고 자기 자신을 비참한 자리에 빠뜨립니다. 관계를 파괴하고 비판적으로 만듭니다. 대개의 비판은 시기에서 나옵니다. 

시기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도록 하는 주범입니다. 결혼하는 친구를 보면 축하하며 함께 기뻐하십시오. 승진한 친구를 만나면 축하하며 함께 기뻐하십시오. 난 왜 계속 이 자리에 머물러야 하나 하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성공한 친구를 만나면 자기 일처럼 함께 기뻐하십시오. 나는 왜 부잣집에 태어나지 못했을까 하고 불만을 갖지 마십시오. 그러다보면 기뻐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놓칩니다. 그러다보면 스스로 초라해지고 비참하게 됩니다.

시기도 여러분의 선택사항입니다. 기뻐하기로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불평하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만날 때 여러분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다른 이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기뻐하는 것을 배우면 세상에는 훨씬 많은 기쁨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기쁨을 배울 수 있는 곳이 바로 소그룹입니다. 구역과 같은 소그룹에서 우리는 다른 이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함께 기뻐하는 것을 배워갈 수 있습니다.

슬픔을 만난 사람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기쁜 일을 당한 사람을 보면서 함께 기뻐하는 것을 배울 때 삶을 의미가 있습니다. 소그룹을 통해서 사랑을 받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울 때 우리의 신앙은 새로운 의미를 가집니다. 


3. 여러분이 가진 것으로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이 갖지 못한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마시고 일어나지 않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마시고 지금 여러분이 가진 것으로 인해서 감사하십시오. 이것도 역시 배워야 합니다. 우리에겐 자연스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하는 바울로부터 배우시길 바랍니다. 삶은 선한 것을 배우는 과정이요 기회입니다. 이 품꾼들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을 두고, 더 많이 받지 못한 품삯으로 인해 불평하는 대신에 받은 것으로 인해서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누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별다르게 보아 줍니까? 여러분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인데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고전4:7, 표준새번역)

시기란 거짓 사실에 근거합니다. 많이 가져야 더 행복하다는 신화입니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이 가져야 된다고 자신을 다그치게 됩니다. 시기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바라보며 중얼거립니다. “왜 저 사람들만 누리지? 나도 그것을 누려야 하는데 . . .”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바라보며 고백합니다. “왜 하필 저입니까? 제가 왜 이것을 누려야 합니까? 나는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그것은 마치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관점에 따라서 순식간에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혜자는 말합니다. “슬기로운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가난한 사람이 세상 살아가는 법을 안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것 또한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욕심에 사로잡혀서 헤매는 것보다 낫다.”(잠6:8-9, 표준새번역)

시기란 소원을 갖는 것이나 꿈을 가지는 것이나 목표를 가지는 것과는 다릅니다. 꼭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을 갖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시기란 여러분이 갖기를 원하고 꿈꾸며 소원하는 바를 이미 가진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시기는 말합니다. 내가 소원하는 바, 내가 꿈꾸는 바, 내가 목표하는 바를 얻기까지는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시기는 이미 여러분이 가진 것으로 인해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4. 삶이 공평하지 않아 보일 때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다른 이에게는 복을 주시고 여러분에게는 복을 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있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좋은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삶이 불공평해 보일 때 하나님을 신뢰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기심이 자리했는지 여부를 판별하는 방법은 여러분이 사용하는 언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공평하지 못해”라는 말을 한다면 여러분은 이미 시기의 덫에 걸려들었습니다.

“공평하지 못해, 왜 그들만이? 왜 나는 아니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내가 얼마나 교회 일을 충성했는데”그렇게 말한다면 더 이상 신앙생활 하는게 아닙니다. 노력하는 만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성이면 감천이다 하는 세상 종교를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모든 것을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예배에 출석하는 것, 헌금을 드리는 것, 기도시간을 지키는 것 모두가 율법적인 의를 추구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여러분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의 고통도 처지도 다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이 그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랴고 믿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품꾼들은 자기들이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약속한 것을 못 받아서가 아닙니다. 정확히 약속한 것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기들이 더 많이 일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도 꼭 같은 돈을 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받고 나서,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말하기를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를 하시는군요.” 하였다.

이 불평에 대해서 주인은 대답합니다. 여기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친구여, 나는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그대는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그대의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그대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대 눈에 거슬리오?”자기 관점에서 보면 진짜 부자 못하는 일 없다더니 하고 싶은대로 하네 그런 느낌이 들겠지만 부자 입장에서는 십이분의일 하루 품삯 받아서는 굶게 될 식구들을 생각할 때 있는 것 가지고 하루 다 일한 것처럼 쳐줘서 보내면 그 식구들 전체가 굶주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하게 베풀어 준 것입니다.

모든 시기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을 향한 시비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문제는 사실 여러분이 시기하는 그 사람 문제가 아닙니다. 깊은 차원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삶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결정에 대해서 불만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시기심이 발동할 때 근본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최선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여러분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편애를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을 터뜨립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떤 사람처럼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무조건 적으로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사랑할 수 있지만 너를 사랑할 수는 없어”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주시지 않는 타당한 이유를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달라는 것을 주어야 하는 의무를 갖고 계시질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동판매기가 아닙니다. 동전을 넣으면 캔이 나오듯이 기도하면 즉각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라비아 나이트에 나오는 거인이 아닙니다. 몇 마디 주문 앞에 시중을 드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섬기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반드시 필요한데도 주시지 않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평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설교를 하는 설교자라고 해서 언제나 뜻대로 되지 않을때 평안한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난 연말에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땅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는 동안에 주인이 그 땅을 거두어 들였더라고요. 어떻게 생각하면 속상합니다. 그러나 저는 속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보다 생각이 더 깊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나보다 더 좋은 것을 아신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전능하신 분, 전지하신 분, 나를 끔찍이 사랑하시는 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잊어버리기 때문에 시기심이 발동합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여러분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여간 인생은 소유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것이 평가기준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은 병이 걸린 증상입니다. 다시금 주님 사랑에 빠져들기를 바랍니다. 처음 신자가 될 때처럼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게 되면 주말이 되면 교회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지 않습니다. 주말이 될 수록 함께 가서 예배할 것, 그 기대가 마음에 차오르게 됩니다. 

삶이 불공평하게 보일 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길 바랍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처방은 무엇일까요?


5.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다른 사람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기에 곁눈질 하지 마십시오. 시기를 여러분의 삶에서 뿌리 뽑기 위해서 여러분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계속 주시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인의 말을 귀담아 들으시길 바랍니다. “친구여, 나는 당신에게 부당하게 대한 것이 없소. 그대는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그대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그대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는 대신 약속대로 품삯을 받았으니 기다리는 식구들이 있는 가정으로 가야 할 때입니다. 삶의 다음 발걸음을 옮겨야 할 시간입니다. 시기하고 시비할 때가 아니라 다음 행동을 취할 때입니다.

우리는 때로 과거에 사로잡혀서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애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십시오. 믿기 어려운 놀라운 계획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격려와 응원을 들어봅시다.

“이처럼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경기장에 둘러앉아 우리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속도를 늦추거나 뒤로 물러설 수 있겠습니까? 무언가 얽매이기 쉬운 모든 것을 다 벗어 던져 버리고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정해 놓으신 이 특별한 경주에 인내를 가지고 달려갑시다.”

여러분 각자에게 주어진 이 특별한 경주를 기억하십시오. 사람마다 독특한 경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코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리는 것은 여덟 사람이 달리면 같은 코스를 달리지만 인생길에서는 각자가 다른 코스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샘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나기도 전에 계획된 그 놀라운 경주를 달리시길 바랍니다.

지난 번 성구를 외워봅시다. 마태복음 7장 12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저는 천명이 모여 있어도 입술 모양만 보면 지금 외우고 있는지 따라하고 있는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 외워올 성구는 야고보서 3장 16절입니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예수께서는 충격적인 말씀으로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마20:16) 주님은 여기서 천국의 질서를 말합니다. 누구든지 첫째는 꼴찌가 되고 큰 자는 섬기는 자가 되리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천국의 질서는 우리가 여기서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엄청난 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질 것입니다. 가치의 변혁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러워 하던 그 많은 사람들이 거기는 다 무대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재산과 소유와 인기와 명성이 소중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여기 세상에서 중요한 것들은 더 이상 거기 하늘에서는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며 시기하던 모든 것은 천국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부러워하고 시기하든 성공도, 재물도, 재능도, 미모도, 인기도, 성취도 거기 천국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생애를 평가하실 때는 이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던 돈으로도 성공으로도 재능이나 미모로 평가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여러분의 생애를 통해 얼마나 다른 사람을 사랑했는지, 그리고 섬겼는지를 가지고 평가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올해 우리는 “섬기는 기쁨이 가득한 해”를 표어로 삼아 출발했습니다. 이제 오월 말이 되었습니다. 한해가 반쯤 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에 비추어 누구를 어떻게 섬겼습니까? 섬길 때 맛보는 기쁨을 알고 계십니까? 갑을 교회를 섬긴다고 수고한 6지구 성도 여러분, 감사합니다. 봉사는 행동으로 표현된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섬김에 하늘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성숙한 성도가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섬기는 성도가 되십시오. 다른 섬김의 장을 찾지 못하셨으면 다른 분들을 위해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를 하는 것도 귀한 섬김의 시작입니다. 월마트 주차장에 차를 두고 오시는 것은 구체적인 섬김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올해도 집사임명 받아서 다른 구체적인 섬김의 장을 가지고 있지 못한데 하다못해 주차하는 일이라도 하고 오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귀한 일이 될 것입니다.

봉사하라고 요청하면 바쁘다고 대답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바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보상을 위해서 시간을 재조정하십시오. 사랑 때문에 여러분의 시간을, 여러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어보십시오.

말씀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각자에게 독특한 은사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만의 독특한 것으로써 여러분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생은 섬김의 기회이지 뽐내는 시간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섬기는 삶을 사십시오.

저도 작년보다 더 잘 섬겨보려고 요즈음은 주일 식탁을 마련했습니다. 비록 저희 사택으로 모시지는 못해도 교회를 섬기는 여러분을 만나기 위한 조촐한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여덟사람 정도를 3부예배 끝나면 같이 식사자리에 초청을 해서 만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네요.

“정목사가 분립개척 개척 하더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분리할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서 만나고 있다”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요. 나는 여러분들의 그 탁월한 상상력에 대해서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그 탁월한 상상력을 좀더 좋은 쪽에, 건전한 쪽에, 바른 쪽에 근거가 있는 쪽에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요즈음 과학자들이 밝힌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정규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자원해서 섬기는 사람들이 건강하고 오래 산다는 보고입니다. 미시건 대학, 스텐포드 대학, 일류대학에서 연구한 결과입니다. 섬기는 기쁨은 여러분에게 엔돌핀을 상승시키고 혈압을 떨어뜨리며 면역성을 높인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섬기는 일에 바쁜 사람은 시기하는 일에 시간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모두 바쁘게 살고 있지만 섬기는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생을 재조정하시길 바랍니다. 저도 이제 교회가 허용하는 기간을 사역을 한다고 하면 15년 더 일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남은 그 기간을 어떻게 잘 할 것인지를 위해서 요즘 삶을 재조정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논문 쓸 때 사용했던 자료, 20년 동안 내가 보물처럼 가지고 있었는데 지난주간 내어 버렸습니다. 20년 동안 안 쓴 자료를 앞으로 15년 동안에 볼 기회가 없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맞겠지요? 이제부터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인지,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이 제가 해야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은 기간은 주님을 위해서 보다 더 잘 섬기는, 여러분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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