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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총전도주일] 예수, 그는 누구인가? (마 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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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기 목사 (진주제일교회)

어느 날 저녁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벌써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은 어부들 입니다. 이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을 살아오면서, 배 타고 고기를 잡아 삶을 살아온 어부 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지혜와 경험과 방법을 최대한 동원해서 애써 보았지만 어떻게 해 볼 수 없었습니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배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때요? 살만 합니까? 살아가는 동안 생각도 못 했던 폭풍은 만난적은 없습니까? 아무리 발버둥치고 내 아는 모든 방법과 지혜를 다 동원해도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친 적은 없습니까?
큰 풍랑으로 죽을 것 같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웁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이러면 생각이 빠른 사람은 말 할 겁니다.
“뭐 예수님이 타신 배도 풍랑 만났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배에는 풍랑이 일지.”
“예수님 믿는 사람은 예수 안 믿는 사람과 달라야 할 것 아닌가?”
그런 생각들 때 없습니까?
사실 그렇잖아요?
능히 바다와 바람을 꾸짖어 고요하고 잠잠하게 하실 분이라면, 애시 당초부터, 바다와 바람이, 예수님께서 계신 배에는 덤벼들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병들어 고통당하다 고침 받는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예수 믿으니까 처음부터 병들지 않는 것이 더 감사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 믿어도 병드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다는 것은 뭐며, 예수께서 병자를 고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또 뭡니까?
그런데, 만약, 제자들이 탄 배에 풍랑이 일지 않았다면, 또, 풍랑이 일었어도 제자들이 얼마든지 헤쳐 나갈 수 있었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깨우기나 했겠어요?

사람은 살면서 수도 없는 풍랑을 만납니다. 때로는 우리의 지혜, 힘, 그 무엇으로도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큰 풍랑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힘으로 도저히 해결 할 수 없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 합니다. 그리고 그 도움 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십니다.
주무시던 예수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서로 말합니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하고 외치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당시 종교와 사회 지도자들인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믿으러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었느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고 큰 소리로 책망했던 그 사람은 세례 요한 입니다.
그러던 그가 옥에 갇혔습니다. 이 옥에서, 아마도 그는 자신이 그동안 했던 일들을 돌아다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걸었던 기대 또한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 그분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 답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가 요단강에서 세례를 줄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 때 하늘이 열렸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예수님 위에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들었습니다. 어느 날, 길 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세례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하고 말씀하신적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망하여야 한다.”면서,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예수, 이분이 누구인지 감옥에 들어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메시아 같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겁니다. 병자 고치고, 죽은 자 살리고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틀림없는데, 도무지 세상을 심판할 만한 큰 권능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생각하는 메시야, 세례 요한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성령과 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입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깨끗하게 하신 다음, 알곡을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모아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분입니다. 선한 사람은 보살펴 주시고, 악한 사람을 쓸어버리시는 분이 메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십시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도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며 내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 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 네게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너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요. 빼앗기지 않으려고 움켜잡아도 빼앗기며 도둑맞는 세상인데……. 그런데 오른 뺨 치거든 왼뺨도 돌려 대라고? 그러면 상대가 안 때립니까? 오히려 한 대 더 맞는 거 아닙니까? 아니, 속옷을 빼앗으려고 고소한 사람에게 겉옷까지 주어요?
도대체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야가 맞는 겁니까?
그래서 세례 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물어보게 하였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예수! 당신이 정말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 입니까?”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의 입장으로 보면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여러분도 그렇지요?
예수! 그는 누구인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실까? 정말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일까? 끝내 이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실까?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냥, “내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될 것을, 예수님은 마치 동문서답 같이 엉뚱한 것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오시기 약 500년 전 사람인 이사야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은 귀가 열린 것이다.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이사야 35:5-6)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 하셨다.”(이사야 61:1)
오실 그이가 당신이 십니까? 예수! 당신은 누구입니다?
그 물음에 대해, 예수님은, 그냥 여기저기서 들은 대로 지레짐작 하지 말고, 직접 듣고, 직접 본 것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신 말씀, 지금 예수님이 하신 일들은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한 바로 그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오시면 이루어지는 일들이 지금 예수에게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그 말씀이 지금 예수에게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던 도중이었습니다. 사실, 광야를 지내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곧장 앞으로가면 좋은데, 어느 날 보니 오던 길로 되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불뱀을 백성들에게 보냈습니다. 사실, 광야에는 불뱀이 많습니다. 다만 그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불뱀으로부터 보호해 주신 불뱀에 물려 죽는 일이 없었는데, 이때의 원망으로 하나님께서 불뱀을 자유롭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불뱀에 물려 죽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원망하던 백성들이 놀랐습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하나님의 종인 모세에게 와서 간구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위에 달아놓아라,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구리로 불 뱀을 만들어서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놓았습니다. 뱀이 물었을 때에, 물린 사람은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불뱀에 물렸는데, 그래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보면 산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이게 믿어집니까? 이게 이해가 됩니까? 세상에 미신으로 이야기 한다면 이보다 더한 미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살아났습니다.
“그것 쳐다본다고 살아 나냐? 웃기지 말아라.” 하고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쳐다보면 산다.”는 말씀을 믿고 쳐다본 사람은 살아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구리 뱀에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산다.” 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구리 뱀, 그 자체에 무슨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이 미신이요, 우상숭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이사야의 말씀이 곧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니, 불교와의 대화니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습니다.
물론, 종교라는 입장에서는 서로가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삼일운동 때, 기독교는 많은 다른 종교들과 손잡고 일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어떻게 중들하고 함께 일할 수 있느냐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만, 감리교의 많은 지도자들은 다른 종교와 연합해서 일했습니다. 독립선언문 33인중 9명이 감리교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구원에 대해서는 아니었습니다.
함께 일할 수 있지요. 환경운동, 같이 할 수 있잖아요. 지리산 살리기 운동, 그것도 같이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구원은 아닙니다.
불교와의 대화. 그러나 사실 그 근본에서는 대화할 수 없습니다.
불교는 108가지 번뇌를 이야기 합니다. 그 시작이 108번뇌입니다. 이 번뇌의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번뇌가 왜 생깁니까? 욕심입니다. 갖고 싶은 마음입니다. 여기 ‘이것’을 갖고 싶은데 가질 수 없어 번뇌가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해답이 “없다.”는 겁니다. “원래부터 이것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산다고 하는 것도 하나의 짧은 꿈에 불과 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등바등 살 것 없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로우니, 아예 사랑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자는 겁니다.
기독교는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여기 ‘이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갖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 것 아닙니다. 역시 번뇌가 생깁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겁니다. 그를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졌기에 오히려 내 마음이 기쁜 겁니다.
존 웨슬리는, “될 수 있으면 많이 벌어라. 될 수 있으면 많이 저축하라.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많이 써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는 무소유가 아닙니다. 있는 것을 어떻게 없다고 여기겠습니까?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겁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을 다 버림으로 평안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기에 평안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들 말 합니다.
기독교는 너무 독선이라고, 배타적인 종교라고, 어떻게 예수 믿어야만 구원 받는다고 할 수 있느냐고…….
여기 진주가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진주는 진주만 진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보석이 있다 하더라도 진주만 진주라고 하는 겁니다. 또 진주는 진주장사에게만 진주가 아닙니다. 누구나 진주를 진주라고 합니다.
그런 겁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독선이라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배타적이라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예수! 그것은 예수쟁이들이나 하는 소리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진주는 진주장사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진주이듯이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들 말합니다. 서울 가는 길은 많다고.
그렇습니다. 서울 가는 길은 많습니다. 가는 방법도 많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길은 아닙니다. 보세요. 서울은 가도 되고, 안 가도 됩니다. 여기 서울 한번도 안가 보고 살아온 사람이 있습니다. 가도 되고 안가도 되는 길, 그 길 또한 수 천 수 만 가지인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나 구원의 길은 아닙니다. 이것은 죽느냐 사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영원한 생명이냐 영원한 죽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을 돈 주고 살수 있습니까? 생명은 생명으로만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형수가 죽으므로 다른 사형수가 달리 살아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모두 자기의 죄로 죽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렇습니다. 우린 모두 우리의 죄 때문에 죽는 겁니다. 우리는 대신 죽어 줄 수도 없고, 내가 누구대신 죽어 그를 살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분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분이 죽으셨습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를 살리기 위해 그분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느 동네에 홀로 사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오로지 하나 그 생명보다 소중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그 여인의 희망이자 꿈이요 곧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울고 울어도 그 아들은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장례 치르는 날, 동네 사람에 의해 동네 밖으로 나가는 아들의 시신을 뒤따르는 그 어머니의 슬픔은 이루 말 할 수 없었고, 그 가슴은 피멍이 들다 못해 찢어질 정도의 아픔이었습니다.
그 때 동네를 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별로 대단한 사람들은 아닌 듯싶습니다. 초라한 옷차림입니다. 그 사람이 장례하는 사람들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 아들의 시신을 땅에 내렸습니다. 그 사람이 말합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그러자 그 죽은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분이 여러분의 죽은 영혼을 살리십니다.
예수, 그분이 풍랑과 바람이 몰아치는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가정을 평화롭게 해주십니다.
행복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계실 때 가능합니다. 행복한 가정 역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계실 때 가능합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그토록 기다리던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 하실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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