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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겨주라 (마 20: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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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상복목사 (할렐루야교회)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5-28


이 세상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가정처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가정의 달 5월 첫째 주에는 어린이들을 어떻게 키울지 생각해보았고 둘째 주에는 부모님들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셋째 주와 넷째 주에 이어 오늘 마지막 주일에는 사랑의 언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랑의 언어를 배워서 적절히 사용하자는 것입니다. 사랑의 언어란 말 뿐 아니라 행동과 우리의 삶 전체를 이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각자 알아듣는 언어가 다릅니다. 오늘은 사랑의 언어에 대해 세 가지를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언제 사랑을 느낄까요? 선물을 받을 때입니다. 크던 작던, 찬물 한 그릇이라도 무엇인가 서로 주고받으면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은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고 선물은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나라와 문화 언어 종족을 막론하고 사랑하는 사람끼리 선물을 주고받는데 이것은 선물이 사랑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손님이 오시면 따뜻한 정을 표하기 위해 마실 것 한 잔이라도 내놓습니다. 주는 것을 참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27가지의 영적 은사 중에 'Gift of Giving'(주는 은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남에게 무엇인가 주는 것이 너무 기쁘고 즐겁습니다. 우리 권사님 중에 음식솜씨가 아주 뛰어난 분이 계십니다. 아마 권사님의 음식을 안 먹어본 분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고, 주면 즐겁습니다. 대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느끼게 되지요.

예전에 우리나라에는 서로 담배를 권하는 아주 나쁜 관습이 있었습니다.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 담배를 한 개비 권하고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정(情)이었지만 지금 알고 보니 아주 고약한 일을 한 것입니다. 폐가 나빠지고 입안에 암이 생길 수 있어요. 그 때는 그런 것을 잘 몰랐지요. 잘못된 사랑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혔으나 그 당시에는 그것이 하나의 문화였습니다. 요즘은 또 술을 권해서 상대방을 완전히 망가뜨려놓기도 합니다. 그것도 일종의 사랑 표현이라고 착각합니다. 초대 한국교회 당시에는 술 담배를 했었습니다. 그것이 천당 가는 것과는 상관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술 담배가 백해무익하고 술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들을 보고 일찍부터 좋지 않은 습관들을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모아 만주와 제주도 등지에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참 잘 한 것입니다.

선물은 사랑의 상징입니다. 부부 사이에 최악의 경우는 결혼반지를 빼 내던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둘 사이의 사랑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제가 지금 끼고 있는 반지는 결혼반지는 아니지만 사랑의 상징입니다. 이전에 목회하던 벧엘교회가 준 것입니다. 우리 부부도 결혼하면서 금반지를 하나씩 만들어 끼었었는데 순금이라 색도 누렇고 물렁물렁해서 더 이상 낄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난 번 금 모으기 할 때 교회에 냈습니다. 제가 한국으로 오기 바로 전날 밤, 벧엘교회가 큰 호텔에서 파티를 열었습니다. 제가 도착하자마자 입구에서 교인들이 저를 붙잡더니 다짜고짜 제 넥타이를 풀고 나비넥타이를 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제 아내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습니다. 5분 후에 제 아내는 면사포를 쓰고 나타났어요. “아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목사님, 오늘이 두 분 결혼 25주년이시지요? 그리고 내일 떠나시니까 저희가 지금부터 작별인사 겸 두 분의 25주년 결혼기념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제 세 딸이 여자 들러리이고 부목사님 세 분이 남자들러리입니다. 웨딩마치가 울리고 수석부목사님이 주례를 서고 온 교인들과 함께 즐겁게 은혼식을 시작했습니다. 제 아내와 저 사이의 사랑을 확인한 후 덧붙여 “당신은 벧엘교회를 영원히 사랑하겠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제가 개척한 교회인데 어떻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교인대표들이 저에게 이 반지를 끼워주었습니다. 지금도 이 반지를 볼 때마다 따뜻한 벧엘교회 성도들을 생각하고 참 즐겁고 행복했던 그 시간들을 늘 상기합니다. 교회를 세우고 오랫동안 수많은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고 행복했던 그 시간들을 기억합니다.

선물은 사랑의 상징입니다. 여기 돌조각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팔려면 5원도 못 받겠지만 저에게는 좋은 선물입니다. 무너진 베를린 장벽의 돌조각입니다. 한국도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며 독일 사람이 1990년 4월에 저에게 주었습니다. 저도 이산가족이거든요. 비록 한 조각의 돌에 불과하지만 제가 이것을 서재에 놓고 볼 때마다 한국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한 그 독일 사람을 기억하게 됩니다. 선물은 사랑과 관심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서로 선물을 주는 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 작은 카드가 하나 있습니다. 겉으론 하찮아 보이기도 합니다. “몽고를 위해 기도해주세요(Pray for Mongolia)"라고 써 있는 이 카드는 몽고인들이 저에게 준 선물입니다. 이런 것들이 제 서재 여기저기 놓여있어서 볼 때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들은 나를 생각하며 작은 것이나마 저에게 주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사랑을 표현하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Thank you"라고 쓴 카드도 하나 있군요. 우리 대학생들이 몇 마디씩 저에게 글을 쓰고 겉에 자기들 사진을 붙여서 주었어요. 저는 사진 속의 얼굴들을 볼 때마다 우리 대학생들을 생각하고 사랑을 느끼고 기도하게 됩니다. 저는 평생 많은 사랑의 선물을 받았고 때로는 큰 선물도 있었지만, 사랑은 큰 돈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 더 보여드리겠습니다. 뒷면에 신문을 뜯어 붙이고 앞면에는 수채화로 우리교회를 그린 종이접시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의 솜씨이니 피카소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서재를 드나들며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정다운 그 아이와 부모를 생각합니다. 돈의 가치가 아니라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사랑의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물 주기를 아주 즐거워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어느 집사님이 저에게 선물을 가져오셨습니다. 잘 익은 토마토입니다. 그것 2개를 먹고 나왔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사랑의 표현입니다. 서로 주고받는 기쁨이 사랑입니다. 물론 선물 주고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돈을 잘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축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축을 잘 하는 사람에게는 선물 준다는 것이 고통입니다. 한 푼이라도 모아야지요.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돈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쓰는 것이 기쁨이지요. 각각 언어가 다릅니다. 접근과 태도가 다릅니다.

여러분도 각자 여러분의 아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동안 여행 갔다 오며 선물을 사다 주었을 때 아내가 가장 좋아한 것을 생각해보면 좋아하는 것 몇 가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살면서 조금 놀란 것은 그들은 선물을 받으면 거의 까무러칠 듯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뜯어보고는 “This is exactly what I wanted."(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거야) 합니다. “Wonderful! Magnificent! Fantastic!” 저렇게 좋아하는데 또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우리는 선물을 받게 되면 “뭐 이런 걸 가져오셨어요?” 하지요. 때로는 선물 받기가 곤란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누군가가 선물을 주면 기쁨으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행 중에 아내를 위해 뭔가를 사왔는데 “색깔이 틀렸어. 이런 시시한 것을 사왔어”라는 말을 들으면 다시는 아내를 위해 사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나를 이렇게 기억해주다니 너무 고마워요” 라고 인사하고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남편 몰래 다른 사람을 주십시오. 그래야 주는 기쁨이 있고 사는 기쁨, 돈을 쓰는 기쁨이 있지 않겠습니까? 각자 사랑의 언어가 다릅니다. 우리도 무엇을 어떻게 주어야 할지 연구해서 상대방에게 꼭 맞는 사랑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서로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언어는 선물을 주는 것인 동시에 받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랑의 언어는 자기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시고 목숨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헌금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잘 쓰입니다. 확실합니다. 여러분의 시간과 재능도 교회에서 잘 쓰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저도 종종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연약하고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실수도 많고 생각도, 지혜도 부족합니다. 종종 문제도 일으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존재가 못됩니다. 그러나 나를 바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주시고 사용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것이 나를 바치는 것일 것입니다. 또 나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셨어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좋은 선물도 반갑지요. 그러나 자기 자신을 서로에게 주는 것이 가장 소중한 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분의 아이가 학교 축구시합에 나갔다고 하십시다. 초등학교 축구시합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그러나 “너 잘 해”하고 말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와서 아빠의 눈으로 그 아이의 뛰는 모습을 봐주는 것이 바로 아이에게 아버지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끝난 후에 다른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즐거워하는데 자기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자기 부모의 존재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저도 제 아이들을 키울 때 음악 콘서트 한다고 해서 가보면 아이들 솜씨야 신통치 않지요. 그러나 그 자리에 가서 아이와 함께 있어주는 것, 그것으로 아이들은 대단한 정서적, 감성적인 따뜻함을 느낍니다.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축복입니다.

아내가 “여보, 오늘 좀 빨리 들어와요” 했는데도 자정에 맞춰서 들어갑니다. 아무리 빨리 들어오라고 부탁을 해도 바쁘다, 회식이 있다 하면서 친구 동료들과 같이 지내느라고 늦습니다.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있는 아내가 사랑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집에 빨리 와달라는 것은 집에 와서 특별히 무엇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어달라는 것입니다. 같이 앉아 TV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을 느낍니다. 물건을 사 들고 들어와야 사랑이 아니라 내가 가족과 함께 있어주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칭찬 한 마디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중년의 어느 분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펑펑 웁니다. 이유를 물으니 “아버지가 나를 자랑스럽다고, 사랑한다고 하는 말을 일평생 한 번 듣고 싶어서 혹시나 하고 기대했는데 이제 돌아가셨으니 다시는 들어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슬펐지만 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 마디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자기의 모습이 슬퍼서 운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든, 아내를 위해서든 여러분 자신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습니다. 남편이 하는 일에 동참하고 같이 있어주는 것이 사랑의 언어입니다. 사랑의 가장 강력한 상징은 주는 것인데 선물을 주고 우리 자신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부모의 가장 큰 기쁨은 자식들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돈을 드리거나 옷을 사오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에게는 자식의 얼굴과 목소리가 최고의 선물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음성을 들을 때 환희를 느낍니다. 부모님께 얼굴을 자주 보여드리십시오. 제가 참 즐겁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우리 성도들 가운데 아들과 며느리, 사위, 손자 등 온 가족이 주일에 같이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제가 그들에게 어떠냐고 물으면 너무 좋다고들 하지요. 적어도 1주일에 한 번은 자녀들을 교회에서 만나니까요. 예배 마친 후에 같이 국수를 먹으며 얼굴을 보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나는 결혼하면 다른 교회에 가서 우리끼리 예배드리겠다고 생각하는 젊은이가 있으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주중에 일부러 부모님을 찾아갈 필요도 없고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자연스럽게 만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섬겨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유능해지고 권력을 얻고 부자가 되고 통치자가 되어 사람들을 지배하며 살고 싶어 한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지막 욕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기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사람을 통치하는 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너희들 중에는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세계, 영적인 세계에서는 가장 위대한 자는 섬기는 자다. 섬기는 자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없다. 통치자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주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을 받아 자기 제자들의 더러운 발들을 다 씻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위대합니다.

섬김을 받는 것, 큰 사랑입니다. 섬겨주는 것도 대단한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도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고 말합니다. 지난주에도 말했듯이 사랑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 통행입니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지 한 쪽에서만 주고 섬기면 지칩니다. 주기만 하고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가슴에는 한이 맺힙니다. 사랑은 서로 섬기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들에게 “쓰레기 좀 버려라” 하면 “네” 하고 벌떡 일어나 얼른 버리고 와서 “엄마, 더 할 것 없어요?”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엄마, 나 게임하는데 조금 있다가 할게요.” 이것은 엄마의 소중함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은 남편들이 사랑을 표현하기 참 좋은 시대가 되었어요.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고, 또 주택 자체가 아주 편리해졌어요. 예전에는 부엌을 드나들기가 구조적으로 불편했지만 이제는 거실 옆이 바로 부엌이지요. 남편들이 가끔 설거지를 도와주기가 좋습니다. 저도 어쩌다 한 번 하는데 괜찮아요. 설거지를 하며 제가 알게 된 것은 식사 후에 제 아내가 부엌에 있는 시간이 반으로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릇을 씻고 아내가 치우는 것이 반반이에요. 그걸 알고 나니 가끔 설거지를 도와주고 싶어요.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서로 섬기겠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아내의 필요와 사랑의 언어가 무엇인지 찾아서 남편이 아내를 생각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무엇이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 내 부모님에게 맞는 언어인지를 찾아서 계발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아내들에게는 남편이 교회 한 번 와 주는 것이 대단한 사랑입니다. 제가 여러 차례 봤지만, 남편이 어쩌다 교회에 나오는 날은 아내가 거의 미칩니다. 자존심 때문에 남편에게는 말 안 하지만 저에게 하지요. 남편이 저에게 인사하고 지나가면 아내는 뒤에서 저를 보며 너무나 좋아라 합니다. 그것이 자기를 주는 사랑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40대 초반일 때 60대 중반의 어느 장로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키도 크고 얼굴이나 풍채가 너무 잘 생기셨어요. 한국 사람으로서 그렇게 잘 생기신 분은 처음 봤습니다. 그런데 장로님 댁에 갔더니 아내 되시는 권사님은 장로님의 절반밖에 안되는 자그마한 분이셨어요. 그 장로님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아내가 남편의 사랑의 언어를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은 마작을 좋아했습니다. 주말이면 친구들을 불러 밤새도록 마작을 하면서 아내에게는 계속 음식을 해내라고 합니다. 보통 아내들 같으면 또 그러냐고 불평을 했겠지만 이 아내는 남편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라면서 밤새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니 남편이 속으로 조금 미안해졌지요. 하루는 아내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친구들 다음 주일에 또 데리고 오세요.” 아내는 남편의 사랑의 언어를 알고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또 와요? 속상해 죽겠어. 맨날 이게 뭐예요. 잠도 못 자게 하고.” 이것은 사랑의 언어를 모르는 것입니다. “친구들을 얼마든지 데려오세요, 그런데 나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어요.” “그게 뭔데?” “1주일에 한 시간만 나에게 주세요.” “그것 못주겠어? 뭐 하게?” “주일 아침 한 시간만 주세요. 나하고 교회가게요.” “아, 그거 못해주겠어?” 아내가 사랑의 언어를 쓰니 나도 그래야 되겠다 하고 교회에 왔는데 밤새도록 놀던 남편은 교회 맨 뒷자리에 앉아서 졸 준비를 합니다. 설교가 시작되면 자기 시작해서 설교 끝나면 깨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설교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그 교회의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아내의 사랑의 언어가 남편을 녹인 것입니다.

섬겨주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배우자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 섬기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알레이다라는 78세의 화란 할머니는 평생 담배를 피우는 나쁜 습관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끊고 싶어도 자기 의지로는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끊어 뭐하랴 하면서 줄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할머니가 담배를 끊었어요. 79세의 할아버지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78세라도 겉만 그렇지 속은 18세와 다름없지요. 어느 날 할아버지가 청혼을 했는데, 지혜로운 할아버지는 결혼의 조건으로 할머니가 담배를 끊는 날 결혼을 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사랑은 의지보다 강합니다.

사랑의 언어는 각자 다릅니다. 내가 이해하는 사랑의 언어, 네가 원하는 사랑의 언어가 다릅니다. 우리는 지난 3주 동안 사랑의 언어를 하나씩 배워왔습니다. 오늘은, 사랑은 선물을 주는 것이요 사랑은 자기 자신을 주는 것이며 사랑은 섬겨주는 것이라는 점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렇게 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에 안정을 줍니다. 사랑을 받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정감이 생깁니다.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안정감입니다. 누군가 나를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인생은 살만 합니다. 안정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면 괜찮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인간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의 소중함입니다. 안정감, 자존감,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 방법으로 각자에게 사랑을 표현함으로써 안정감을 주고 자기의 가치를 높여주고 그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고 무시하고 경시하면 불안해집니다. 마음에 안정이 없어지고 자기의 가치가 떨어집니다. 인간은 자기의 가치가 떨어질수록 살 맛이 안 납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합니까? 대 기업가, 시장(市長), 높은 사람들이 왜 자살합니까? 멸시를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가치가 떨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사랑은 가치를 높여주는 것입니다. 안정감을 주고 가치를 높이고 소중함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가슴 속에 긍정적인 감정을 넣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서 우리 모두가 사랑의 언어를 배워 많은 사랑을 체험하는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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