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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보다 귀한 자녀(5) (엡 6:4, 사 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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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동호 목사 (높은뜻숭의교회)

초등학교 5학년 때라고 기억이 됩니다. 필리핀과 우리나라 사이의 농구 시합이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우리나라가 이겼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라디오 중계를 들으면서 하나님께 우리나라가 이기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하나님이 참 곤란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틀림없이 필리핀 사람들은 하나님께 필리핀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을 터인데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셔야만 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하나님은 우리나라와 필리핀은 똑같이 사랑하시지 우리나라라고해서 특별히 더 사랑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 곤란한 문제에 대하여 조금 깊이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답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쳐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실력 있는 팀이 이기게 해 주세요’ 실력 있는 팀이 이기는 것이 가장 공정한 일이고, 우리 실력이 필리핀보다 약하다면 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패배는 깨끗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옳고 근사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지는 것에 대한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어려서 가정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운 옷을 입고 다녀야 할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 저만 그런 옷을 입고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중학생이었던 사춘기에는 정말 그런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싫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가방으로 누빈 곳을 가리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그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기 전에는 그것이 부끄럽더니 깊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일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가리고 다녔던 가방을 치웠습니다. 자신 있게 깁고 누빈 곳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당당하게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멋있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세상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부끄러운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끄럽지 않은 일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경기를 한 후 나보다 실력이 나은 사람에게 패배하는 일은 조금 섭섭한 일이기는 하지만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 내가 게으르고 삶의 방식이 잘못되어 가난해 졌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성실히 열심히 살지만 이런 저런 여건 때문에 남보다 좀 가난하게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부끄러운 일을 부끄러운 줄 몰라 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빠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부끄럽지 않은 일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에 못지않게 나빠지고 있습니다.

이솝의 우화 중에 ‘여우와 포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유가 잘 익은 포도를 보고 그것을 따 먹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 포도가 불행하게도 좀 높이 달려 있어서 여우가 아무리 최선을 다하여 점프를 해도 그 포도를 따 먹을 수 없게 되자 그 여우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저 포도는 시어’

자신의 정직한 실패를 인정하지 않은 여우 때문에 멀쩡하게 잘 익은 포도가 신포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는 이와 같은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물론 세상에는 신포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포도가 다 신포도는 아닙니다. 신포도를 신포도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잘 익은 좋은 포도를 무조건 신포도로 매도하는 것은 아주 나쁜일입니다. 세상을 위하여 아주 좋지 않은 일입니다. 이 세상에는 모든 포도를 신포도로 매도하는 여우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살다보면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일이 누군들 쉽겠습니까만은 우리는 그것을 훈련하고 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든 성공한 사람들을 무조건 신포도로 몰아붙이고 정죄하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회적으로 볼 때 참으로 악한 것입니다.

살다보면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가난에 대하여 담담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도통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것에 도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신의 가난을 용납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나머지 모든 부자를 무조건 신포도로 몰아붙이고 정죄하는 것은 비겁한 일입니다. 부끄러운 일일뿐만 아니라 악한 일입니다.

건강한 세상과 사회가 되려면 ‘당당한 실패와 가난’과 ‘겸손한 성공과 부함’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정직한 패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해 할 줄 아는 마음과 성공하고 부해졌을 때 겸손하여 실패하고 가난해 진자들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성공했을 때 교만하여 실패한 자들에 대하여 너그럽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참으로 살맛이 나지를 않습니다. 실패했을 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직하게 성공한 사람들 까지도 신포도로 매도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정말 살맛이 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 그리고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다섯 달란트를 맡은 사람은 열심히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를 맡은 사람도 열심히 장사를 하여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결과적으로 다섯 달란트를 맡았던 사람은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 되었고 두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네 달란트를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열 달란트와 네 달란트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두 사람은 똑같이 충성된 종으로 인정하고 칭찬하셨습니다. 전혀 차이와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한 달란트를 맡았던 사람이 열심히 장사를 하여 한 달란틀 남겼어도 하나님은 똑같이 칭찬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달란트를 맡았던 사람이 열심히 장사를 하다가 실패를 하여 원금도 건지지 못하고 실패를 하였다면 하나님을 뭐라고 하셨을까요? 저는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애야 너무 낙심하지 말아라. 장사를 하다보면 남을 때도 있고 손해를 볼 때도 있는 법이란다. 사람들은 혹시 너를 무능한 사람이라고, 실패한 사람이라고 비방할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단다. 내 보기엔 너도 착하고 충성된 종임에 틀림이 없단다. 염려하지 말아라. 실망하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더 큰 일을 또 다시 맡길 것이다’ 저는 정말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을꺼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확신합니다.

사람들은 성공과 실패는 ‘몇 달란트를 남겼느냐?’ 그래서 지금 ‘몇 달란트를 가지고 있느냐?’를 가지고 판단하지만, 성공과 실패는 달란트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평가로서 판단하는 것이 옳습니다. 많이 남겼다고 성공한 것이 아니고 적게 남겼다고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평가하시면 성공한 것이고, 하나님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평가하시면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무조건 달란트가 적다고 무능하고 실패한 사람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무조건 달란트가 많다고 성공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는 옳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눈에 보이는 성적과 평가에 연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한 달란트를 부끄러워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달란트를 이용하여 열심히 살 생각을 하기 보다는 그것을 땅에 묻어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많은 달란트를 가진 사람을 매도하고 비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쓸데없는 열등의식에 빠져 있습니다. 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참으로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본의 재일교포 야구선수였던 장훈 선수가 처음 프로로 데뷔하여 좋은 성적을 내자 일본 관중들이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장훈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 일본 관중 중에 한 사람이 장훈 선수에게 대하여 ‘죠센징 가라’라는 모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그 말이 선동이 되어 장내에 가득했던 일본 관중들이 한 목소리로 장훈 선수를 야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죠센징 가라’ ‘죠센징 가라’ ....

관중들의 야유가 잦아 들 때까지 조용히 타석에서 벗어나 기다리던 장훈 선수가 다시 타석에 들어서면서 관중을 향하여 큰 소리로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 나는 죠센징이다’ 그리고는 일본 투수가 던지는 공을 담장 밖으로 넘겨 버렸습니다. 홈런을 친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 샘터라는 책에서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장훈 선수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국민소득이 좀 적고 가난한 나라라는 이유 때문에 자신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국민소득이 좀 많은 나라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교만하여 거드럭거린다면 그것도 역시 부끄러운 일입니다. 일본 사람은 일본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한국 사람은 그냥 자신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 사람들도 존중해 줄 줄 알아야 합니다.

프랑스에는 ‘미슐랭 가이드’라는 곳이 있는데 미슐랭 가이드는 식당의 수준을 평가하여 발표하는 기관입니다. 프랑스의 식당과 요리사들의 꿈 중에 하나는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별 3개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지금까지 그곳으로부터 별 3개 평가를 받은 식당은 프랑스 전체를 통 털어서 25곳 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한 곳이 베르나르 루아조라고 하는 사람이 운영을 하였던 코트도르라고 하는 식당입니다. 루아조라고 하는 사람은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별 3개 평가를 받기 위하여 수십년 동안을 노력했고 드디어 1991년에 꿈에도 그리던 미슐랭 가이드로부터 별 3개 평가를 받아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2003년 봄 권총으로 자살을 하였습니다. 이유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미슐랭 가이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느 식당 가이드가 그의 식당 평점을 19점에서 17점으로 낮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결국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전에도 여러 번 말씀을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막내가 수능 점수를 좀 낮게 받고 나서 저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아버지 제가 부끄러우시지요?.......’ 당장 답장을 보냈습니다. ‘세상에 자식을 부끄러워하는 애비가 어디 있냐? 공부를 좀 잘하면 좋겠다는 것이지 공부를 잘하면 내 새끼고 공부를 좀 잘 하지 못하면 남의 새끼냐? 아버진 너 안 부끄러워. 공부를 좀 잘 할 수도 못할 수도 있는 것이지 공부가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

그 답장이 제 막내에게 많이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 막내는 결국 서울 시내에 있는 대학엘 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약간 떨어진 대학엘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제 막내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철이 없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 아비가 자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도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 막내가 성적이 좀 떨어져서 서울에 있는 대학엘 다니지 못하는 것을 늘 부끄러워하여 어께를 떨구고 다닌다면 무척 속상할 것 같습니다. 저는 우리 막내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자기 형들 못지않게 훌륭한 자기 일을 찾을 것이고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아이가 될 것이라고 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삶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낮은 자존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열등의식입니다. 낮은 자존감은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는데서부터 옵니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데서부터 옵니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아는 사람은 절대로 그와 같은 낮은 자존감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낮은 자존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당당하지 못하다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세상과 같은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귀히 여기십니다.

살다보면 실패할 때도 있고. 살다보면 남보다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살다보면 남에게 더 뒤쳐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죽을 필요 없습니다. 부끄러워 할 필요 없습니다. 창피하게 이솝의 여우처럼 세상을 신포도로 매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을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 볼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당당하게 ‘죠센징 가라’라고 야유하는 세상을 향하여 두 발을 굳게 딛고 ‘그래 나는 죠센징이다’ 큰 소리 한 번 지르고 세상의 담장을 넘기는 홈런으로 응수하는 당당한 크리스천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을 이사야 50장 7절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아멘.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자녀를 위하여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한 자녀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얼마나 중요하고 근사한 기도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자녀를 위하여 이 기도를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다보면 질 수도 있고, 실패 할 수도 있고, 좀 가난해 질 수도 있고, 좀 형편이 어려울 수도 있고, 좀 잘 안 풀릴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기죽을 것 없어요. 부끄러워 할 것 없어요. 삐뚤어 질 것 없어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빈정거릴 것 없어요.

하나님이 절대로 저와 여러분을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이 절대로 저와 여러분을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절대로 저와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생각하세요. 하나님께서 절대로 우리를 수치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걸고 삶으로 세상적으로 좀 성공했다고 거드럭거리지도 말고, 세상적으로 좀 실패했다고 기죽지도 말고 언제나 겸손하게, 그러나 언제나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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