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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노아의 실패(창 9: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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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영민 목사

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5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세상에는 흑인종, 황인종, 백인종 세 종류의 인종이 있습니다. 우리는 황인종에 속합니다. 이같이 세 가지 종류의 인종이 나타나게 된 것은 노아의 아들들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원래는 아담의 후손이기는 하지만 아담의 후손들은 노아와 그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노아 홍수 때 모두 멸망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모든 인류는 아무리 종족이 많고, 국가가 많더라도 결국은 노아의 후손들입니다. 노아의 맏아들이 ‘셈’, 둘째 아들이 ‘함’ 그리고 셋째 아들이 ‘야벳’입니다. 장남 ‘셈’이 바로 우리 황인종의 조상입니다. 백인들은 막내 야벳의 후손들입니다. 그리고 흑인들은 둘째 ‘함’의 후손들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신앙 초기에 큰 성공을 했고 홍수에도 살아남았습니다만 신앙 말년에 실패를 했습니다. 실패를 해서 아들 함을 저주하게 됩니다. 25절에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랬습니다. 함의 저주로 인해서 오늘날 인류 사회 전체를 봐도 역시 흑인들의 삶이 가장 어렵습니다. 물론 흑인 중에도 뛰어난 인물들이 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에 역시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나눌 때에, 흑인종들이 노예 생활도 많이 하고, ‘종들의 종이 되라’하는 노아의 저주 때문인지 그들의 삶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에 질병도 가장 많고, 가난도 가장 심합니다. 비단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를 가도 역시 흑인들의 삶이 가장 어렵습니다. 한 택시기사가 공항에서 흑인을 택시에 태우고서는 갑니다. 신호에 걸려 옆에 서있는 택시 기사 친구를 만나서 창문을 열고 얘기합니다. “어디로 가나?”그러니까 이 택시 기사가 “연탄 배달 갑니다.” “몇 장이냐?” “두 장” 흑인 두 사람 태우고서 연탄 배달 간다고 그러니까, 흑인이 내리면서 한국말을 다 알아듣고 2백원 주고 내리더래요. “연탄 2장 값” 하면서. 노아 이후에 인류 역사를 봐도 흑인들이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함의 후손 흑인들이 어렵게 된 원인은 바로 그 아비인 노아가 신앙 말년에 큰 실패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노아를 볼 때 우리가 얼마나 성경을 볼 때 장점이 많은 사람입니까? 노아는 950살을 살았는데 그 중에 노아 홍수 이후에 350년을 살았습니다. 홍수 이전의 노아는 창세가 6장 8절에 있는 대로 ‘당대의 완전한 자’ 또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이라 했습니다.

노아의 장점은

첫째, 노아는 하나님을 제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한 것이 장점이었습니다. 당대 사람들도 말로는 하나님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더 좋아했습니다. 창세기 6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당대 사람들은 하나님을 좋아한다고 말로는 해도 실제로는 여자들을 좋아하고, 여색을 쫓았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진실로 좋아하거나, 사랑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을 제일 좋아했고,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좋아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좋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장점은, 노아는 고독을 견디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노아야, 앞으로 120년 후면 홍수가 나서 인류가 멸망할 것이다. 너는 방주를 짓고, 사람들에게 방주 안으로 들어오라고 얘기를 해라”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노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잘못된 것이 아니겠느냐 해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사고, 파는데 바빠 노아의 말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신앙적인 고독을 홀로 잘 견뎌냈습니다. “노아야, 같이 놀자. 노아야, 이 딸들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하면서 유혹을 했지만 노아는 고독을 이겨내고 세상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고, 딸들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결국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때가 되면 물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다 없어지게 될 것을 노아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신앙적인 고독을 잘 견뎌냈습니다.

세 번째로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면 살면서도 교만하지 아니했습니다.

신앙생활이 남들보다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노아의 마음속에는 교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좀 남들보다 뛰어나게 하고, 남이 없는 은사나 능력 좀 받으면 교만해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물질이 많아서 교만하고, 지위가 높아서 교만하고 한 것은 고치기가 쉽지만 신앙적인 교만은 교정이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나는 남들
보다 기도를 더 잘 해. 나는 남들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야. 영성이 더 좋아” 이런 것을 한 번 마음속으로 갖게 되면 신앙적 교만이 들어오고 교정이 어렵게 됩니다. 어느 리서치 전문 회사가 어떤 목사가 목회에 성공하는지 조사를 했는데 가장 큰 요인은 ‘겸손’이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끝까지 성공하더라는 것입니다. 노아는 언제나 겸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준행하고, ‘오로지 내가 살아남는 것은 나 잘나서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된 것이다’ 생각하고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내 소원을 이루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것을 늘 생각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노력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을 좋아했다는 것과, 고독을 견뎌냈다는 것과, 신앙적으로 교만하지 아니했다는 이 세 가지 장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참 믿음의 큰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을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가 세상을 정죄했다 그랬는데 노아가 세상을 정죄하는 주체가 될 수 있습니까? 세상을 정죄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로 인해서 세상을 정죄하셨다는 겁니다. “봐라. 너희들은 물 심판을 받아도 내게 할 말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노아는 내 말을 믿고, 내 말대로 방주를 만들었지 아니했느냐. 그래서 방주에 들어감으로 홍수에서 구원을 받지 아니했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어찌해서 내 말도 믿지도 아니하고 방주도 만들지도 아니하고, 방주에 관심도 보이지 아니하고, 만들어 놓고 들어가라고 해도 들어가지 아니했느냐. 노아가 120년 동안이나 말씀을 전파하고, 방주를 만들었는데도 너희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물로 심판을 받아도 핑계할 수가 없느니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노아로 인해서 세상을 정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노아의 홍수 이후 인생은 창세기 9장 20절로 29절까지 나타난 모두 아홉 구절밖에 없습니다. 홍수 이후에 350년을 살면서 노아가 잘했다는 기록이 하나도 없습니다. 350년 동안 오직 딱 한 가지 실수한 것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20절에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라” 노아가 홍수 후에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농사가 잘 되어서 포도 열매를 많이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포도가 많아 항아리에 담아 두니까 발효가 되고, 시간이 지나니까 냄새가 좋고, 맛도 좋은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포도주를 먹어보니까 냄새도 좋고, 맛도 좋고 먹다 보니 아주 많이 마시게 되고 당연히 취했을 것입니다. 취하게 되자 곱게 자지 않고, 장막에 들어가서 벌거벗고 잤습니다. 둘째 아들 함이 장막 안에 들어와서 보니까 아비의 하체가 보입니다. 하체를 보고 나가서 두 형제들에게 “아버지가 술 취하셔서 하체를 드러내시고 주무시고 계신다. 가서 한 번 봐라”말했습니다. 그런데 맏아들 셈과 막내 아들 야벳은 어떻게 했습니까? “옷을 취해서 뒷걸음질 쳐서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덮고 얼굴을 돌이켜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했다”했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술에서 깨어납니다. 술이 깨어서 예언을 하기 시작합니다. 맏아들 셈에게 뭐라고 예언을 했는지 보세요. 26절.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황인종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종교가 나올 것이다’ 하는 예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결국은 셈의 후손인 동양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기독교가 일어난 것입니다. 기독교는 서양 종교가 아니고 예루살렘은 서양이 아닙니다. 동양입니다. 셈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셈의 후손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성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황인종들이 종교성이 강한 것이에요.

우리 한국 사람들이 아무래도 종교성이 강합니다. 이민을 가도 한국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우선 교회부터 세웁니다. 예수 믿든지 안 믿든지 교회부터 세우고 밥 먹고 그곳에서 예배드리고 믿지 않는 사람도 예배드립니다. 이것이 황인종의 기업입니다. 그런데 막내 야벳의 기업은 무엇이 되었습니까?

거기 27절을 보니까,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셨다.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셨습니다. 야벳의 기업은,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셨다.
그리고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셨다.
셈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복음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일어나 복음이 먼저 유럽으로 전파가 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야벳은 심히 창대케 된다, 경제적인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역사가 증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부를 누가 다 쥐고 있죠?
백인종들이 다 쥐고 있습니다.
영국 사람들, 조그마한 나라, 허구헌 날 흐린 나라가 세계 경제를 다 쥐고 흔들지 않습니까.
미국 사람들도 세계 경제를 쥐고 흔듭니다.
역시 야벳을 창대케 한다는 것이 하나님이 이 노아를 통한 이 예언의 말씀이 역사에 계속해서 이루어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함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비의 하체를 본 함은 어떻게 됐습니까?
거기 25절에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함을 직접 저주하지 않고 함의 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합니다.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랬습니다.
결국 흑인들은 노예가 되어서 고생한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황인종은 영권이 있어서 종교계의 주도 세력이 되었고, 그래서 우리도 이 영권을 받아서, ‘하나님, 셈에게 주신 영권을 우리에게 주셔서 이제 우리가 물질적으로는 세계를 주도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국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권리도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약속도 있는 줄로 믿는 것입니다.

이번 총회에 가니까 미국에서 미국 한인 교회 총회 총회장님이 오셨습니다.
그 분 말씀이, 미국이, 죠지 부시가 이라크를 공격을 하고 나니까 이제는 각국에서 미국 선교사들을 싫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국 총회도 미국 사람을 선교사로 안 보내고 제일 거부반응이 적은 한국 사람을 미국의 Southern Baptist Convention, 미국 침례교 총회가 한국 사람을 선교사로 모집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인 1,000명을 뽑아서 보내는 작전을 쓰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노아가 벌써 이 셈에게 예언한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한 과정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함이 저주받은 원인은 무엇입니까?
함이 왜 저주를 받았습니까?
그것은 함은 5계명을 어겼기 때문이에요.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궁극적인 원인은 노아의 실수 때문입니다.
노아가 술 취하지 않았더라면, 옷도 벗지 않았을 것이고, 옷을 안 벗었더라면 함이 아비의 하체도 안 보았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함의 저주도 없었을 것입니다.
노아가 술 깬 후에는 어떻게 했어야 마땅합니까?
함을 저주하기보다는 노아는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아이고, 부끄러워. 내가 술에 취했는가. 그래서 내가 술 취해서 옷을 벗고 잠이 들었는가. 아이고, 부끄럽네. 내가 이렇게 부끄러운 짓을 해서 내 자식이 저주를 받게 됐구나.’
자기 실수를 자책하고 함을 불러다가 “너 이 놈의 자식아. 그러면 쓰냐. 아비가 그래도 네가 부끄럽게 여기고 형님 셈처럼 했어야 되지 않느냐!”라고 새롭게 교육했어야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함을 저주하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인류 역사가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된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가 이렇게 실패한 원인은 뭐냐?
노아가 실패한 원인은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노아가 너무나 평안했습니다.
평안했기 때문에 자기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홍수가 나기 이전에는 온통 노아의 반대세력이었습니다.
반대세력이었기 때문에 노아는 홀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고, 사람들이 노아를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핍박이 있었기 때문에 노아는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께 더 메달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런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홍수 이후에 노아의 위치가 어떻게 됐습니까?
홍수 이후의 노아는 인간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이 됐습니다.
이제 노아는 아들들, 자부들밖에 없습니다.
노아를 보고 뭐라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의 공격도 받지 않고, 아무의 비판도 받지 않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노아는 누가 야단칠 사람이 없어요.
아무도 노아보고 “당신, 어째서 그런 짓을 했소!” 야단 칠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무엇을 게을리했습니까?
자기 관리를 게을리 한 것입니다.
여기서 실패가 온 것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도 어려움이 옵니다.
그런데 어려움과 핍박은 원수로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목회도 어려움이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려움이 있어서 목사도 정신 차리고, 교인들도 정신 차리고, 기도도 하고, 교회가 조금 어려움이 있어야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도 하고 이렇게 해서 해결함을 받으면 하나님 은혜 감사하다고 하고, 다른 어려움이 오면 또 기도하게 되는 것이지, 그저 오늘도 변함없고, 내일도 변함없고, 아무 문제도 없고, 어려움도 없고, 자식도 잘 되고, 모든 것이 다 잘 되면 그것이 위험한 것이에요.
우리 신앙생활에 어려움과 핍박은 원수가 아닙니다.
좋은 친구입니다.
신앙을 순수하게 만드는 그런 친구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활어회를 사는 사람들도 생선을 싣고 올 때 고약한 생선을 하나 집어 넣는다고 하더라구요.
생선 잡아먹는 상어 새끼를.
그러면 상어 새끼가 10마리쯤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10마리쯤 잡아먹히는 게 낫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고기들이 안 잡아먹히려고 도망다니고 하다가 활어가 그만 힘이 생기고, 서울까지 오면 싱싱한 활어가 되어서 좋은 값에 판다고 합니다.
그것을 집어넣지 않으면 활어들이 다 비실비실해서 오게 되고, 반값도 안 되는, 맛없는 고기가 되어서 팔아도 돈도 못 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상어 새끼 한 마리 집어넣고 10마리 잡아먹히게 하는 것이 훨씬 돈이 된다는 것이에요.

우리 기독교를 보더라도 기독교가 초기에는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콘스탄틴이라는 로마 황제가 313년에 밀라노 칙령이라는 것을 발표해서 “이제는 기독교를 핍박하지 않겠다. 기독교는 합법적인 종교가 되었다”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 이전에 핍박 받을 때는 카타콤이라는 감옥같은 무덤 속에 들어가서도 기도하고, 하나님 섬기고 복음 전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편안하고, 아무도 핍박 안 하고, 아무 어려움도 없고 하니까 그 다음에 기독교가 완전히 부패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로만 카톨릭이라는 아주 부패한 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시 종교개혁을 일으켜서 “야, 이것이 참된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이다. 말씀의 종교가 참된 기독교이니라” 이것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교회는 핍박이 오는 것이 좋습니다.
어려움이 조금 있는 것이 좋은 것이에요.

노아는 너무나 평안했기 때문에 기도도 아니하고, 관리도 아니하고, 또 영적으로 깨어 있지도 아니함으로 인해서 실패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삶이 너무 평안하십니까?
그러면 평안할 때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시고 다시 하나님을 찾아 엎드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노아는 자기와 자기 가족이 홍수 속에서도 살아 남은 것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자기도 혈육을 가진 인간이고, 다른 모든 인간들이 다 홍수로 전멸되는 상황에서 혼자 살아 남은 이유가 뭐냐, 다른 이유 아무 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하는 것을 기억하고 늘 하나님 생각하고, 하나님을 더 좋아하고, 하나님께 더 감사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농업에 취미를 붙이고, 포도 심어서 포도가 잘 나니까 거기에 취미를 붙이고, 농업에 이끌려서 농업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농업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포도주의 사람이 되고, 포도주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사람, 성령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사람이 아니고, 포도주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창세기를 아무리 봐도 노아가 홍수 이후에 350년 사는 동안에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구절은 단 한 구절도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다 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 버렸고, 포도주와 가까워지고, 농업과 가까워졌던 것입니다.
농업이 나쁜 것입니까?
농업을 농자천하지대본이라 했는데, 농업은 좋은 것입니다.
공업도 좋은 것이고, 상업도 좋은 것이고,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농업, 공업, 상업, 장사, 이런 것들에 이끌려 다니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져버리면 그 다음부터 우리 삶에는 실패가 오게 된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8절에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랬습니다.
아마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쓸 때 노아를 생각하며 썼는지 나중에 가서 물어봐야 되겠지만, 노아를 생각하며 쓴 것이 분명할 것 같습니다.
노아가 술 취해서 큰 실수해서 역사를 이렇게 바꾸어 놨으니 고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라.
노아가 세상에 너무 재미 붙이고, 영적인 면에 힘을 기울이기보다는 육적인 면에 너무 힘을 기울이고, 농업에 재미를 붙임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고, 기도도 안 하고, 말씀도 제대로 안 보고, 하나님과 교제도 제대로 아니함으로 인해서 그의 삶과 그의 둘째 아들의 삶 가운데 엄청난 비극이 초래되었다 그것입니다.
노아의 이 포도주 한 잔으로 말미암아 역사가 바뀌었어요.
‘아, 포도주 한 잔이 뭐 어떻겠느냐?’
아닙니다.
그것으로 역사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에요.
노아는 자신의 실수를 아들 함에게 전가해서 모든 저주를 부어버리고, 자기 책임도 전가했습니다.
조금 치사한 인격을 여기서 보이고 있다 그 말입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고쳐야되는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아들에게 책임 전가를 했습니다.
노아도 역시 아담의 후손이요, 원죄를 가진 인간임을 명백하게 드러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노아의 홍수 이후의 350년처럼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다시 우리가 하나님을 좋아해야 되겠고, 다시 육적인 일보다는 영적인 일에 힘을 써야 되겠습니다.
아멘.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고, 기도하는 시간도 더 늘려야 되겠고, 성경 말씀 가까이 하는 시간도 더 늘려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의 실패를 막는 유일한 비결인 줄로 저는 믿습니다.
오늘 노아를 생각하면서 여러분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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