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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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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스데반 목사 (안디옥교회)

마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오늘 말씀은 한 가나안 여인의 귀신 들린 딸이 치유되는 사건입니다. 이것을 통해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을 많은 이들이 거리껴 합니다. 예수님이 무정하고 박정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러실까?" 그것을 우리가 깊이 이해할 수 있을 때 신앙의 깊은 세계가 열려집니다. 이 여인이 끝까지 믿음을 세워 구원 받고 치유를 받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하면 믿을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찾고 구원을 갈구하는 마음이 있다 해도 예수님의 이런 박대를 견뎌낼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가나안 여인은 구원을 받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세계를 같이 보면 은혜를 나누어 보도록 합시다.

15:1절부터 보자.
15: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15: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유대인들의 지역은 광야지대라 밖으로 나갔다 오면 지저분해져서 손을 씻어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안 씻고 지저분한 상태로 바쁘게 음식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고생의 길을 갔던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합니다. 왜 손을 안씻고 먹습니까? 이게 어떻게 보면 심각한 문제는 아닙니다. 손을 씻고 먹는 것이 조상들의 전통인데 이것을 어긴다며, 이런 것까지 가지고 나와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그렇습니다. 어떤 이가 보기 싫어지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해도 싫어집니다. 웃어도 싫고 울어도 싫습니다. 잘되도 싫고 못되도 싫습니다. 눈이 한 번 꼬이면 모든 것이 다 눈에 거슬리기 시작합니다. 정상적으로 본다면 얼마나 배가 고파서 그럴까 생각할 수 있는 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밉게 보이고, 추접하게 보인 것이죠. 이것이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온 것입니다. 시대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넓고 포용력있는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매우 닫힌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쫀쫀하다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쫀쫀해 지면 안됩니다. 

15: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15: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15: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15: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여기서 말하는 유전이란, 조상대로 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여기 보면 전통, 즉 전승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전통 중에 하나가 밖에서 집안으로 들어오거나 밥을 먹기 전에 몸을 청결히 하고 손을 씻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해드릴 것을 "하나님께 바쳤다"고만 하면, 부모님을 봉양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전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 부모님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더 섬기고 공경한다는 말씀과 전통을 지킨다는 핑계를 대며 형제를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소중하고 예수님도 부모와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지만, 이 안에는 깊은 세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관심에 있어서 우선 순위를 말하는 것이지, 폐륜적인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이 가장 우선적으로 우리 삶에서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안에는 이렇게 말씀을 본질과 다르게 적용하고 끼워 맞추는 부분이 있었던 것입니다. 네가 전통을 핑계삼아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법을 어기고 있느냐? (*공동번역 마15:20-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 "밥 먹을때 손을 씻어야 하는 건 아는데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은 왜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 큰 걸 봐야 합니다. 더 궁극적인 것을 보아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생각지 않고, 손 씻지 않은 것 가지고 뭐라고 하는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이 삐뚤어진 시각에 대해 "위선자"라고 책망하십니다.

15: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경건치 못하고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적용하는 모습. 대적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이런 모습으로 인해 예수님이 사역하시는데 피곤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먹이고 살리려고 오셨는데, 그들은 그런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밥 먹는 데 손 씻지 않는 것까지 시비 걸었는데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얼마나 하나 하나 문제삼고 대적을 했겠습니까? 그로 인해 예수님께서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그들의 대적과 반발로 인해 예수님께서 선교를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들과 역사를 같이 만들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마15: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예수님께서 이로 인해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셨습니다. 더럽고 위선적인 그들과의 싸움을 피하기 위해 유대를 떠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 지방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지역이고, 메시야에 대한 소망도 없었던 곳인데, 이곳에 주님께서 가신 것입니다. 얼마나 갈 데가 없으시면 이런 곳까지 가셔야 했겠습니까? 두로와 시돈지방에 가야 하는 이 예수님의 암담함. 이 이방의 땅에서 주님이 쉼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안에는 준비된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은 마음에 상처가 있었습니다. 마음의 큰 충격을 받으셔서 유대를 떠나 이방의 가나안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서글픔이 있었습니다. 믿는 자들 안에 믿는다고 하지만 상처주고 통분하게 하는 이런 모습들, 이것이 우리 안에는 없습니까? 예수님이 마음의 큰 아픔을 가지고 싸움을 피하기 위해 이방의 땅으로 물러나게 되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나안 땅에서 귀신들린 딸을 둔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신의 딸을 낳게 해달라고 예수님을 귀찮게 합니다.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가나안 여인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뒤에 보면, 예수님께 끈질기게 달라붙고 따라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총을 간구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이 여인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알아봤습니다. 그리스도임을 알아봤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그토록 메시야를 기다려오던 유대인들은 예수님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했는데 그리스도를 모르고 기다림의 약속도 가지지 못했던 가나안, 저주받은 그 땅의 한 여인이 구원을 간청하러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놀라운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의 부르짖음에 대해 어떻게 하셨나?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낯설게 보입니다. 우리가 아는 다정다감한 주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15: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제자들도 매우 냉정했습니다. 여인이 뒤에서 소리를 지르니까 귀찮았던 것입니다. 제자들 안에도 이곳 가나안으로 올 수 밖에 없었던 데 대한 괴로움이 있었고, 유대인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많이 날카로워져 있는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제자들 안에 너무 매정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한 말씀 하지 않으셨고, 제자들 안에도 여인을 향한 긍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예수님 뒤를 따라오면 끈질기게 불쌍히 여겨주시고 자신의 딸을 구원해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예수님은 자신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구원하기 위해 온 자"라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를 먼저 찾는 것이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확고했습니다. 사람을 키워도 그렇고, 학교도 등급이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가 있는데 오늘 말씀도 아는 사람이 들어야 하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이해도 안되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공부해도 그렇죠? 처음부터 어려운 것 하면 못 알아 듣습니다. 영적 수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같이 가는데 신앙 없고 믿음 없는 사람 데려가면 너무 힘이 듭니다. 깨닫게 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전혀 신앙이 없었던 이방의 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하나님을 헌신하고 자신의 많은 것을 바친 사람들은 더 큰 진리를 사모하고, 그것이 나타나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1년 가르쳐도 못 알아듣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내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확고했습니다. 이방인들도 전도해야 하지만, 먼저 믿는 자들에게 소중한 진리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내면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구원하기 위해 내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해하기 쉽지만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이런 자들을 찾으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선택한 백성,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한 자들, 신앙을 가졌던 자들을 찾아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만들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의 서글픔과 안타까움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이 주님을 거부하고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눈물 흘리시는 이유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교만해지고 불경건해져서 사사건건 주님 앞에 머리들고 대적하는 모습들, 이것으로 인해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나?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이런 강한 자기 확신과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여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얼마나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입니까? 그러나, 여인은 여기에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또 한번 와서 이야기 한다. 절까지 하며 말한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 여인안에 끈질김이 있다.

15: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요구를 한 번 더 멸시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다. 밥이 있으면 떡이 있으면 자녀에게 먼저 주지 개들에게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이 맞는 말이지만, 이 말 듣고 이 여인이 얼마나 충격받았겠습니까? 자기를 개취급하니 얼마나 서러웠겠습니나? 그러나, 이 말 앞에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여인의 대답은 어떠합니까?

15: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15: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그게 옳다는 것입니다. 주님 옳습니다. 나를 개취급하는 것이 옳습니다. 저를 그렇게 여긴다 할지라도 할말이 없습니다. 여인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개들도 주인이 상에서 주는 부스러기라도 먹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겸손한 마음, 낮은 마음을 가진 자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상에서 잘 차려주시는 음식을 먹는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라기라도 먹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런 자세로 주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했다면, 주님을 만나볼 수 있었겠습니까? 끝까지 주님에게 끈질기게 은혜를 구했겠습니까? 여기서 나타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사람을 멸시하고 한없이 매정하기만 하신 분이십니까?

이 여인의 믿음을 봅시다. 이 여인이 왜 주님 앞에 나왔습니까? 다름 아니라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딸을 반드시 고쳐야 겠다는 마음으로 주님이 주시는 멸시와 천대를 이겨낸 것입니다. 내가 어떤 멸시를 받아도 이 딸을 고치고 말겠다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에 주님께 끝까지 마음으로 간청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몹시 감동시키지 않겠습니까? 세상에는 스스로의 이익과 잘됨을 위해서 비굴해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 이렇게 심한 모욕을 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낮아질 수 있겠습니까? 이 여인은 그 딸을 고치고자 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간절하게 구할 수 있습니까? 영혼을 향한 사랑이 있을 때 끝까지 구하고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체면은 생각지 않습니다. 병에 걸린 아들을 고치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부모들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고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의사가 아닙니다. 암이 걸리거나 병에 걸리면 의사에게 고쳐달라고 합니다. 의사가 가망이 없다고 해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사람의 목숨이 죽음에 쳐하면 고칠 수 있는 자에게 치유해 달라고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만큼 인간의 생명은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시고기란 책이 있는데 병에 걸린 아들을 낫게 하고 싶은데 돈도 없고 방법이 없어서 아버지가 고민하다 자신의 안구를 기증하고 자녀를 고치려 합니다. 이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이며,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여인 천대했지만 오히려, 여인보다 더 간절히 그 여인의 딸을 고쳐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왜 멸시하고 천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셨습니까? 그녀의 겸손한 모습을 보기 원하셨고, 믿음을 보기 원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간절함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끈질겨야 한다. 주님이 우릴 멸시천대해도 마땅하다는 여인의 가난한, 그리고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 앞에 많은 이들이 상처받고 돌아갑니다. 그것은 그들의 교만함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찾았는 데, 기도하고 눈물 흘렸는데 왜 나를 멸시하시나? 나를 버리시나 보다. 내가 밤낮 울부짖었는데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구나. 그런 생각으로 인해 우리는 좌절하고 넘어진다.

그러나 여인이 가진 겸비한 마음 가지고 "내가 마땅히 그렇게 여김 받을 자이지. 구원 받을 자격 없지."라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나를 치유해 주실 것을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눈만 멀뚱하게 뜨고 생각 없이 앉아 있으면 안됩니다. 자리만 채우려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면 안됩니다. 내 인생의 많은 문제를 치유해달라고 간절히 구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는 자에게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길가 밭에 씨를 뿌리면 튕겨져 나갑니다. 먼저 그의 마음 안에 믿음이 있어야 하고, 낮아지고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왜 그러시나? 우리 안에 교만하고 거짓되고, 나를 향한 자랑과 자기 의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깨어지고 부셔져야 합니다. 이런 마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없고, 은혜가 임할 수 없습니다.

운동 열심히 하면 갈증이 나고 물이 먹고 싶은 것처럼, 정말 갈급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줘도 좋고 안줘도 좋아"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에게는 무엇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멸시 천대해도 치유받아야 겠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나아오는 자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높아진 마음이 있다. 마땅히 이런 대접 받아야 한다는,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건 우리 자신입니다. 구원의 권능이 주님께 있고, 주님이 날 건지시는 것입니다. 그분앞에 간절히 무릎 꿇어야 하는데, 그분을 종처럼 부리고, 내가 하는 말은 뭐든지 다 들어줘야 하는 것처럼 항상 잔치상의 상석에 앉은 자와 같이 대우해주기를 바라는 모습이 될 때, 즉 주님과 나의 자리가 뒤집히는 순간,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여인과 같은 모습이 살아 있을 때, 이런 마음을 가질 때 우리가 변화되고 주님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날 버리시고 외면한다 해도 끝까지 부르짖고 붙잡는 자를 받아주십니다. 이런 마음이 없는 자는 결코 주님을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을 봐도 지나칩니다. 그런 자에게 주님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대화했지만 그들은 주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어리석어 보이고 아무 힘도 없는 초라한 자로 비춰졌습니다. 그래서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함께 만들어가야 할 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해 논쟁을 벌이고 그를 비난하고 그를 무시하고 멸시 천대하고 깔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눈에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다윗의 자손으로 보인 것입니다. 그 여인의 눈과 바리새인의 차이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겸손이었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내립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낮아지는 자,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복이 내립니다.

주님보다 내가 지혜있고 뛰어나면 왜 이자리에서 말씀을 듣고 있겠습니까?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있다면, 왜 그리스도를 찾겠습니까? 내가 더 훌륭한 데, 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어떤 자세가 필요합니까? 내가 낮아지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런 찬양을 부를 때 은혜가 임합니다. 벌레 만도 못하다고 여기는 자가 아니면 말씀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자는 말씀을 듣지 않고, 판단만할 뿐입니다. 이런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필요없고, 그 가르침이 필요없습니다. 나보다 주님을 높이 두지 않고, 판단하고 측량한다면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신앙의 길에 이런 시험이 있다. 주님께서 나를 멸시하고 천대하고 버린 것 같은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처참한 십자가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시고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이면 그렇게 비참하게 죽이면 안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십자가의 죽음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매우 처참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죽는 것을 누가 가만히 보고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내려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주의 십자가, 그 수치와 조롱 가운데 그의 살아하는 독생자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하늘 문을 닫으셨습니다. 매정하게 돌아서시고 주님을 버리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향해 원망의 마음을 품을 수 있었고, 서러움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조롱거리로 죽이시는 하나님을 향해 서운함을 가질 수 있었고, 하나님을 버리고 신앙을 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건지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죽음이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내 인생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서 내 인생은 끝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을 수 없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믿었고, 버림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붙드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의 진정한 믿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리는 어떠했나? 만물을 다주시고, 그를 세상의 주인의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소중한 자리였지만 그 안에는 감사함이 없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의 길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의 자리, 그 험한 자리에서까지 하나님을 믿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름답고 찬란한 사랑의 세계를 여셨습니다. 이런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다. 진리, 참된 것은 모두 영원합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이 여인은 어떻게 구원의 은총 받았나? 주님이 날 버리셔도 난 주님 붙잡겠다는 간절한 믿음있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은 영원히 믿어야 할 분이고, 끝까지 붙들어야 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이 나를 천대할지라도,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살아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셨듯이, 예수님은 이 여인을 무시하고 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결박해서 죽여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다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아버지가,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실 수 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잠잠히 순종했던 이삭처럼. 믿을 수 없는 자리에서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놀라운 진리 나타났을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놀라운 은총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어떠합니까? 매우 놀랍고 뜻밖입니다. 그리고 기이하고 생소합니다. 마치 여인에게 멸시와 천대를 하셨던 주님의 모습처럼, 매우 거리껴지고 기이하고 때로는 충격적이고, 때로는 가슴 시리게 다가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치 불타는 강을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그것이 진정으로 참이라고 믿을 때 끝까지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또 믿음으로 그 세계를 보지 못하면 돌아서게 되어 있습니다. 주저 앉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총과 진리의 세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면, 주님의 시험 앞에서 우리는 넘어지고 맙니다. 우리 안에 진리를 진리로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보화와 진주를 발견하면,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사듯이 모든 것을 주고 사야합니다.

불교에서는 출가를 해서 스님이 되려 하면, 처음부터 받아주지 않습니다. 스님이 한 말씀도 안하고 안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시키는 것이 밥짓고 나무 베오고 빨래 하는 일등의 궂은 일입니다. 그런 일만 계속시킵니다. 이것을 이기지 못하면 제자로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열심히 일을 하면,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나 던집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런 말처럼. 이렇게 한마디 던져도 못 깨달으면 계속 다시 밥짓게 합니다. 불교에서도 이렇게 높은 권위를 가지고 제자를 가르칩니다. 내가 도를 닦으로 왔는데 밥 지으러 왔나 생각하는 생각이 들고 불평이 생기면 떠나면 됩니다.

하물며, 진리 중의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우리는 얼마나 더 큰 권위와 위엄을 가지고 말씀을 전해야 겠습니까? 이 멸시와 천대를 이겨내지 못하는 자는, 참된 진리를 알 수 없고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자는 정말 그 진리를 찾고자하는 자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함부로 말씀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진리에 대한 자세가 있는 자, 믿음이 있는 자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늙은이나 청년들, 아이들, 남종이나 여종이나 차별없이 내리는 성령의 은혜로 다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세계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 말씀은 깊이 묵상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간절하고 열심있는 마음으로 하나라도 더 알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상 밑으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고자 하는 간절함과 가난함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의 모든 문제가 치유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리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 우리가 몸부림 쳐야 합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고 버림울 받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진리에 대한 자세, 말씀을 주는 이에 대한 자세, 예수님과 하나님을 향한 자세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쉽게 말씀을 듣고 말씀을 전해주는 자에 대한 감사함과 경외함이 없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나를 가르쳐 줄 목자에 대한 사랑이 없이 그를 함부로 여기고 무시하고 인도자를 서럽게 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 물주는 자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가 물을 주지만, 그 물을 주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물을 주는 자를 만홀히 여기는 교만함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가 될 때 우리가 가나안 여인과 같은 모습을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겸손한 마음과 눈물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어먹어야 할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복은 하나님에 달린 것인데, 내가 잘나서 받은 복이니 복을 취하고 받는게 자신에게 달린 건인지 알고 '복줘도 좋고 안줘도 좋아'하면서 살아가게 될 때, 신앙이 점점 이상해 집니다. 엉덩이에서 뿔이 납니다. 복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사라져 갑니다. 교만해져서 함부로 주님 판단하고 자기 입맛에 맞는 주님 찾는 것입니다. 내가 구할 때는 나타나야 하고, 내가 기도만 하면 반드시 들어주셔야 하고, 내가 부탁하는 것은 반드시 해주셔야 하는 그런 자세로 주님을 종처럼 만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종같이 낮아지셔 발 씻어주시지만, 그가 그렇게 낮아지신 것은 우리도 그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섬김의 마음이 사라질 때 신앙이 위기에 처하고 신앙의 성장을 이룰 수 없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신앙이 어린 자들에게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또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한 마디 하면 함부로 판단하고 원망하고 토라지고 매정하다고 비판합니다.
우리 말씀 듣는 자들 안에 겸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아이를 보면, 울면 와서 엄마가 와서 젖주고 그 아이가 필요한 대로 다 해줍니다. 아이는 어머니를 종처럼 부립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힘이 없어서 종이 된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종이 되어주신 것이죠. 이것을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주님 우리 밑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예수님의 자리와 나의 자리를 바꾸지 말고, 예수님을 예수님의 자리에, 나를 나의 자리에 놓아야 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예수님의 자리와 이 여인의 자리에도 서서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겠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세워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 주시는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과 감사함 가지고 가면 복이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주님 앞에 나와 구원 받는 사건인데 마태가 인상 깊고 기이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큰 믿음 보이는 사람들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의 길을 가기 바라고 이런 믿음의 사람을 키우기 바랍니다. 이 세계를 잘 가르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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