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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랑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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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옥 목사 (성천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축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그가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아 주셨습니다.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심 가운데 우리에게 부활의 산 소망을 갖고 살아가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한다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된 신앙, 죽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성경은 이미 선언했습니다.

참된 신앙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과 영향력을 끼치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신앙생활보다는 행동하는 신앙,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했습니다. 행동하는 신앙을 주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영생의 문제를 던진 데서 비롯됩니다. 여기 율법사는 율법을 가르치는 학자를 말합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박식한 지식을 가진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 대해 훤히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며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원리를 물으셨습니다. 이때 율법사는 거침없이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절).
이때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지금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치신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율법을 행한 대가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율법을 행할 책임이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사에게 율법을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동반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약2:17). 교리를 알고, 성경 몇 구절을 아는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받게 됩니다(엡2:8).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반드시 믿음의 행동이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사는 성경적인 지식은 탁월했지만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는 잘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께 다시 '그러면 내 이웃은 누구오니이까?' 질문을 던집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강도 만난 자의 비유를 들어 유대인의 형식적이고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을 비판하면서 참된 성도의 모습을 선한 사마리아인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랑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참된 이웃일까요?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여리고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를 심하게 때리고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그는 거의 죽게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길로 한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또 레위인이 그 길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으로 바로 살라고 지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을 그냥 피하여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강도가 두려웠고 자신이 위험을 당할 것 같아 우물쭈물할 수 없었습니다. 또 자신들이 가진 것을 주기가 싫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강도 만난 그 사람을 못 본체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또다른 한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람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천박한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상종을 하지 않았고 공공연히 무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가 여리고 길로 가다 강도 만나 심하게 상처를 입은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도저히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려가 강도 만난 자의 상처를 싸매어 주고, 상처를 포도주와 기름으로 치료한 후 자기 나귀에 싫고 주막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정성스럽게 그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자신의 일이 바쁜 그는 주막 주인에게 치료비까지 주면서 잘 돌보아 달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친절이요 자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말씀을 들려주신 후에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참된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참된 이웃이겠습니까? 가까이 산다고 무조건 다 참된 이웃인 것은 아닙니다. 혈통적인 가족이라고 다 참된 이웃인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질문을 받고 율법사는 "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이 때 주님께서는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을 덧 붙히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는 4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관심한 사람이 있고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해자는 많은 사람을 못 살게 구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해치며 괴롭게 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피해자는 길을 가는 행인입니다. 남에게 이용당하고 상처받고 희생을 당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주변에는 수많은 피해자들이 강도 만난 자처럼 괴롬을 당하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피해자를 두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변에서 부딫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상처받은 사람을 위해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이익만 생각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희생하며 달려가서 자기의 시간과 재물을 투자하며 피해자를 돌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을 싸매어 주는 멋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이웃으로 비쳐지고 있습니까?
우리 믿음의 사람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며 필요한 것을 베풀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작은 자 하나를 귀히 여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2. 우리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성경 요일3장에 보면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라면 궁핍한 자를 돕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히 죽어야 할 우리들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독생자까지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소유한 사람이라면 이웃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은 말로만 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것을 희생하여 상대방을 도울 수 있는 진정한 베품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사마리아인의 정신입니다.
이웃 사랑에 대한 진정한 시금석은 그가 얼마나 이웃 사랑을 말하고 있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진심으로 그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돕고 있느냐 하는 진실과 행위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웃의 필요를 민감하게 깨닫고 자신의 재물로 돕는 것은 이웃 사랑을 몸으로 참여하는 신앙적인 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절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라는 말씀과 같이 말만 앞세우고 실제로 필요한 것을 전혀 주지 않는다면 그의 말은 그림의 떡과 같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게된 것은 신앙에 대한 이론에 설복이 되어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된 이유는 성경 내용을 믿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교인들의 불친절과 추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행함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베푸는 우리들의 작은 사랑도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실천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 사랑을 감사하면서 우리도 작지만 생활 속에서 사랑을 실천할 때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 사랑입니다. 우리도 나가서 행함과 진실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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