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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소망 (롬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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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목양제일교회)

저는 어제 신문에서 매우 충격적인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OECD 가입국 가운데서 4위를 차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수를 가지고 정하는데, 헝가리가 24.3명으로 1위이고, 핀란드가 20.4명으로 2위이고, 일본이 20명으로 3위이고, 한국이 18.1명으로 4위의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자살 증가율에서는 우리나라가 1%로, 0.61%인 멕시코나 0.44%인 일본을 크게 앞질렀습니다.

좋은 일에서 앞서야지 자살률이 세계 4위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학자들은 자살의 원인을 생물학적, 정신적, 사회학적, 정신장애 등 여러 측면에서 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자살의 가장 큰 원인은 희망의 상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희망이 있으면 어려운 시련을 만나도 끝까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이 만 달러를 웃돌지만, 한국동란이 끝나던 1953년도에는 67달러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약 10년 후인 1962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87달러였습니다. 그리고 1975년에는 574달러가 되었습니다. 오늘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리만큼 가난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자살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못 사는 가운데서도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희망이란 것이 요즘 사람들처럼 좋은 주택이나, 고급 승용차나 명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보리밥을 먹는 데서 쌀밥을 먹게 되는 것이거나, 단칸방을 벗어나서 좀 더 넓은 집으로 옮기는 것이거나, 자식들 상급학교에 진학시키는 것 정도였습니다. 먼 곳에서 물을 길어오지 않고 수도가 나오는 집에서 사는 것도 그 당시 한국인들의 희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희망을 많이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희망이 많으니까 생활이 고달파도 죽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와 비교하면 요즘 한국인들은 대단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경제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도 웬만한 가전제품을 다 갖추고 삽니다. 쌀밥에 고깃국을 먹습니다. 작년 통계에 의하면, 국내 승용차 보유 대수가 1,000만대를 넘었다고 하는데, 이는 1.4 가구 당 1대 꼴에 해당합니다. 과거에 비할 때 얼마나 부자가 된 것입니까! 그런데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서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희망의 주머니가 비기 시작했습니다. 어제까지 열심히 살아온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오늘 와서 낙심하고 자살이라는 파국을 택한 것은 그가 가졌던 희망이 무용지물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사람이 이 세상에 희망을 두면 언젠가는 실망할 날이 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소망은 세상 사람들이 가진 소망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절망적인 일을 만나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오늘 저는 그리스도인이 가진 소망이 어떤 것인지 성도님들과 함께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하나님께 근거한 소망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일컬어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의 근거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재물에 소망의 근거를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재물이 항상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 재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17)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19)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 6:)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 권력을 소망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은 십년은 고사하고 5년을 유지하기도 어렵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지혜와 재주, 건강, 완력 따위를 소망의 근거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3)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4)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5)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변합니다.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낡고 쇠하는 방향으로 변합니다. 순수한 상태에서 오염된 상태로 변합니다. 정돈된 상태에서 흐트러진 상태로 변합니다. 생기발랄하던 상태에서 무기력한 상태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들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국 실망할 날이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영원하다 함은 불변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이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또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영원토록 불변하신 하나님을 소망의 근거로 삼고 계시면 “아멘!” 하십시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망을 실현하고도 남는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그 다음,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의 근거를 두는 것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능력이 부족할 뿐 아니라, 성실성이 없는데도 그 원인이 있습니다. 약속을 지킬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성실성이 부족하면 믿고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실하기가 한량없으신 분이시므로 하나님께 소망의 근거를 둘 때 후회할 일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우주의 운행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광활한 우주에 무수한 별들이 정해진 궤도를 질서정연하게 운행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어떤 행성 하나가 궤도를 이탈해서 지구와 부딪히기라도 한다면 온 인류가 멸절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이제껏 생긴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계절의 순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순환이 단 한 번의 착오가 없이 지속되기에 농부가 봄철에 밭에 나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공해로 찌든 대지에도 봄이 되면 어김없이 꽃이 피고 싹이 납니다. 인간들의 타락상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성실하게 대하지 않으실지라도 우리로서는 할 말이 없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으로 악을 갚지 아니하시고 변함없는 성실을 베풀어주십니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소망 찬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남 왕국 유다가 우상 숭배로 인해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강대국인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을 보내어 유다를 징벌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많은 귀족과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왕과 백성이 다 같이 절망에 빠져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12)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14)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도무지 희망이 없고 보이는 것이라곤 절망밖에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성도들에게 소망을 부어주십니다. 어찌 보면, 인간들에게 절망적인 상황이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일하시기에 적합한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불기둥, 구름기둥의 인도에 따라 행진하다보니 어느덧 홍해 가에 이르렀습니다. 앞에는 넘실대는 홍해가 놓여 있고, 좌우와 뒤에는 끝없이 황량한 벌판입니다.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갇혔다는 보고를 듣고는 마음이 변해서 특별병거 600승과 애굽의 모든 마병을 거느리고 추격해 왔습니다. 뽀얀 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병거 구르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진동합니다. 이를 본 이스라엘 자손은 심히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그러나 모세는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바다 위로 내밀었더니 홍해가 갈라졌고,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사이에 난 길을 걸어서 무사히 건넜습니다. 그러나 뒤 쫓아 들어왔던 바로의 마병들은 모두 다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것은 아무리 절망적인 형편 가운데서라도 성도들은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한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시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놓치시는 바람에 우리가 낭패를 당하는 일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혹시라도 낙심 중에 있는 분들이 없으십니까? 소망의 하나님을 앙망하시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기도하심으로 위대한 소망을 부여 받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소망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금이라고 다 같은 금이 아니고, 순도에 따라서 여러 등급이 있습니다.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망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진 소망은 세상에 속한 것이어서 그 내용이 세속적이고 정욕적이고 물질적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소망은 하늘에 속한 것이어서 거룩하고 경건하며 영적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이 가진 소망은 일시적이나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소망은 영원한 것입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에게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라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처럼 불쌍한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므로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데 힘씁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려다 보니 세상의 즐거움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합니다. 따라서 만일 내세가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잘못된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서 인생을 재미없게 보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를 믿는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보증서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어 한 줌 흙이 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신령한 몸으로 부활해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24)

둘째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설 때 칭찬과 상급을 받을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경주에 출전한 선수와도 같습니다. 어느 종목을 막론하고 선수는 상을 바라고 경기에 임하듯이, 그리스도인들 역시 상을 바라보고 일해야 합니다. 계시록 22장 12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장차 심판대에 설 때, 우리는 각자 이 땅에 살  적에 행한 대로, 칭찬과 상급을 받든지, 책망과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구원을 받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주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은 집이 불타 무너지기 직전에 건짐 받은 것처럼 겨우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을 위해 충성하고 헌신한 성도들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7)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직분에 충성한 자들에게 이르기를 “…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 5:4)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다니엘은 예언하기를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받게 될 상급을 바라고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실 상급을 소망할 때 우리는 예수 믿는 일로 받는 핍박을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이 땅에서도 형통한 삶을 살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은 이 땅에서 잘 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받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되 언제나 이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현세적인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삶 전체를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할 것은, 행복한 삶은 재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행복의 기준을 재물의 많음에 두지 말고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가에 두어야 합니다.

시편 84편은 고라 자손의 시인데,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10)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 사람들이 무슨 방법으로 성공하고 부자가 되든지 부러워하지 마시고, 그들의 방법을 흉내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서 이 땅에서도 잘되고 형통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에게 복을 주셔서 은혜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 뜻대로 순종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러한 성도들에게 의식주의 문제로 걱정하며 살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물질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주시지 않겠습니까?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물질적인 복을 받기 원하시거든 하나님께 드리는데 힘써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로 8절에 보니, 농사짓는 것에 견주어서 이같이 말씀합니다. “6)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우리에게 물질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복된 삶을 위해서 올바른 물질생활을 할 것을 명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십일조입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재화는 알고 보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수고해서 얻었을지라도 그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득 가운데서 십분 지 일만 하나님의 창고에 들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십일조를 바칠 때 풍성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바치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을 아깝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십일조, 감사 헌금 드리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몸을 드려 봉사하는 것을 아깝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우리의 삶에 온갖 좋은 것을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는 혼란하기 이를 데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신문과 방송 매체가 전하는 뉴스를 대하면 희망을 주는 메시지보다는 낙심케 만드는 내용이 훨씬 많습니다. 세상에서 소망을 찾으려 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마음의 눈을 ‘소망의 하나님’께로 향하시기 바랍니다. 언뜻 보기에는 이 세상이 강대국의 손에 좌우되고, 소수의 정치가와 재벌 기업가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천지의 주재시며,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며,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심을 믿으시고 하나님을 여러분의 소망의 근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전 13:13)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 세 가지 가운데 당당하게 소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소망이 귀하고 필수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6장 19절에는 소망을 ‘영혼의 닻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시험과 역경과 유혹의 풍랑이 밀어닥칠 때, 우리가 할 일은 소망의 닻을 소망의 하나님께 견고하게 내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님 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히 변치 않는 소망을 붙드심으로 날마다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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