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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히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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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상훈 목사 (승동교회)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우리나라 일제시대 때 서대문구 충정로 있었던 동양 극장은 연극 전용 극장으로서 상당히 유명했습니다.
한번은 동양 극장에서 "단종 애사"라는 사극을 공연한 적이 있었습니다. 꽤 인기가 좋았습니다. 많은 관객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극장 측은 대단히 좋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 당시 왕실의 사무를 맡아보던 곳에서 극장 사장을 불렀습니다. 사장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왕실로 불려 갔습니다.  왕실의 사무를 보는 사람은 다짜고짜 사장에게 호통을 쳤습니다.
"아니 어떻게 딴따라들이 감히 왕실의 일을 흉내 낼 수 있단 말이냐? 무엄하도다. 이는 왕실을 모독하는 처사이다. 그러니 당장에 그 공연을 중단하도록 하여라."
왕실의 호통 소리에 결국 그 연극은 더 이상 공연되지 못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왕실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그런 일로는 결코 호통을 치지 않으십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우리가 배우지를 못했다고 해서, 우리가 돈을 못 벌어서 가난하게 산다고 해서, 우리가 건강을 지키지 못하고 병들었다고 해서 우리를 결코 호통을 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호통을 치시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너는 왜 믿음을 갖지 않았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을 때 우리에게 향해서 야단을 치십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낌없이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셨는데도 누군가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향해서 호통을 치시는 일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나룻배를 타고서 큰 강을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많이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룻배를 타고서 강을 건너다가 좀 무료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사공을 향해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혹시 철학에 대해서 좀 아는 바가 있소?"
그러자 사공은 겸연쩍은 듯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 같이 무식한 사람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좀 안 되었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 인생의 4분의 1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소."
그러면서 그는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과학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소?"
사공은 기가 죽은 듯한 모습으로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그 역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사공을 무시하는 듯한 어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 되었소. 당신은 당신 삶의 절반을 헛 산 것이나 다름이 없소."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돌풍이 불어서 나룻배가 뒤집혀졌습니다. 두 사람이 깊은 강물 속에 빠졌습니다. 이번에는 사공이 그를 향해서 물었습니다.
"선생은 많이 배우셨으니까 수영하는 법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는 허우적거리면서 다급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니요. 나는 헤엄치는 법을 모르오."
그러자 사공은 혀를 끌끌 차면서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면 선생은 선생 인생의 전부를 잃었소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철학을 논하고, 과학을 논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막상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길이 되는 믿음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결국은 영원한 멸망에 던지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원한 생명은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 인간의 선행으로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오직 믿음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기생 라합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의 믿음이 더욱더 돈독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히11장은 믿음 장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 믿음 장 속에는 빛나는 별같은 신앙의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라합도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라합의 경우 히11장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특이한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다는 사실이었습니까? 그것은 정답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11절에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믿음을 우리에게 소개를 해 준바 있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는 모세의 부모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비록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요게벳도 역시 여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35절 말씀을 보십시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역시 여자들이 믿음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라합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사실은 특이한 점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라합의 특이한 점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입니까? 물론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여리고 성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서 구원을 얻은 최초의 이방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의 강조점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라합의 이름 앞에 하나의 수식어를 덧붙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라합이 기생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히11장에 기록된 다른 사람을 살펴보면 아무에게도 그 이름 앞에 수식어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예컨대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족장 아브라함은"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애굽의 총리 요셉은"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출애굽의 영웅 모세는." 등등의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요셉은, 믿음으로 모세는"이라고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유독 라합 만큼은 그의 직업과 신분이 기생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술을 팔고, 웃음을 팔고, 자기의 몸을 파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합의 이름이 빛나는 별같은 신앙의 위인들 사이에 당당히 들어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 66권 가운데 라합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성경이 4권이나 됩니다.

첫째, 여호수아서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수2장을 보면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한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6장을 보면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그와 그의 가족이 구원함을 받는 내용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둘째, 마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 속에 그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등장합니다. 마1:5에 의하면 라합은 뒤에 이스라엘 사람 살몬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 두 사람 사이에서 보아스가 태어났습니다. 베들레헴의 유지였습니다. 보아스는 나중에 룻과 결혼했습니다. 보아스와 룻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오벳이었습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았습니다. 이새는 다윗 임금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의 자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을 했습니다.
셋째, 오늘 본문 히11:31에 나옵니다.
넷째, 약2:25에 나옵니다. 사도 야고보는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기생 라합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렇듯 한 사람의 이름이 신구약의 66권 가운데서 네 번씩이나 나타난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한 가지,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물론 하고 누구라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적인 지위가 어떠하든지,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시고 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에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를 야단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가지 우리에게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십니다.

시카고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디엘 무디가 하루는 집회를 끝내고 나서 교인들과 함께 악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무디와 악수를 하던 한 사람이 무디의 손을 꼭 쥐더니 감격스러운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제가 위대한 이토록이나 하나님의 종을 직접 뵙고 그 손을 잡고서 악수를 하게 되니 이처럼 무한한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서 무디가 빙그레 웃더니 손을 놓고서 허리를 굽혀서 땅에 있는 흙 한 움큼을 쥐었습니다. 그리고 나더니 손가락을 펴고서 흙을 아래로 내려보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저는 보잘것없는 이 한 줌의 흙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영적인 견지에서 보면 기생 라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들만 잔뜩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백성으로 영광스럽게 삼아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직 한 가지입니다. 비록 작은 믿음이지만 우리의 믿음을 귀하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귀한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오로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우리의 믿음에는 행함과 순종과 실천이 따라야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전시에 적의 정탐꾼을 영접한다는 것은 죽어 마땅한 큰 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 라합은 자기 집을 찾아온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해 주었습니다. 그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또 그들이 무사히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습니다.
어떻게 기생 라합이 목숨을 걸고서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는 "믿음으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여리고 성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뚝 서 있는 자기들의 견고한 여리고 성벽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벽을 믿은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자기와 자기의 가족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서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약2:25∼26에서 사도 야고보는 라합의 믿음을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믿음에는 행함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행함으로 입증되지 않는 믿음은 참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하루는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한 앉은뱅이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보면서 베드로의 마음에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걸을 생각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면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나는 일어나 본적이 없기 때문에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앉아서 구걸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우리 삶의 현장 속에 살아 역사 하기 위해서는 그에 따르는 순종과 실천과 행함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초신자가 목사님 앞에서 세례 문답을 받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성도님은 오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 초신자는 의외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확신에 찬 음성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믿습니다. 저는 지금 죽더라도 얼마든지 천국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좀 놀랐습니다. 어떻게 초신자가 저런 분명한 믿음을 가질 수가 있는지 내심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또 물었습니다.
"만일 공산당이 성도님의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면서 예수님을 믿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그 초신자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저는 총에 맞아 죽더라도 끝까지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목사님은 매우 놀랐습니다. 목사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성도님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십일조 생활은 잘하고 계시겠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큰소리 뻥뻥 치던 그 초신자는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아직은 십일조 생활을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다. 강도가 와서 우리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습니다.
"돈 내놔. 있는 것 다 내놔. 안 그러면 찔러 죽이겠다."
그럴 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돈은 다 가져 가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그것이 정상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안 됩니다. 못 줍니다. 내가 비록 칼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가진 돈은 한 푼도 못 가지고 갑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분명 비정상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순교하겠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십일조 생활을 제대로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그의 신앙고백은 진실성을 결여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기생 라합처럼 행함이 따르는 믿음, 행함으로 입증되는 믿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살아 역사하는 참 믿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위태로운 순간에 자기의 목숨을 걸고 자기의 믿음대로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했습니다. 이렇게 실천력이 있는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며,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찾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철저하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기생 라합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라합의 믿음은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하신 그대로 라합의 믿음은 그 자신을 살렸습니다. 아울러 그의 가족들도 구원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영광스럽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그들의 이름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 구원의 상을 주십니다. 축복의 상을 주십니다. 영광스러운 상을 주십니다.

어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경쟁자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러한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한 청년이 아주 작은 차를 타고서 시골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몹시 나빴습니다. 비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차를 몰고 가다가 어느 시골 동네 어귀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곳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는 세 사람이 비를 맞고서 초초한 모습으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자신의 차에 한 사람을 더 태울 수 있었기 때문에 차를 멈추었습니다.
청년은 차를 세우고서 그 세 사람을 가만히 눈여겨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병들어 신음하고 있는 할머니였습니다. 또 한 사람은 의사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의사는 과거에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자기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 다른 한 사람은 묘령의 아가씨였습니다. 그 청년이 지금껏 찾아오던 이상형의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의 차는 너무 작아서 단 한 사람만 태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설명이 주어진 후에 드디어 질문이 던져졌습니다.
"만일 당신이 이러한 경우를 만났다면 당신은 세 사람 중에서 누구를 태우겠습니까?"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우수한 성적으로 입사한 어떤 사원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저는 제 자동차의 열쇠를 의사 선생님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의사 선생님이 그 병든 할머니를 얼른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잘 치료해 드릴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저는 제가 찾던 이상형의 여인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대답입니까? 소위 말하는 win-win입니다. 다 이기는 것입니다. 나도 좋고, 너도 좋고, 다 함께 좋은 것입니다. 다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은 회사뿐만 아니고 어떠한 단체든지 큰 유익을 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생 라합의 믿음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그의 믿음으로 인해서 두 정탐꾼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으로 인해서 자신만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와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축복속에 영광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그 이름이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먼저 우리 자신이 살고, 우리의 가족이 살고, 우리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사는 축복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풍성한 삶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가 축복의 통로, 축복의 샘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인해서 우리 주변의 천하만민이 다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2004년 6월 6일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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