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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기초와 장식 (히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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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이용호 목사 (영천교회)

  건축을 해보니까 기초공사가 중요하고 또 어렵다 하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공사는 기초공사가 있고 인테리어가 있습니다. 기초공사, 골조공사는 다 기초입니다. 그런데 기초공사는 안 보이는 부분입니다. 기초공사나, 골조공사는 건물을 다 지어놓고 나면 보이지 않습니다. 장식은 다 보입니다. 그런데 이게 거꾸로 되면 안됩니다. 기초공사가 보이든지, 골조가 보이든지 하면 그것은 부실공사입니다. 또 인테리어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도 부실공사입니다. 인테리어는 보이는 것이고, 기초공사는 안 보이는 것인데 이 두 가지가 매우 중요한 공사입니다. 아무리 기초공사, 골조공사를 잘 했다 하더라도 장식이 맞지 않는 건물은 보기 싫습니다. 또 아무리 겉이 화려한 장식을 해도 속이 부실하면 그 건물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건축을 할 때는 첫째로 늘 안정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뉴스에 보면 공사하다가 사고가 난 기사가 많이 나옵니다. 조금 공사가 지연되더라도 사고가 없어야 됩니다. 안전성을 가지고 건축을 해야 되고 또 집을 지을 때는 늘 안정성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만약에 집을 백 채 건축을 해도 한 집이 무너져버리면 그 백 채를 건축한 사람의 명예와 물질과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물은 지어놓고 항상 효용성이 있고 보기가 좋아야 됩니다. 보기 좋은 건물, 다시 말하면 만족한 건물이 되어야 합니다.

  어느 교회는 4년 전에 입당을 했습니다. 그 교회 장로님은 그 건물에 대해서 불만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배당 입구를 잘못 만들었다, 교육관 구조를 아주 잘못했다, 음향이 영 마음에 안 든다, 그래서 오천만원을 더 들여서 리모델링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음향 하나에도 그런 잘못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건물은 지어놓고 사용할수록 마음에 들어야지 입당할 때부터 불만이 생기고 쓸수록 불만이 생긴다면 그것은 잘못 지어진 건물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은 건물의 안전성이나 효용성이나 만족감, 이런 것은 전부 설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설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생활도 기초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한국교회의 선교 2세기를 통과하는 이 시점에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기초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일본 명문대 출신 유학생이 독일로 공부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우등생이던 학생이 독일에서는 낙제를 했습니다.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는 것입니다. 시험지 답도 잘 썼고, 자기가 볼 때는 장학생도 충분히 되겠는데 낙제가 된 것입니다. 교수를 찾아가서 면담을 했습니다. 교수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는 내가 가르친 것에 대한 답은 다 적었네. 그런데 너의 답안지에는 너의 생각과 너의 답이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내가 낙제를 줄 수밖에 없다”라고 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의 교육은 아직도 선생님이 가르친 답을 쓰면 우등생이 되고 장학생이 됩니다. 그러나 서구의 교육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너의 답을 적으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가르친 답은 물론이지만 너의 답을 적어라, 그만큼 사고를 요하고 수능을 요한다는 것입니다.

  하버드에 입학한 한 학생의 스토리를 보면 이 학생은 빈민가에서 자랐습니다. 노숙도 예사로 합니다. 집에 가면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는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아이의 꿈이 뭐냐 하면 하버드에 들어가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자기 처지는 도저히 하버드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하버드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뉴욕 할렘가에서 굶주리면서 자라난 이 한 소녀가 그런 큰 꿈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알려져 하버드에서 그를 신입생으로 받았습니다.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이 학생이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꿈을 가지고 있고, 이 어려운 환경을 지금까지 견딘 그 사실만 가지고 이 학생은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그 가능성을 보고 입학을 시킨 것입니다. 이와 같은 스토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기초를 중요시하는 이 서구의 발전된 교육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사람은 이렇게 겉은 멀쩡하게 살지만 우리 일생을 보면 기초가 있고 장식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부인할 수가 없는 기초가 있습니다. 이것을 저가 네 가지로, 그리고 우리 인생의 인테리어를 네 가지로 구분을 해서 설명을 드려 보고자 합니다. 가정의 달에 우리는 자녀교육에 대해서, 부모공경에 대해서, 또 가정의 행복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는 달입니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할 때는 기초를 생각해야 되고 그 기초에 근거한 장식을 생각해야 됩니다.

  인생의 기초들

  인생의 기초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두뇌입니다. 두뇌가 부정할 수 없는 인생의 기초입니다. 지능지수, 아이큐라고도 합니다만 이 두뇌는 재능도 포함이 되는 영역입니다. 두뇌가 타고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기초입니다. 두뇌 기초가 인생에 그만큼 중요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개발시켜 가느냐 하는 문제는 다음 문제이고 타고난 두뇌가 우리 인생에 부인할 수 없는 기초라고 말을 합니다. 

  두 번째 기초는 근면성입니다. 여러분, 부지런함도 타고나는 것입니다. 천성적으로 게으른 놈은 도리가 없습니다. 옛날이야기입니다만 뒷산에 땔감이 수북하게 쌓여도 겨울에 냉방에서 떨고 자는 놈이 있다고 합니다. 옛날 농경사회의 풍경입니다. 옥수수대를 베다가 불을 넣으면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는데 그것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르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놈은 소낙비가 와도 뛸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타고난 근면성은 중요한 기초입니다.  근면성은 인생의 성실함과도 연관이 되고, 이 근면성이 있는 사람은 수고의 값을 치를 줄 압니다. 공짜의식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대가를 압니다.

  세 번째 인생의 기초는 집중력입니다. 주도적이고 탁월성과 성취감을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나 집중력을 가지고 성취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경우의 사람들은 이 방면에 예사로 생각을 합니다. 책을 한 권 읽어도 제대로 읽어야 됩니다. 건성으로 읽으면 책을 열 권 읽어도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집중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세상적인 지식은 실제로 그 분량이 굉장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대해서 지금 너무 무지합니다. 우선 성경책 찾는 것부터가 정말 저럴 수 있나? 교회를 2, 30년 다녔다면서도 성경목록을 아직도 못 찾습니다. 대단히 곤란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드라마 이름은 잘 압니다. 몇 시에 무슨 드라마 하는지는 환합니다. 그런데 성경목록은 그렇게 안 되는가 봅니다. 제발 집중해서 익히십시오. 몇 페이지인지 일러주지 않으면 오리무중입니다. 빌립보서를 출애굽기 가서 더듬거리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성경을 읽을 때 집중력을 가지고 읽으십시오. 한 장을 읽어도 제대로 집중해서 읽으십시오. 산만하게 10장을 읽는 것보다 집중해서 1장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집중력이 도저히 안 되어 있는 사람, 기초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리 교육시켜도 안 됩니다. 아무리 훈련시켜도 안 됩니다.

  축구선수 가운데 홍명보씨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축구선수 중 성공한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차범근씨와 홍명보씨입니다. 그런데 이 홍명보씨가 대학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는데 아주 시야가 넓을 뿐 아니라 게임에 집중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히딩크가 월드컵 팀을 구성할 때 나이 많은 최진철, 홍명보, 김태영 이런 사람들을 발탁했는데 바로 그것입니다. 게임의 집중력이라는 것입니다. 게임이 끝날 때까지 이 게임을 이길 수 있다는 승부감과 집중력, 그것이 히딩크에게 합격이 된 것입니다. 

  네 번째가 소명의식입니다. 요사이 많이 사용하는 용어 중에 ‘정체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의 정체성이 뭐냐? 우리의 정체성이 뭐냐, 정당의 정체성이 뭐냐? 한나라당의 정체성이 뭐냐?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이 뭐냐? 이 말을 굉장히 많이 사용합니다. 소명감이 곧 정체성입니다. 총선이후에 정당들이 정체성에 대한 논란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이냐? 우리당은 정체성을 확고하게 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한 달도 안 되었는데도 지금 방향을 잃고 있습니다.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정당들이 지금 무엇에 에너지를 다 소모하고 있느냐 하면 국민을 위해서, 민생을 위해서, 경제를 위해서 라며 회담할 때 제목은 그렇게 걸어놓고는 실제로 지금 정당들이 자기들 치장하는 것입니다. 차기대권 후보가 누구니, 누가 장관이 되느니, 누가 총리가 되느니 하는 그게 민생하고 관계되는 일입니까? 소명의식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소명의식에 기초가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안됩니다. 소명의식은 바로 믿음을 믿음 되게 합니다. 내가 믿음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소명의식이 살아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소명의식이라는 것을 먹어야 꽃이 피는 활력을 얻는 것입니다. 성경에 “자원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자원하는 예물” “자원하는 마음” “자발성” 그 자발성이 어디서 옵니까? 소명감이 있기 때문에 옵니다. 부모의 소명감 때문에 자녀들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소명감이 없으면 희생이 안 됩니다. 소명감은 그렇게 중요합니다. 이게 믿음의 기초입니다. 우리 인생의 기초입니다.

  인생의 인테리어

  다음에 인테리어를 한번 들어보면 앞의 것과 연결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인테리어가 무엇이냐? 첫째, 친밀성이라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친절인데 이 친절은 천성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훈련하는 것입니다. 백화점 점원들은 날 때부터 친절한 사람만 뽑은 게 아닙니다. 훈련입니다. 경상북도 모 병원 스토리가 요즘 화제입니다. 그런데 그 병원이 그렇게 두각을 나타낸 결정적인 요건은 그 병원에 한번 갖던 환자들은 직원의 친절에 감동을 받고 무조건 그 병원이 최고라고 평가를 해주는 것입니다. 이 친밀성은 우리 인생의 인테리어입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을 “따뜻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친밀성을 방해하는 최고의 변명은 바쁘다는 것입니다. 바쁘다는 핑계가 친밀성을 다 빼앗아 가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남을 배려하는 일을 포기해 버립니다.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을 포기합니다. 친밀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어떤 사람 앞에 인사를 친밀히 한다는 그런 개념 정도가 아닙니다. 이 친밀성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내게 끌려오게 하는 것입니다. 영향력을 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테리어는 창조성이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발전입니다. 제너레이터가 되라는 것입니다. 자동차에 물을 뿜어내는 제너레이터가 있습니다. 카피어가 되면 안됩니다. 복사전문가가 되면 안 됩니다. 카피어가 아니라 제너레이터가 되어야 합니다. 살아갈수록 아주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남의 것만 흉내 내다가, 남이 한 것 박수만 치다가 가는 인생이 되기 쉽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내가 박수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인생의 인테리어는 정직성이라고 가르칩니다. ‘정견’과 ‘선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견은 바른 의견, 선견은 남보다 한걸음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정견과 선견이 묶어진 게 정직성이라고 했습니다. 장기, 바둑을 둘 때 후수가 있고 선수가 있습니다. 선수를 두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후수는 곤란한 것입니다. 지금 정수를 두어야 되는데 놓쳐버렸습니다. 선수는 한번만 두어도 100%, 200%의 효력을 가져오지만 선수를 놓친 사람은 두 수, 세 수를 둬야 겨우 방어가 됩니다. 그렇게 두는 동안에 다른 건 다 놓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정견, 선견을 놓치기 때문에 언제나 위선과 거짓을 가지고 발라 맞추는 것입니다. 인생은 후수를 두면 안 됩니다. 후수를 두는 사람은 언제나 변칙을 해야 되고 여기에는 위선과 온갖 수단방법이 가리지 않는 거짓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왜 거짓말을 하고, 왜 옳지 않는 방법을 동원합니까? 선수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정견, 즉 무슨 생각을 하더라도 바로 해야 되고, 남들이 생각 못하는 것을 한 걸음 생각하는 이 선견이 있는 사람의 생각은 진주처럼 빛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꾀를 부릴 필요도 없고, 여러 가지 거짓된 방법을 동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선견으로 가는 사람은 정직하게 가도 일이 됩니다.

  다음에 이 네 번째가 새겨둘 만한 교훈입니다. 용기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을 지금 잘못되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되돌아보는 것, 머뭇거리는 것, 치우는 것입니다. 다 좋은데 머뭇거리다가 인테리어를 망칩니다. 성경도 이것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특히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머뭇거리는 것을 책망을 많이 했습니다. 또 선지자들이 입을 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게 치우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치우치면 장식을 망칩니다. 머뭇거리면 인생을 망칩니다. 신앙은 용기가 있어야 성장하고 발전해 갑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용기가 얼마나 소중하냐 하면, 다 갖추어져 있는데 용기가 없어서 일이 안 되는게 공동체 안에도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교회라든지, 교단이라든지 하는 기독교공동체를 보면 화려한 조직과 규칙과 슬로건이 있지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용기 있게 뛰어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거기에서 모든 일들이 다 용두사미로 끝나는 그런 현실을 보게 됩니다.

  가정의 기초와 장식

  오늘 우리는 가정의 기초를 생각하고 가정의 장식을 한번 새롭게 가다듬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정은 소명의식이 있는가? 무엇을 위한 가정인가? 누구를 위한 가정인가? 왜 내가 가정을 가지고 사는가? 가정의 소명의식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리고 집중력과 근면성,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재능, 이것이 우리의 기초가 되는 조건들입니다. 소중히 발전시켜야 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친밀성, 창조성, 정직성, 용기가 나타나야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인테리어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요즘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내 신앙을 치장을 하고 우리 가정을 치장을 하고 있는가? 진정으로 사철에 봄바람 부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극복을 해야 될 게 있습니다. 현대가정의 위기를 전문가들이 이렇게 진단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람이 우선이 아니고, 가족이 우선이 아니고, 일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가정은 우선권 1순위가 되어야 하는데 이 가정이 사업에 밀려 버리고, 명예에 밀려 버리고, 다른 가치 때문에 가정이라는 이 가치가 밀려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일을 좇아가다가 가정이 망가져 버리고 다른 것을 좇아가다가 가정이 망가져 버립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가정이 무너져 버렸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의 소명은 목회입니다. 저가 아무리 목회를 잘한다 해도 저의 가정이 무너지면 그 목회는 절대로 성공이 안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1순위가 가정이어야 됩니다. 에덴동산이 얼마나 좋은 곳입니까? 그런데 아담, 하와의 가정이 범죄하니까 에덴동산도 실낙원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국가고시에 합격을 해도, 가정이 무너지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금메달을 땄다 할지라도 가정이 무너지면 그 명예도 헛된 것입니다. 가정이 우리의 삶의 1순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를 하고 가정에 구역예배가 은혜롭게 드려지고, 성도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오고가고, 가정에 복음의 향기가 풍기는 그런 가정으로 우리의 가정을 인테리어를 해야 됩니다. 영적인 인테리어를 하자는 것입니다.

  러시아 격언에 보면 “아들이 항해를 할 때는 부모가 한 번 기도해라, 아들이 전장에 나갈 때는 부모가 하루에 두 번씩 기도해라, 그러나 아들이 결혼을 하고나거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생활을 바로 하는 게 전장에 나가 전투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입니다. 항해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이 가정을 위해서 영적으로 무장을 해야 된다는 교훈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 하와는 인류의 첫 가정입니다. 그 가정에, 그 집에 무슨 가구가 있었는지, 그 집에 어떤 장식을 하고 있었는지는 우리가 모릅니다. 그러나 영적인 면에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가정에 무엇이 있었는가? 그 기초가 무엇인가? 첫째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입니다. 아담, 하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말씀만 순종하면 모든 것에서 자유합니다. 그리고 그 에덴에는 질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금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되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과 자유와 질서의 표본이 에덴에 있는 첫 가정에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도의 가정에도 이 세 요소로 인테리어가 장식되기 바랍니다. 우리 믿음을 자랑해야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 안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하나님 말씀만 따라가면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낌이 없습니다. 왜 이 눈치, 저 눈치 자꾸 봅니까? 말씀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선로를 놓쳐버린 기차처럼 좌충우돌 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을 따라서 우리는 자유로워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성도는 자유가 있습니다. 여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할 줄 아는 질서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금하는 것을 용납하면 영의 질서가 깨어져 버립니다. 은혜의 질서가 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는 사실은 하나로 묶어져 있는 요소입니다. 우리들에게 이 건축의 원리처럼 보이지 않는 기초와 보이는 장식이 서로 격이 맞고 이것이 조화를 이루면서 건물이 영구히 지탱되어 가는 것처럼 되어야 합니다.

  맺는 말

  우리가 짓는 성전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어떤 변화가 와서 어떤 상황이 될지는 예측 못하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건축물은 앞으로 최소한 50년은 써야 되고, 길게는 100년까지도 써야 됩니다. 2, 30년 정도가 아닙니다. 50년 동안 써도 집답고, 50년 동안 보아도 아름다운 집이 되도록 우리의 정성과 우리의 헌신이 거기에 들어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저절로 그런 집이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내 피땀과 내 눈물을 바친 집이라야 볼수록 아름다운 집이고 은혜로운 집이 되는 것입니다. 기초공사, 힘들게 하는 이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기초공사는 힘들게 해야 됩니다. 장식도 힘들게 해야 됩니다. 그래야 두고두고 보고 쓰고 해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만족을 주는 은혜의 성전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개인 신앙도 그와 같은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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