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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소유된 존재 (고전 6: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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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목사 (영암교회)

누군가를 내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누군가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훨씬 행복한 것을 아십니까? 내 사람이 누구인가? 에 관한 생각보다 내가 누구의 사람인가? 에 따라 나의 행복도 가치도 의미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나의 소유권이 내게 있는 것보다 나보다 훨씬 더 크고 강한 분에게 나의 소유권이 넘겨지는 것이 더욱 안전하고 평안한 것입니다.

어느 노부부의 이혼

육십이 넘은 노부부가 성격 차이를 이유로 이혼을 했습니다. 성격차이로 이혼한 그 노부부는 이혼한 그날, 이혼 처리를 부탁했던 변호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주문한 음식은 통닭이었습니다. 주문한 통닭이 도착하자 남편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날개 부위를 찢어서 아내 할머니에게 권했습니다. 권하는 모습이 워낙 보기가 좋아서 동석한 변호사가 어쩌면 이 노부부가 다시 화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내 할머니가 기분이 아주 상한 표정으로 마구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지난 삼십년간을 당신은 늘 그래왔어. 항상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더니 이혼하는 날까지도 그러다니... 난 다리 부위를 좋아한단 말이야. 내가 어떤 부위를 좋아하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 당신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 아내 할머니의 그런 반응을 보며 남편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날개 부위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위야. 나는 내가 먹고 싶은 부위를 삼십년간 꾹 참고 항상 당신에게 먼저 건네준 건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이혼하는 날까지." 화가 난 노부부는 서로 씩씩대며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각자의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집에 도착한 남편 할아버지는 자꾸 아내 할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정말 나는 한 번도 아내에게 무슨 부위를 먹고 싶은가 물어본 적이 없었구나. 그저 내가 좋아하는 부위를 주면 좋아하겠거니 생각했지. 내가 먹고 싶은 부위를 떼어내서 주어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아내에게 섭섭한 마음만 들고... 돌아보니 내가 잘못한 일이었던 것 같아. 나는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사과라도 해서 아내 마음이나 풀어주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한 남편 할아버지는 아내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핸드폰에 찍힌 번호를 보고 남편 할아버지가 건 전화임을 안 아내 할머니는 아직 화가 덜 풀려 그 전화를 받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전화를 끊어버렸는데 또다시 전화가 걸려오자 이번에는 아주 밧데리를 빼 버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잠이 깬 아내 할머니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지난 삼십 년 동안 남편이 날개부위를 좋아하는 줄 몰랐네. 자기가 좋아하는 부위를 나에게 먼저 떼어내 건넸는데, 그 마음은 모르고 나는 뾰로통한 얼굴만 보여주었으니 얼마나 섭섭했을까? 나에게 그렇게 마음을 써주는 줄은 몰랐구나. 아직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인데... 헤어지긴 했지만 늦기 전에 사과라도 해서 섭섭했던 마음이나 풀어주어야겠다"

아내 할머니가 남편 할아버지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지만 남편 할아버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전화를 안 받아서 화가 났나, 하며 생각하고 있는데, 낯선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전 남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남편 할아버지 집으로 달려간 아내 할머니는 핸드폰을 꼭 잡고 죽어있는 남편을 보았습니다. 그 핸드폰에는 남편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보내려고 찍어둔 문자 메세지가 있었습니다. "미안해. 사랑해."

얼마나 안타까운 내용입니까? 사랑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나타난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내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고 사랑한다는 고백과 함께 행복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참된 사랑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소유권이 이전된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사실은 나의 생명, 나의 시간, 나의 재산이 내 것이 아니고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순간부터 이런 소유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순간부터, 우리의 소유권이 하나님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너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장 9절)” 이것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부지런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사야서 43장 1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의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고전 6장 20절과 7장 23절은 전혀 다른 말씀이 아니라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똑같이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외아들의 목숨과 나의 생명을 바꾸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만큼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아무렇게나 내 삶이 의미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아무렇게나 값없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우리가 값비싸게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셨으니,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며, 두 번째는 고전 7장 23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사도바울은 아주 자랑스럽게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셨으니,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며 하나님의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1장 10절의 말씀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를 결단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부인해야 합니다.

첫째, 나는 주인이 아니고 내주인은 하나님이다

내 몸은 주인을 잘 만나야 합니다. 내 몸의 주인을 나로 삼으면, 우리는 결국 망하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위대한 지도자요, 가장 안심하고 우리의 생을 맡길 수 있는 위대한 주인이십니다.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면, 참된 자유함이 있고 참된 평안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보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지 마시고, 오직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둘째, 내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사람은 빈손으로 왔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소유를 위해 살지 않고, 믿음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셋째, 나는 내 마음대로 살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면 안 되는 사람들이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주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것을 다신 한 번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것으로 삼아주셨으니 기쁨으로 오직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예배생활   

예배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하나님을 영적으로 깊이 만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예배생활이 지속될 때 사람들은 예배를 통해서 오히려 심령이 더욱 굳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거룩한 은혜의 감화도 없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실천을 강요받고 행하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들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우리의 영적 삶 속에서 회복되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욕심은 하나님도 해결할 수 없다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난과 싸우는 사람도 있고 재물과 싸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가난을 이긴 사람은 많지만 재물에 이긴 사람은 드물다." 가난은 인간이 해결할 수 있지만 욕심은 하나님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욕심을 한도 끝도 없어서 하나님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몸값을 치르고 사신 바 되었는데도 우리 인간은 끝도 없이 계속해서 욕심을 부리며 살고 있는 셈입니다. 

이제는 교인들에게 전도해야 할지 모르는 시대가 온듯합니다. 그만큼 교회 안에 불신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믿다가 교회를 그만두는 사람들, 사람을 믿다가 사람에게 실망하는 사람들, 목회자를 믿다가 목회자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향한 기본적인 믿음의 결여라고 생각합니다.

간혹 시험에 들어 있는 교우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옆에 동행하던 분들이 하시는 말이 동일합니다. "목사님, 이분이 옛날에는 믿음이 엄청났습니다. 기도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만 시험에 들어 이런 것입니다"  본래 그 분이 믿음이 대단하다가 시험에 들어, 믿음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예, 믿음이 없었던 것에 가까운 것인데 다만 믿음 비슷한 것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믿음을 정금 같다고 했습니다. 순금은 변하지 않습니다. 진흙에 파묻어 두어도 금이고 망치로 두들겨도 금입니다.

한결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즈음, 슬프게도, 교인들에게 예수를 믿습니까? 라고 확인하고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제대로 믿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교회에 열심을 낼 수 있고, 경건의 모양을 갖출 수 있다는데, 위장된 믿음의 함정이 있습니다. 비슷한 것과, 같은 것은 다릅니다. 비슷한 믿음이라고, 진짜 믿음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 안에 열심이 있기는 하지만, 열심 자체가 믿음은 아닙니다. “왜 열심인가? 그리고 열심의 뿌리가 어디인가?” 는 더욱 중요합니다. 영적 센스가 믿음도 아닙니다. 영적지식이나 영적 용어를 사용함이 믿음도 아니며 영적인 것을 사모함도 믿음의 본질은 아닙니다. 물론 신령한 체험 그 자체가 믿음도 아닙니다. 기복이나 형통함이 믿음은 더더욱 아닙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그분을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은 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죽으라고 믿어야 변질이 없습니다. 살라고 믿기에, 못살게 되면 믿음의 갈등과 낙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에 대하여 죽고, 사람에 대하여 죽고, 과거에 대하여 죽고 고통에 대하여 죽고, 원수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나 교회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어릴 적부터 믿었던 믿음도, 주를 향한 열심도, 엄청만 헌금과 헌신도, 금식과 기도도 중요하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기본을 갖추는 것인데 기본이란 그리스도 예수를 내 구주로 믿고, 그분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이 기본이 안 되었기에 범사가 삐걱거리는 것입니다. 시험에 드는 것도, 상처 받는 것도, 약속을 안 지키는 것도, 열심을 내지 않는 것도, 교회를 사랑하지 않음도 믿음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건축을 할 때 기초를 제대로 쌓지 않으면 아무리 높이 아름답게 쌓아도 그 건물은 부실공사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떤 신앙의 행위도 위선이며 포장이며 가식이 되어 버립니다. 언젠가는 믿음의 부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왜? 사람보고 실망할까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 때문에 상처를 받을까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믿는 사람들, 사람을 믿는 사람들, 기복을 믿는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급하고 바빠도 기초 없이 건물을 지을 수 없듯이 우리도 이와 같이 믿음의 기초가 없으면 모든 면에 부실이 생기고 균열이 생기게 마련이고 결국은 무너집니다. 교회가 문제가 아니고 환경이 문제도 아니며 사람이 문제도 아니고 목회자도 그리 큰 문제도 아닙니다. 나의 믿음 없음이 문제입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나의 믿음 없음을 알지 못하고 자신은 믿음 있다고, 믿음  좋다고 착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풍랑일고 태풍불면, 뿌리 없는 작은 나무는 뽑혀 버리듯이 반드시 이해득실의 문제에서 해가 되거나, 주님으로 인하여 떡이나 기적이 안 생기면, 믿음의 뿌리는 송두리채로 뽑혀 버리고 맙니다. 믿음은 그렇게 시시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랑도, 불이 태우지 못하며 물이 침몰치 못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이랴? 다니엘의 믿음은 죽을 줄로 알고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참새는 어디서나 언제나 짹짹거립니다. 여기서는 짹이고, 저기서는 찍이고, 이때는 쪽이고 저때는 쭉일 수 없습니다.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공사는 반드시 부실공사이듯이 하루아침에 시험에 들거나 무너지는 믿음은 그 본질 자체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에 불순물을 섞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대안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기본은 믿음입니다. 누구를 믿는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사람을 믿고, 하나님을 믿기에 목회자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교우들을 믿어야 합니다. 기적을 믿거나 축복을 믿어서는 언젠가는 실망합니다. 기적을 베푸시며 축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어 드려야 합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돌아가서라도 기본으로 가야하고, 억울하고 분해도 다시 믿어야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식입니다. 사실은 그 말 때문에 우리의 세상이 이렇게 엉망이 된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예수를 믿으면 안 되고 제대로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모로 가면서 서울 가는 식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어둡고 교회는 세상에 영향력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이 있다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영적인 믿음이 있다면 그렇게 살수가 없습니다.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라면 그렇게 원망할 수가 없습니다. 기복과 상관없는 믿음, 응답과 상관없는 믿음, 형통과 상관없는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실로 대단히 영향력 있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불신자 전도로 바빠야 하는데, 교인들 전도로 출혈이 심하면 되겠습니까? 하루 속히 교회 안에 불신자가 줄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보화

성전은 깨끗케 함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주하심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과 태도로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되셔서 우리의 전 존재를 조절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오직 한 가지 일, 즉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단순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순종하는 영혼은 매일 새롭게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장과 강건함, 즐거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여러분 안에서 그 구원자,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 위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열망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혼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과 영혼이 증가되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성령이 들어오시도록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앞에서 깊은 신뢰와 완전한 복종으로 우리 자신을 포기할 때 이것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주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것을 다신 한 번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것으로 삼아주셨으니 기쁨으로 오직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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