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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으로 속건제를 삼을꼬 (삼상 6: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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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요한 목사 (평안의교회)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사랑하시고,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는 여러분들에게 바른 믿음, 바른 신앙을 주신 것인 줄 믿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생각하면서 오늘 이 시대에 지도자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아스돗, 가드, 에그론 도시를 번갈아 가지만 법궤를 탈취하고 전쟁에 승리의 노획물로 삼아서 기분 좋게 시작됐던 그들의 법궤 퍼레이드는 그들의 섬기는 신상 다곤이 무너지고 깨지면서 그들의 생각이 빗나가기 시작을 했고, 도시를 옮겨보지만, 옮겨가는 도시마다 독종 재앙으로 그들이 견딜수 없게 되면서 결국 그들을 법궤를 돌려보내는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7달 동안 법궤가 이스라엘 땅에 있으면서 그들은 7년, 70년 금하는 기간만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들에게도 지도자들이라고 위치를 가지고 있던 이들이 있었기에 백성들이 그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할꼬, 어떻게 보낼꼬 고민하고 우리에게 가르쳐 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지도자라면 당연히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마땅히 주의 종은 그렇게 시작하는 말씀 중에 잘 가르쳐야 한다고 하는 부분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가르치지 못하는 지도자, 잘 가르치지 못하는 지도자는 이미 지도자의 자격에서 실격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블레셋 백성들은 그들이 지도자라고 세워놓은 제사장, 당연히 다곤 신전의 제사장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길흉을 알려주는 복술자들을 불러서 자신들에게 가르쳐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3절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신에게 법궤를 이스라엘 땅으로 돌려보내라’ 어떻게 보낼 것인가? 그냥 거저 보내지 말고 무엇인가 답례를 해서 보내라. 여기까지는 잘 가르친 것 같습니다. 우리 풍습에도 누군가가 선물을 가져오면 그냥 보내지 않는 좋은 풍습이 있습니다. 개업을 하거나 이사를 하면 주변에 떡을 해서 돌리기도 하지요. 그러면 그 떡을 담아 주었던 그릇을 빈 그릇째 돌려주지 않고, 조그마한 정성을 담아서 그릇을 가지러 왔을 때 돌려보냅니다. 뚜껑이 있는 냄비 같은 거면 그 속에 작은 정성을 담아서 보내면 받는 사람이 푸근해 지지요.

그게 주며 받으면 이웃의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 블레셋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를 법궤를 무섭다고 돌려보내기만 해서는 안 된다. 보내는데 반드시 거저 보내지 말고, 우리가 이 것을 처음에는 전쟁의 전리품으로 빼앗아 왔다고 좋아했지만, 이것은 정말 잘 못된 것이니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어야 하지 않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것 보니까 하나님 앞에 잘 못하면 속건제, 속죄제라고 하는 제사를 드리던데, 너희들도 이 법궤를 돌려보내면서 속건제의 제물을 준비해야 할 거다.

어떻게 준비합니까? 그들은 4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블레셋 방백의 수대로 다섯을 준비해라. 너희들이 걸렸던 독종의 모양으로 금 독종 다섯을 만들고, 땅을 어지럽히는 쥐 모양의 다섯 쥐 형상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속건제를 삼아라. 모양은 독종의 모양이고, 모양은 쥐의 모양이지만, 쉽게 이야기 하면 금 덩어리지요. 금덩어리를 다섯 개씩, 다섯 개씩, 열개로 만들어서 법궤를 돌려보낼 때 수레에 같이 실어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르치고 있는데, 여기까지는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흉내를 비슷하게 낸 것 같습니다. 복술자들이 하는 생각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없었습니다. 과거에 구약에도 보면 노예를 내어 보낼 때 빈 손으로 내어 보내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15장에도 보면 노예를 내 보낼때는 빈 손으로 내어 보내지 말며 반드시 손에 무엇인가를 쥐어주라고 그랬습니다.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출애굽할 때 430년동안 생활하면서 많은 세월을 노예로 종으로 살았지만, 그들이 출애굽할 때 애굽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손에 금은 패물을 쥐어서 빈 손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과거의 풍습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을 준비하는 것은 그러한 차원보다는 하나님 앞에 잘 못된 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제물의 성격이었습니다. 다섯을 준비하라는 의미는 블레셋의 큰 도시가 다섯입니다. 아스돗, 가사, 아스글론, 가드, 에글론, 성경에는 이 다섯 도시 중에 세 도시가 법궤를 옮기다가 큰 독종 재앙으로 징계를 받았는데, 다섯 도시, 다시 말하면 블레셋 전체가 하나님의 손길에 항복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전체적인 항복, 무조건적인 항복을 의미한다고 신학자들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6절을 보면 블레셋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에 과거 역사를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에 당시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다.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팍해 한 것 같이 너희들은 강팍해 져서는 안된다. 바로가 강팍해서 10가지 재앙을 자초한 후에야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준 것 같은 그런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보내는 것은 결정이 되어졌고, 보내면서 속건제의 제물도 정해 졌는데, 그러면 방법은 어떻게 해야 할까? 새 수레를 만들라. 첫 번째 수레를 보내는 방법으로 새 수레를 만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도 물건을 실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재목으로 수레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아마 그들이 새로운 수레를 만들라고 한 이유는 부정하지 않은 것, 한 번도 부정한 물건을 실어 보내지 않은 것으로 수레를 삼음으로써 법궤를 실어 보내는 그들의 충성과 그들의 마음을 표시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멍에를 매어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수레에 매라고 했습니다. 어미소를 수레를 끌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부분에서 어떤 생각을 갖습니까? 저는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블레셋 지도자들이 순수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5장까지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재앙을 받으면서 이것은 여호와의 힘, 하나님의 손길의 능력이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처음 타고 온 신상이 자빠졌을 때만 해도 우연하게 생각했는데, 그 다음날 다시 세워놨는데, 팔 다리 목이 다 부러진 걸 보면서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도시, 도시를 옮기면서도 독종 재앙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여호와의 손이 함께 한거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을 인정해서 그리고 보내기로 결정했고,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정성을 다하여서 보내는 방법을 생각하던 중에 또 다시 인간적인 생각, 불신앙적인 생각이 들어왔어요. 하나님 앞에 우리 자세가 순수해야 하는데,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인정하면서도 또 중간에 가서 하나님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건강한 소 한 마리 선택해 다가 했으면 좋았을 텐데, 송아지가 딸린 암소를 선택했습니다.

인지상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방금 송아지를 낳은 어미소는 젖이 퉁퉁 불어서 그 송아지가 가까이 있어야 안전하고, 송아지도 당연히 어미소 옆에 있어야 평안한 것입니다. 그것을 강제적으로 송아지를 떼어서 끌고 갔습니다. 얼마나 송아지가 울었겠어요? 그 소가 울면서 눈물 흘리는 거 아십니까? 그 어미소는 자기 새끼 송아지가 딴 데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에 상처가 있었겠어요?

그러면서 그 블레셋 지도자들이 생각해 낸 것은 이 새 수레에 젖 나는 어미소를 수레를 끌게 하면 필경은 자기 새끼 송아지가 있는 곳으로 이 어미소가 수레를 끌고 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다. 그러나 어미소가 새끼 송아지를 두고도 벳세메스로 이스라엘 지경으로 간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손길이요, 우연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자. 얼마나 지금 그들은 잔꾀를 부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당연한 것이면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고, 당연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손길로 치자고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잘 이해가 안 되면 이런 비유를 들면 이해가 쉬울 거예요. 만약에 동쪽에서 해가 뜨면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고, 서쪽에서 해가 뜨면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이 함께한 것이다. 이렇게 믿자. 이렇게 제안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어미소가 송아지를 찾는 것이 당연하고, 송아지가 어미소를 찾는 것이 당연한데, 그들은 그렇게 잔꾀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맞아서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신의 상징으로 이스라엘에게 돌려 보내야겠다고 생각 할 때만 해도 순수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일이 되어가면서 그들은 또 하나님을 테스트 하고 싶었어요. 하나님을 시험하고 싶었어요.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여러분들이 주님의 일 하시면서 여러분들의 헌신과 봉사를 하시면서도 ‘하나님이 날 도와주시나?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하시나?’ 하나님을 시험하지 계시지는 않습니까?

가끔씩 목사를 시험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잘 하다가 꼭 와야 할 자리에 안 옵니다. ‘그 분이 왜 안 왔지?’ ‘글쎄요. 온다고 그랬는데...’ 그 분은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하지요. ‘내가 열심히 교회 봉사도 잘 했는데, 우리 목사가 날 얼마나 사랑하고 생각하는지 한 번 테스트 해보자’ 그리고 가야 할 자리 안 가고 기다립니다. ‘몇 시간 만에 전화 오는지 보자.’

가야할 자리에 안 가고 버티고 있습니다. 며칠 만에 심방 오는가 한 번 체크해 보자. ‘아이구, 목사님 3일 만에 오셨네. 3시간 만에 전화 하셨네. 그래도 꽤 나를 사랑하시나봐.’ 일 주일만에 안 가면 어떻게 할 건데? 그렇게 목사들을 테스트 하는 분들이 있어요. 우리 평안의 교회에는 없을 줄로 믿습니다. 참 피곤한 교인이지요? 성도가 그 쯤 되면 정말 하나님 피곤하실 거예요.

신앙은 순결해야 할 줄 믿습니다. 무엇을 하나 해도, 작은 일 하나 해도 순수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시험해 보고자 하는 그런 모습이라면 아무리 새로운 수레를 만들어서, 아무리 정성을 들여서, 아무리 금덩어리 10개를 준비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미 속건제의 제물로 마땅치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지도자가 중요하다고 하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작되는 거예요. 블레셋 지도자들이 제대로 된 지도자라면 백성들에게 제대로 이야기 해 주어야지요.

그들은 두 가지를 잘 못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는 법궤를 돌려보낼 때 수레에 실어 보내라고 알려 준 것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운반할 때에는 거룩한 구별 된 사람들, 제사장들이 그것도 어깨에 메어 운반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깨에 멘다는 것은 수고를 말합니다. 어깨에 멘다고 하는 것은 희생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일을 해도 어떻게 하면 더 편하게 일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마지막에는 예배의 본질은 사라지고, 인간의 편의함만 판치게 되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편안함도 어느 정도여야지요. 우스개 말로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여러분들이 과거에 예배를 드릴 때 정말로 숨어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정말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그 자체, 그것만으로도 감격하지 않았습니까? 예배 처소가 정해지고, 마루바닥이 되어졌을 때만 해도 감사했고, 마루바닥이 있을 때 여선교회에서 방석만 만들어 주었어도 행복했어요. 그러다가 의자가 생겼습니다. 처음에 의자라고 하는 것은 공원의 벤치처럼 듬성듬성 나무를 대어서 만든 딱딱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앉아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미안하면서도 편안했습니다. 좀 더 해서 지금 저 인도네시아산 미송, 향기나는 나무로 성구들이 만들어져 여러분들의 힙을 바쳐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편안합니까? 15로 기울어져 있잖아요?

거기에 다리까지 꼬면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예요? 앞사람 의자에 다리를 얹어놓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예요? 해도 너무 하지 않습니까? 자, 아예 누워버릴까? 그런 생각을 들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오늘날 예배가 점점 편리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따라가서 이제는 교회를 오지 마시고, 텔레비전에서 예배를 드리시고, 그 밑에 구좌번호가 나가니까 온라인으로 헌금을 보내세요. 이러고 미국은 시작을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에 햄버거 먹으면서 예배를 구경하고, 설교 잘 하면 동정하는 마음으로 온라인으로 헌금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가 편리함으로 전락해 버렸어요. 우리 한국교회도 흉내 내는 교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것은 본받으면 좋은데, 이상하게 유행은 좋지 않은 것부터 시작하는 게 인간사회의 모습인 것 같아요.

지금 그들은 수레를 만들라고 하는 것, 정성으로 새로운 수레를 만들라고 했지만, 출발이 잘 되지 않았어요. 어깨에 메어야 하는데, 나의 희생과 나의 눈물과 나의 기도가 하는 것인데, 수레를 정성껏 새 것으로 만들어도 나는 그 수레에 실려 가는 법궤를 보면서 구경하는 구경꾼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번에 라바욕 평안의교회를 건축하면서 약 2천만원의 경비가 들었는데, 그 중에 5백만원 정도는 그 라바욕 성도들이 헌금을 한 것입니다. 물론 대지도 그들이 준비한 것입니다. 필리핀 사람들이, 그 가난한 사람들이 5백만원을 준비한 것은 우리 돈으로 영을 하나 더 보태서 5천만원보다 더 큰 돈입니다. 우리는 천오백만원을 대었지만 사실은 그들이 훨씬 더 많이 준비한 것입니다. 피눈물나게 더 준비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중고등학교 자기네나라의 영어교사, 10년 정도한 주임교사가 아직 100불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 생활을 하면서도 그들은 행복해 하지요? 많이 가졌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깨닫고 도전받고 돌아옵니다. 그들은 성전을 짓자고 하는 일에 정말 눈물겹게 헌신을 해서 동참을 했어요.

우리 평안의교회 세계선교전략도 그것입니다. 절대로 전부를 대어주지는 않는다. 땅을 헌신적으로 준비하던지, 건축비의 일부를 그들의 능력으로 준비하던지, 그것을 위해서 함께 그 일을 해 나가야 자신들의 눈물과 기도가 있는 제단이어야, 그 제단에 정이 있고, 사랑이 있지요. 다른 나라에서 다 지어주면 무슨 사랑과 애정이 있겠어요?

죠이랜드 스쿨도 마찬가지입니다. 학부형들과 그리고 그 교사들이 다 십시일반으로 헌금들을 했어요. 1억4천8백만원의 예산이 들었지만, 그 중에 그분들이 한 경우의 부분은 1/10정도도 안 되지만, 그래도 그 분들에게 있어서 1/10은 너무나도 큰 재산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성과 헌신을 함께 포함하겠다고 하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수레를 우리가 만들어서 법궤가 가는 것을 구경하는 구경꾼보다는 그 수레가 내 어깨에 메어져서, 때때로 그 법궤를 매고 가는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 버겁고, 힘겹고,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은 어깨를 매고 가는 것을 기뻐하시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주신 사명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끝까지 어깨를 매고 가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누가 수레를 끌어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블레셋 지도자들이 잘 못 알려준 것은 그들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시험하도록 그렇게 그들을 잘 못 인도한 것입니다. 아까도 잠깐 이야기를 했지만, 하나님의 손의 심판인지, 우연인지, 한번 테스트해 보자는 그들의 속셈을 백성들에게 주었습니다.

젖 나는 소 두 마리가 벳세메스로 가면 이 재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않고 새끼 송아지들에게 있는 데로 가면 이것은 우연이다. 자기들 유리한 방법으로 만들어놓고, 그리고 우연이냐 아니냐를 갈러보겠다고 하는 이 어처구니 없는 그들의 속셈, 정말 벳세메스로 갔는지, 송아지 찾아 갔는지는 다음 주 가면 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본문 말씀 속에서도 우리에게 주시는 신령한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헌신해도, 그 헌신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순수하고 온전한 것이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에게 헌신하고 우리가 정성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그 출발이 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레를 만드는 정성은 들어갔지만, 새 수레를 만드는 희생을 들어갔지만, 출발이 잘 못 되었다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주님 앞에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 내가 아는 이 헌신이 정말 마음에 합한 것인지, 정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주님의 방법대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 편한 방법대로 하는 것인지 늘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방법을 포기하고, 주님을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의 헌신이 되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무엇으로 속건제를 삼을꼬. 이왕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고, 이왕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로 했으면 그 하나님 기뻐하시는 진정한 속건제의 제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주님 앞에 무조건 항복한다고 하면서, 주님의 손의 능력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속셈을 따로 가졌던 어리석은 블레셋 지도자들 같은 그런 연약함을 가지지 않게 하옵소서. 희생하고, 봉사하고, 수고의 땀을 흘렸지만, 그 출발이 잘 못된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주의 종들로 삼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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