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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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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철 목사 (왕십리감리교회)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존되느니라”(마태 9:17)

신학자 폴 틸리히는 신앙을 '타율'과 '자율'과 '신율' 이란 세 가지 용어로 분류했습니다.
타율적인 신앙이란 교회가 신앙과 행동을 교리적으로 명령할 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교리를 신앙의 본래적인 것보다 우위에 놓는 것입니다. 이 신앙은 교리를 절대적 우위에 두면서 때로는 신앙을 전해준 사람의 신앙형태와 행동을 모방하며 의존하기도 합니다. 타율적인 신앙 인은 그가 배운 전통적인 교리나, 신앙방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교리와 신앙방법을 전해준 사람을 절대적인 권위자로 수용합니다.

자율적인 신앙이란 타율적인 것과는 달리 신앙과 신앙행동을 자신의 이성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조직하여 자신의 신앙법칙을 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신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신앙은 자기 밖의 것에는 무엇에나 굴복하기를 거절하고 자신이 자기 운명과 영혼의 주인이 되어 신앙을 만들어 갑니다. 이 신앙은 자신을 중심으로 만들어 가는 신앙입니다.
신율적인 신앙이란 하나님께 신앙의 근원을 두면서 하나님께 자신을 조화시키는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부딪치는 인격적 관계에 근거를 두는 것으로 교리나 신앙의 방법을 뛰어 넘어 신앙의 본질에 이르고 하나님의 근원에서 인간의 본래적인 것을 찾아내는 신앙입니다.

특별하게도 틸리히는 '관심'이란 말로 신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타율적인 신앙은 관심이 교리와 신앙의 행위이고, 자율적인 신앙은 관심이 인간이성의 판단능력이고 신율적인 신앙은 인간의 궁극성인 하나님의 실재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했습니다.
틸리히는 신앙을 형성하게 하는 요인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인간본래의 궁극적인 관심으로 향할 것을 요청하면서 이 궁극적인 관심이 바로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이며 이 궁극적인 관심에 사로잡히는 것을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이 궁극적인 관심에 사로잡히는 신앙이 바로 신율적인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당시 틸리히가 말한 것과 같은 세 가지 유형의 신앙인들을 발견합니다.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 따르면서 율법과 종교적 행위를 절대시하였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타율적 신앙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이성으로 해석하여 나름대로 자기들에게 합당하도록 적용시킨 사두개인과, 로마의 압제 하에서 민족해방과 정치적 자유를 위해 하나님만이 유일한 통치자라고 하면서 그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신앙을 합리화하는 열심당은 자율적 신앙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들어 고통 당하며, 죄악의 고통을 괴로워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을 기다리던 중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뻐하며 그리스도를 맞이하였던 무리들이 있었는데 바로 이들이 신율적 신앙 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포도주를 가죽부대에 담아 두었습니다. 포도주를 가죽 부대에 넣어 보관하거나 여행 중 낙타 등에 싣고 다니면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죽으로 만든 새 부대는 탄력이 있으나 그 부대가 오래되면 탄력이 없어지고 가죽도 굳어져 버립니다. 새 술은 오래갈수록 계속 발효되기 때문에 ‘가스’가 나와 압력이 생기게 됩니다. 새 부대는 탄력이 있어 이 압력을 견디어 내지만 낡은 부대는 탄력이 없어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리게 되어 부대도 포도주도 모두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실례를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영적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새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부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근거로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는 신앙의 방법인 율법자체를 고수하며 신앙의 행위만을 고수한 타율적인 신앙의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이성의 판단 안에서 죄의 용서와 구원의 하나님의 은혜와 부활과 영생을 부인하는 사두개인과, 그리고 정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해방을 찾고자 하였던 열심당의 자율적인 신앙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과 구세주로 믿을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믿고 받아들일 수 없는 낡은 가죽부대의 마음을 소유한 그들은 새 포도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부대도 버리고 포도주도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가룟사람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하에서 해방시키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정치적인 해방을 이룰 것을 기대한 자율적인 신앙의 그는 하늘의 하나님 나라만을 말하는 예수님에게서 정치적 해방의 이스라엘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실망한 그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십자가형의 궁지로 몰아넣으므로 민중의 봉기를 도모하고자, 은 30에 예수님을 팔았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포도주도 버리고 부대도 버리는 결과로 인생의 실패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타율과 자율의 잘못된 신앙인들을 가리켜 ‘회칠한 무덤과 같이 겉은 깨끗하나 속은 썩었다’고 했으며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책망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책망은 자율과 타율의 신앙을 벗어나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우리 신앙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유형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나의 신앙이 행위나 규례와 형식에 머물러 버린 방법만을 따라가는 타율적인 신앙은 아닙니까? 아니면 내 이성의 판단으로 만들어낸 내 방식과 내 주관의 자율의 신앙이 아닙니까?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신율의 신앙입니까? 오늘 우리는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포도주를 어떻게 소유하고 있습니까? 혹시나, 포도주도 버리고 부대도 버리는 잘못된 신앙은 아닙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새 술을 옛 생활이나 옛 형식에 넣을 수 없습니다. 옛 편견 과 그릇된 동기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내 심령의 부대는 어떠한가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새 가죽부대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 찾아보고 새 가죽부대의 신앙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새 부대는 담을 수 있는 부대입니다.

담을 수 있다는 것은 새 부대이기 때문이며 새 부대이기에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중심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그 분이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구원하신 구세주였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죄를 구원하셨다는 고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이 바로 새 부대입니다.

사도 바울은 낳은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율법을 연구한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헬라철학의 권위자였고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율법에 대한 열심이 기독교인을 핍박하는데 있어 선봉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빛 가운데 만난 후 그가 믿어왔고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바울의 타율과 자율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신율의 신앙으로 바뀐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담을 수 있는 새로운 부대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적은 병이 낳거나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눈먼 소경이 눈을 뜨는 것 이상입니다. 기적 중에 기적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우리의 죄를 대속하셔서 구원하신 구세주라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의 왕국을 꿈꾸는 낡은 가죽 부대의 자율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가룟사람 유다에게 ‘세상에 네가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하였도다’는 비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낡은 가죽부대를 버리고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라는 새로운 부대의 마음을 소유한 베드로에게는 놀라운 축복을 선언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네게 천국의 열쇠를 주노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세주임을 고백하는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담을 수 있는 새 부대의 심령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나의 마음 중심에 담을 수 있는 새 부대의 마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새 부대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새부대는 보존할 수 있는 부대입니다.

새부대는 포도주를 담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포도주를 보존할 수 있기에 새 부대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그리스도를 담을 수 있으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고 살아가지 못하는, 곧, 포도주를 보존하지 못하는 부대와 같은 신앙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나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와 같이 살아가지 못하는 신앙 인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처럼 사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새 포도주 그리스도를 보존하는 새 부대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큰 바위얼굴을 바라보는 사람은 많으나 큰 바위얼굴과 같이 되는 사람은 적은 듯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인격 그 분의 감정을 우리 속에 담아서 보존 유지케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담아 보존하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평화의 사람으로 살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담고 보존하며 사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사랑의 눈물을 흘리며 인간의 영혼을 사랑하고, 죄에 대하여 예수님처럼 안타까워하고 분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가 내 속에서 보존되어야 합니다. 내 속에 성령께서 계시기에 그리스도와 같이 살아가는 삶을 지속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보존하는 새 부대입니다.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가 내 속에 살아 계시기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수 있는 삶을 사는 마음의 부대가 새 부대의 마음입니다.


새 부대는 사용할 수 있는 부대입니다.

새로운 가죽 부대는 새 포도주를 담아서 보존할 뿐 아니라 먼 여행길에 낙타 등에 실어 사용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쓰여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신앙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에 합당하게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여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하는 사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의 삶의 위대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담은 부대로서 하나님의 뜻에 사용되었기에 귀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의 생활은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 참여하는데 그 가치와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간직한 신앙은 그 그리스도를 간직한 가치에 쓰일 때 거기에 보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용할 수 있는 부대, 본래의 목적에 따라 쓰여지는 부대, 그것이 새 부대입니다.

앞을 못 보는 소경들이 코끼리 구경을 갔습니다. 소경들은 볼 수 없기에 코끼리를 만져봄으로서 코끼리 모양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조건에서 커다란 코끼리의 배를 더듬어 보기도하고, 코를 만져보기도 하고 다리를 만져보기도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그들은 저녁식사 후 코끼리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배를 만져본 소경은 코끼리가 바람벽 같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코를 만져본 소경은 바람벽이 아니라 뱀같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리를 만져본 소경은 코끼리는 절대로 바람벽 같거나 뱀같이 생기지 않고 기둥과 같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날 밤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서로들 코끼리에 대하여 가장 정확히 알고 있다고 떠들어대며 싸웠습니다.
소경들은 코끼리에 대하여 정확히 만져보고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 본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말하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장은 소경들과 같은 과오를 범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타율과 자율의 신앙은 소경과 같은 주장과 고집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가지는 신율의 신앙으로만 신앙의 세계를 바로 볼 수 있습니다. 전체를 보게 하는 것은 방법이나 이성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입니다.

우리는 낡은 가죽부대를 새로운 가죽부대로 바꾸어야 합니다. 방식이나 행위, 전통을 주장하는 낡은 가죽부대의 신앙에서 방식과 행위가 가리키는 본래적인 체험을 찾는 새 가죽 부대의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나의 정신적 수양이나 교양을 쌓기 위한 즐기는 신앙생활에서 회개와 갱생의 새로운 가죽부대의 신앙을 소유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만들어낸 신앙이 아니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실재적 경험 속에서 나의 신앙의 모습을 다시금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장식용이거나 이용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며 궁극적 관심입니다. 타율의 신앙에서 신율의 신앙으로 바꾸십시오. 예수님은 나의 구원주, 하나님의 아들로 내 마음속에 담읍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가지고 그리스도와 같이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가진 자로 하나님의 목적에 쓰여져야 합니다.
박영웅/ 정신이상

새 포도주는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낡은 부대에서 포도주를 넣으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존됩니다. 새 부대의 사람으로 새 포도주를 담는 신앙의 사람이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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