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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과 함께 새 세상을 (요 14: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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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기홍 목사 (아름다운교회)

몇 년 전 우간다에서 온 목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시골에서 자란 이 분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비행기는 영국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공부하러 가는 것이지요. 좌석에 앉아있는데 승무원이 다가왔습니다. 음료수를 나누어줍니다. 그 목사는 가난했습니다. 그런데다 돈을 낭비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음료수를 거절했습니다.

한 동안 시간이 지났어요. 다시 승무원이 다가와 친절하게 묻습니다. “닭으로 하실까요 소고기로 하실까요?” 목사는 다시 고개를 흔들어 안 먹겠다고 말했습니다. 주위 사람들 모두가 다 식사를 하는 데 이 목사만 안 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배가 고팠습니다. 음식냄새가 미치게 만듭니다. 그러나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묵묵히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계속 흘렀습니다. 모두 식사가 끝났어요. 옆에 앉은 신사를 보니까 빵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물었어요. “저, 선생님, 빵 안 드실 건가요?” 그가 눈이 둥그레져서 묻습니다. “왜 그러세요?” “그저, 안 드시면 제가 먹을까 해서요.” “아니, 배고프세요? 이 봐요 승무원 아가씨, 이 분이 배고프답니다. 식사 좀 가져오세요.”

목사는 당황해서 부탁합니다. “아닙니다. 그거면 됩니다. 저는 돈이 없어서요.” “이 보시오. 비행기표 살 때 식사비도 다 낸 겁니다. 그런데 왜 안 들어요.” 모르면 이렇게 됩니다. 이 말을 하면서 신자의 권리와 능력을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기적을 행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고쳤습니다. 사도행전의 사람이 현대에 나타난 것 같아요.

1. 신자는 성령을 모신 존재이다

불신자가 신자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요즈음에 보면 신자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전도하기가 그렇게 힘들지요. 초창기는 애국자들과 도전적인 삶을 원하는 이들이 기독교에 들어왔습니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기독교인은 정직하고 술 담배를 안 한다는 게 기본적 이해였습니다. 그만큼 신자를 존경했어요.

한편으로 신자는 신자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스스로 생각해 봅시다. 불신자일 때보다 결정적으로 좋아진 게 있나요? 노력은 하는 데 잘 안되나요? 많은 분들이 그저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라고 대답합니다.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신자와 다른 점이 별로 없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완전한 신자는 없고 하나님은 그 점을 이해하신다.”

통계를 보면 신자와 불신자들 간의 이혼율이 큰 차이가 없습니다. 청소년 시절 혼전 성경험의 통계도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기업인들에 대한 청렴도와 불신자간의 차이도 별로 없습니다. 국세청이 기독교인 회사라고 감안해서 세무조사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통념으로도 우리나라 초창기의 그런 존경의 대상은 아닙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요? 개인적으로 사회에서 존경받는 신자들도 가끔 있으나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도 반드시 성령의 힘으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대다수 신자들은 실생활에서 복음을 적용 못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막연히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정도일 뿐이지요.

성경에 나오는 신자는 불신자와 다릅니다. 사업 하는 데 달라야 합니다. 아이를 기르는 데도 다릅니다. 결혼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신자들 간의 서로 도와주고 아껴줌을 보고 관심을 갖게 해야 합니다. 모두를 사랑하고 도와주면서도 모든 면에서 더 잘되어야 합니다. 정직하고 겸손한데도 당당하게 잘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라고 남겨졌습니다. 그러려면 근본적으로 달라보여야 합니다. 토니 에반스란 분이 말했어요. “우리가 살아 숨쉬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다가 올 주님의 왕국을 알리기 위해 살아있다. 믿지 않는 이들이 우리를 보고 자신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게 해야 한다. 옷이나 머리 모양이 아닌 우리 자신, 바로 우리 내면의 모습이다.”

내면이 어떻다는 건가요? 노력으로 근본을 바꿀 수 있나요? 안 됩니다. 하나님도 그 점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세상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르게 하셨어요. 신자 속에 들어가십니다. 하나님이 들어와 있는 존재, 그래서 거룩한 몸이 된 존재로 만드십니다. 그 점이 신자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합니다. 겉모습은 질그릇이라도 내용은 보배입니다.

2. 성령은 능치 못함이 없다

시체와 산 사람간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시체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다 죽어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의식이 없어요. 기계로 겨우 호흡이 유지됩니다. 그래도 인간은 인간입니다. 존엄성이 있어요. 그러다가 생명이 끊어집니다. 그러면 하늘과 땅 차이가 됩니다. 존엄성은 사라지고 물건이 되고 맙니다. 물건보다도 못해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보통 사람과 신자는 그만한 차이가 있어요. 성경은 불신자를 죽었다 말합니다. 그러다가 신자가 되면 살아났다 하지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영적으로 보면 시체와 같아요. 역겨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리신 다음에는 존엄성이 주어집니다. 살아있는 존재에요. 병과 역경이 함부로 못해요.

신자를 영적으로 살아있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신자는 누구나 하나님이 들어와 사십니다. 영은 육체가 느끼지 못합니다. 영은 영적인 감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아는지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 나타나는 유익을 먼저 살펴봅시다. 하나님 전체가 들어오신 것과 같습니다. 시체에 생기가 들어온 셈이죠.

첫째로 성령이 바로 생기입니다. 이 생기가 모든 것을 살려줍니다. 봄이 오면 죽은 나무에 싹이 틉니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습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성령이 들어오시면 생기가 일어납니다. 냉냉한 부부 사이에 사랑이 넘쳐납니다. “나 한데 이럴 수 가 있어? 내게 해준 게 뭐야 도대체.” 이런 말이 안 나와요. 언제나 첫 사랑처럼 느껴집니다.

이 생기가 사람을 일으킵니다. 자살하려는 사람 구해놓으면 다시 자살합니다. 망하는 회사 자금을 지원하면 또 어려운 상황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생기가 들어가면 달라져요. 죽으려는 사람에게 삶의 의욕이 일어납니다. 회사도 힘을 얻어서 살아납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의욕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전에 못 보던 세상을 보게 만들어줍니다.

두 번째로 성령은 용기를 일으킵니다. 잘못된 것은 과감히 끊습니다. 그게 용기에요.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는 게 용기입니다. 대단한 용기이지요. 잘못된 습관을 버리는 게 용기이지요. 새로운 길을 향해 도전하는 게 용기입니다. 모든 좋은 일을 향해서 일어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해요. 교회 나오는 것 큰 용기입니다. 전도하는 것 더 큰 용기에요.

세 번째로 성령은 용기에 끈기를 더해줍니다. 용기가 유지되게 합니다. 좋은 일은 반드시 장애를 만납니다. 그러면 용기를 잃지요. 낙심합니다. 생기가 죽고 다시 옛날로 돌아가 우울증에 빠집니다. 그러나 성령은 끈기로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첫날에는 오직 흑암과 혼돈뿐이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밤이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낙심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받은 게 바로 생기요 용기요 끈기입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종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하고 큰일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하십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우리도 그래요.

3. 성령의 도움은 믿음으로만 받는다

이제 가장 중요한 부분에 왔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성령의 힘을 어떻게 받을까요? 내 삶은 한계 속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보다 잘해야 하지만 능력은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초개같은 나도 성령의 도움으로 죽은 것 같은 삶에 빛을 비추나요? 그리고 전에 못 보던 것을 보고 용기를 내어 도전할 수 있을까요? 또한 끝까지 인내해 열매를 얻을까요?

성령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이 앞의 세 가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늘 성령의 임재를 늘 인식해야 합니다. 성령은 가상의 신비로운 존재가 아닙니다. 무슨 능력이거나 힘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다면 성령이 자기 속에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다는 의미 중에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 전 4억 원짜리 수표를 지갑에 넣고 하루를 지낸 적이 있습니다. 제 관심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어디에 가나 무슨 일을 하나 제 마음은 한 군데로 모아졌습니다. 바로 제 안에 있는 지갑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아마도 정신이 조금 없는 사람 같았을 거예요. 어떤 말이건 일이건 다 건성입니다. 돈 안 잊어먹는 게 최대 관심사니까요.

주머니의 그 돈이 교회의 향방을 마음대로 하는 겁니다. 얼마나 힘이 셉니까. 하지만 이런 걸 생각해 보세요. 전쟁이 나거나 더 무서운 일이 일어나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다면 수표의 존재를 잊을 수도 있어요. 사고가 나 기억상실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수표는 아무 힘을 발할 수 없습니다. 그저 작은 종이 하나로 어딘가 조용히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은 우리 속에서 그런 상황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분, 역사를 만들고 문화를 만드신 분, 그분이 내 사업을 못 일으키실까요? 그 분이 돈을 못 만드실까요? 그분이 내 삶에 생기와 용기와 끈기를 주지 못하실까요? 그분이 기쁨과 감사와 기대로 넘치는 삶을 줄 수 없을까요? 천만에 그는 내 삶에 새로운 감격과 능력의 세상을 보여주십니다.

그를 믿으세요. 함께 하심을 믿으세요. 이것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다윗은 성령을 의지해 적군을 향해 달리며 담을 뛰어넘는다 했어요.(시18:29) 전쟁할 때도 심지어 도망할 때도 성령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 전반에 생기와 용기와 끈기가 절대로 그치지 않았다 것입니다. 사는 것도 성공하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성령과 함께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그렇게 했답니다. 설교 작성할 때 말합니다. “성령님 무슨 주제를 잡을까요? 어떤 내용을 쓸까요?” 연습 할 때 말합니다. “훈련 잘 시켜주세요.” 설교단에 올라갈 때 말합니다. “성령님 먼저 올라가세요. 그리고 함께 말해 주세요.” 끝나고 말합니다. “저들의 마음을 계속 감동시켜 주세요.” 같은 설교가 엄청난 힘을 발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존재를 인식하세요. 의지하세요. 그러면 내 하는 모든 일에 생기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커튼은 열리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관심과 용기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일이 꾸준히 계속될 것입니다.

1. 서론의 목사 이야기를 신자의 삶과 비교해보세요. 2. 에반스의 말을 읽어보니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3. 2장에서 성령이 주시는 능력 중 세 가지는 무엇인가요? 4. 성령의 도움은 어떻게 받을 수 있나요?(3/2) 5. 조용기 목사님의 이야기를 자신에게 적용해 보세요.(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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