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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개혁의 원리 (엡 1: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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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이봉 목사 (상도교회)

□ 교회개혁의 원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
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
는 자의 충만이니라) (에베소서 1장 17절-23절)

오늘은 우리교회가 설립 된지 57년이 되는 날입니다.
1947년 6월 둘째 주일 처음 예배를 드린 후, 오늘까지 57년의 세월 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앞선 성도들의 헌신적인 희생과 봉사 위에, 그리고 오늘 이 시간까지 주(主)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봉사 위에 오늘의 우리교회가 이만큼 성장했다고 봅니다.

돌이켜 보면 지상의 교회는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할 수는 없기에, 교회는 언제나 주님의 가르친 분량에 이르도록 계속적인 개혁이 이루어져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 교회는 계속하여 개혁되어 왔고, 앞으로도 이 개혁은 계속 이어져 갈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땅위에 오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계승해 나아가야 할 구령사역이 첫째 임무이며, 둘째로,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그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 가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개혁은 언제나 말없이 이루어져 나아가야 함이 마땅한 일입니
다.

1. 우리의 신앙은 교회관이 바로 서 있어야 바르게 성장합니다.

교회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잘 나타난 명칭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은 생명체요, 유기체요,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성장과 성숙이 따라야 합니다.
나무도 살아있는 나무는 성장합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나무에는 열매가 달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있는 교회라면, 항상 성장해야 하겠고 열매를 달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머리의 지시와 명령과 생각대로 움직이는 것이 몸입니다.
만일 머리에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란 반신불수요, 마비된 몸입니다.
그런데 지상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서도 온전한 몸으로서의 교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상의 교회는 바로 죄인들로 구성되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교회관에서 보면 지상의 교회는 언제나 개혁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생각에 이르도록 부단한 자기 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특히 개신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 나아가야 함이 그 특색입니다.
어떤 특정한 <교리>나 <교권>이 교회를 묶어 놓을 수 없습니다.
도리어 교회가 그런 것들에 묶여 있다면 그것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것처럼, 교회는 이 세상에서 육신화 되는 노력과 작업이 항상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개혁입니다.


2. 그러나, 교회개혁의 원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요즘 세상 사회에서 '개혁'이란 말이 너무나 유행처럼 되었습니다.
정치개혁, 경제개혁, 교육개혁, 법률개혁 등등 모조리 개혁이란 말이 다 적용되고 있습니다.
일반 세상 사람들에서의 개혁이란 말은 지금껏 내려오던 틀이나, 관행이나, 제도를 바꾸어 보자는 것이 개혁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바꾸고, 법도 바꾸고, 기존의 모든 관행들을 바꾸는 것이 개혁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교회개혁이란 세상적인 개혁의 의미와는 좀 다릅니다.
교회개혁은 기존의 모든 것을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과 멀어졌던 관계를 개선하여 본질적인 것으로 되돌아가 가자는 의미입니다.

마치 아버지를 멀리 떨어져 나가 자유를 만끽하였던 탕자의 자리에서, 다시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교회의 개혁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의미에서 교회개혁은 탕자의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탕자의 의식이 없이 입으로만 개혁을 부르짖어 개혁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젊은 세대들이 개혁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개혁, 개혁, 개혁의 목소리는 크지만, 개혁의 대상과 개혁의 방향과 개혁의 방법이 제시되지 못 한 채, 말로만 개혁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기득권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형성된 인격들이었기에, 개혁은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라고만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혁은 개혁의 대상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빠지고 다른 사람만 개혁의 대상을 삼으려면 얼마 못 갑니다.
개혁의 대상을 제도, 법률, 관행, 기득권, 수구세력으로만 삼는다면 얼마 못가서 자신들도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개혁의 대상은 철저한 자기 자신입니다.
사람이 새사람이 되지 않고는 근본적인 개혁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일뿐입니다.
법을 개정하면, 개정한 법안에서 다시 타락합니다.
제도와 관행을 고치면, 고친 범위 안에서 다시 부패해집니다.
개혁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어야지 상대방을 의식한 개혁은 개혁의 악순환일 뿐입니다.

지금껏 헌법을 얼마나 많이 고쳤습니까?
지금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바꾸었습니까?
교육제도만 보아도 얼마나 많은 입시제도를 바꾸어 보았습니까?
대통령 중임제를 다시 개혁의 대상으로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과거에 이미 시행했던 제도입니다.
그래서 8년이 너무 길다고 하여 7년으로 했다가, 다시 5년 단임제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아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래서 다시 중임제로 개혁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적 방법의 개혁 운동입니다.
신앙적 차원에서 보면, 철저하게 우리 모두가 탕자의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3. 탕자의 의식이 있어야 참된 개혁이 이루어집니다. (눅 15:11-24)

여러분!
탕자는 오늘의 우리 현대인들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오늘의 현대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신(神)을 떠나 이성적(理性的) 자유(自由)를 만끽하면서 사는 문화생활을 추구함에 있습니다.
요즘 좀 성공했다는 사람들, 좀 지성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그리고 현세의 권력의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 대부분 보면 교회에 나와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느냐 입니다.

또 주 5일제를 주장하면서 시위를 하는 일들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예배 잘 들이도록 하기 위하여 주 5일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모두 자유의 거리에서 향락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집나간 둘째 아들과 같은 심리일 것입니다.

탕자의 사고방식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어쩌면  오늘의 우리 현대인의 모습과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탕자는 죽게된 지경에 이를 때까지 아버지를 깡그리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요즘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돈 있고, 세력 있고, 건강 있고, 잘 나가는 출세 가도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까맣게 하나님을 잊고 사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 중에는 교회의 중직들의 자녀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청년 때 교회에서 봉사하던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탕자가 아버지를 생각해 냈습니까?
주려서 죽게 된 자리에서였습니다.
개혁은 철저한 탕자의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죽게 된 지경에 이르러야 사람은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탕자의 의식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① 탕자는 잊고 살던 아버지를 생각해 냈습니다. (17절)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라고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해 냈습니다.
② 그리고 자신이 죽게 된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17b)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라고 자아의식, 즉 자기존재를 발견했습니다.
③ 그리고 잃었던 자신의 신분을 생각해 냈습니다.(19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일어난 용기 있는 결단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개혁의 의식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이성적인 자유와 세상의 향락에 취해 살던 우리들입니다.
그러던 중 죽게된 지경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해 내는 것이 현대인간입니다.
죽게된 지경에 이르렀어도 끝내 아버지를 향해 닫혀진 마음들이라면 구제불능의 존재들일 것입니다.

개혁의 대상이 자신이라면 내가 어떤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들이라고 감히 일컬음보다는 품꾼의 하나라도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바로 이런 마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본질적인 개혁운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쩌면 오늘의 크리스천들이 이런 의식을 갖는 크리스천들로 차 있다면 사회개혁은 절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크리스천들의 마음에 이런 마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모두가 개혁의 대상은 남들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개혁의 대상이고, 자신은 개혁 주도세력이라고 합니다.
철저한 탕자의식을 가진 크리스천들이 장관의 자리에 있고 대통령을 보필하는 자리에 있다면 나라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탕자의 의식이 자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도 자의지적으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철저하게 죽게된 지경에 이르렀을 때, 바로 그때에 아버지를 생각했듯이 우리들은 어쩌면 구제불능의 존재들인지도 모릅니다.
이 나라가 지금 하나님의 은혜 중 그 동안 풍요롭게 살게 되었으니 허랑방탕 하는 동안에는 개혁을 아무리 외쳐도 할 수 없겠지만, 언젠가는 주려서 죽게된 지경에 이를 때라야 진정한 개혁운동은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우리 모두 옷깃을 여미고 이제라도 잊고 살았던 하나님의 사랑을 되찾아 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그 중에 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탕자의 의식으로 되돌아가 품꾼의 하나로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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