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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시민입니다 (빌 3: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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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박봉수 목사 (상도중앙교회)

최근에 들어 할리우드 영화에 한국인들의 모습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어글리 코리안(ugly korean)의 모습을 벗어나고 있지 못합니다.

89년 영화 [똑바로 살아라]에서 이런 대사가 등장합니다. “째진 눈들이 뉴욕의 과일 야채 상점을 다 차지했어. 88올림픽 엿 먹어라” 한국인들은 돈만 아는 독종이라는 것입니다.

93년 영화 [폴링다운]에서는 “한국전 때 도와줬건만 배은망덕한 놈들 영어도 못하면서 돈만 밝히는 주제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95년 영화 [아웃 브레이크]에는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옮기는 정말 나쁜 배가 바로 한국 국기를 단 배로 나옵니다.

최근 [007 어나더데이]라는 영화는 한국을 왜곡해서 그리기 때문에 국내에서 안보기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자존심이 상합니다. “우리 모습이 왜 이렇게 비쳐지고 있는가?”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이와 비슷한 심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 곤란할 정도의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눈으로 볼 때 저들은 어글리 크리스찬(ugly christian)입니다. 무척이나 안타깝고 답답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들

본문 18절을 보면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어글리 크리스찬을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편지 앞부분 즉 2:5-8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부인하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원수들이란 이런 십자가의 정신을 저버리고 십자가와는 정 반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자기를 낮추기 보다는 자기를 높이려 합니다. 자기를 부인 하려기보다는 자기를 위해서, 자기 이익만을 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복종하기보다는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거기에 흠뻑 빠져있습니다.

본문 17절에 이런 십자가의 원수들의 특징을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 마침은 멸망이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행위들의 열매로 멸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저희의 신은 배요” 자신의 육체적인 욕망을 신처럼 숭배하며 사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에 대해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자랑한다는 말씀입니다.

넷째, “땅의 일을 생각하는지라” 육체의 일, 세상의 일에 골몰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쓰레기만두 때문에 우리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쓰레기만두란 단무지를 만들고 버리는 단무지 짜투리로 만든 만두소가 들어간 만두를 말합니다. 단무지 짜투리를 버릴 때 대개 무 가운데 썩은 부분, 병든 무를 같이 버리는데 이것이 대개 하수구 주변에 버려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거해 다가 그것도 비위생적인 시설에서 먹을 수 없는 지하수나 개천 물 같은 것을 세척한 뒤에 원료로 가공해서 만두소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일에 그리스도인들이 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몇 차례 벌금도 물고 경고도 받았는데도 계속 그렇게 하다가 결국 이런 꼴을 당하고 말았답니다. 지금 기도원으로 도피중이라는 보도입니다.

그저 자기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양심에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을 철저하게 저버린 일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 빌립보 교회에 이런 십자가의 원수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편지를 씁니다. 그 편지에 이렇게 말합니다. 18절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이미 여러 차례 십자가의 정신으로 돌아오라고 권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않자 이제는 눈물을 흘리면서 권한다는 것입니다.

꿀벌이 꿀이 가득 담긴 꿀단지를 발견했습니다. 이제 산이고 들이고 다니며 이 꽃 저 꽃에서 꿀을 따느라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꿀단지 속에서 꿀을 빨기 시작합니다. 점점 꿀단지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배가 부르고 피곤해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섭니다.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날개가 꿀에 박혀서 빼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점점 그렇게 좋아하는 꿀에 묻혀서 죽어갔습니다.
꿀벌이 꿀벌 정신을 잃어버리고 꿀에 묻혀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정신을 잃어버리면 세상에 파묻혀 그 영이 죽어갑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맙니다.


천국 시민

본문 20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립보 교인들에게 눈물로 호소하면서 저들이 천국시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미 저들 가운데는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교인들을 바라보며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교인들도 많았습니다. 저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지만 저들을 돌이킬 능력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저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시민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특히 빌립보 교인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시민이라는 의식을 강조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 성경에는 아구스도라고 부르는 사람이 이 빌립보를 로마의 핵심 군사기지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많은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고, 군에서 제대한 사람들도 상당수가 이곳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이 빌립보를 로마의 특별 식민지로 만들었고, 빌립보 시민들을 이탈리아의 벗이라 불렀고, 당시 로마인들에게 부여했던 동등한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의 식민지 사람들이었지만 로마 시민들과 똑 같은 특권을 누리는 아주 특별한 사람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 시민으로서의 긍지가 대단했습니다. 로마 시민된 것을 자랑했고, 로마 정신을 따르고, 로마 관습과 전통을 계승하고, 로마법을 지키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저 천국의 시민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비록 로마에 살고 있지는 않으면서도 로마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저 천국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첫째, 천국시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속 자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이 비록 식민지 땅에 살지만 자기들은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로마 소속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비록 식민지 땅에 살지만 저들은 로마 시민으로서 황제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개인 소유도 허락되었습니다. 세금도 여러 가지 감면을 받았습니다. 황제만이 저들을 재판하고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아주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가 그 양을 막대기와 지팡이로 보호하듯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호해 주십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듯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도해 주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듯이 하나님께서 저 천국과 남다른 기업을 유업으로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비록 이 땅에 살지만 결코 우리는 이 땅 소속이 아닙니다. 남달리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주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왕자는 일반 백성들과 구분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구분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삼상 17:45-7을 보면 다윗은 골리앗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들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위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넘쳐흐릅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불만 섞인 표정으로 거리를 청소하는 흑인 청소부를 만났습니다. 그가 킹 목사에게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백인들의 집이나 청소하고 저들이 어질러 놓은 길이나 청소하며 살아야 합니까?” 이 때 킹 목사가 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은 백인들의 길 한 모퉁이를 청소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저 천국시민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청소를 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천국시민입니다.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더라도 우리는 저 천국 백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둘째, 천국시민답게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천국시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원수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눈물로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자존심과 오기를 혼동합니다. 자존심은 자기 기준을 스스로 높이고 자기를 잘 관리하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기는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자기가 싫은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 시장에 팔려 나왔습니다. 오랜 시간 끌려와 지치고 병들고 허기졌습니다. 모두가 길게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허리를 고추 세우고 반듯하게 앉아있었습니다. 노예를 사러 온 한 신사가 물었습니다. “힘들 텐데 눕지 왜 그렇게 힘들게 앉아있는가?” 그 청년 대답이 “나는 추장의 아들이요. 추장의 아들이 어떻게 땅에 누울 수 있겠소”

바로 이것이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기준을 스스로 높여야 합니다. 천국시민다운 삶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지켜가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기준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고전 6:19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세상 풍조에 휩쓸려 음행을 저지르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임을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거하는 성전임을 알고 성전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을 받을 때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천국시민이다. 내 몸은 성령의 전이다. 내가 어떻게 거짓을 말하겠는가? 내가 어떻게 이런 음란한 짓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어떻게 이런 죄를 범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희생과 헌신을 해야 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는 천국시민이다. 내 몸은 성령의 전이다. 그러니 내가 주님처럼 희생해야 한다. 내가 주님처럼 헌신해야 한다.


셋째, 천국시민으로 자기를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천국시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당부를 곁들이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천국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주는 권면입니다.

우선 17절을 보면 바울 자신을 본 받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잘못생각하면 바울은 이단 교주처럼 자기를 따르라고 말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고전 11:1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 그러니까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을 본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늘 그리스도를 본 받고, 그리스도를 본 받으려 애쓰는 믿음의 선배들을 본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시민으로서 우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20절을 보면 주예수를 기다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기다린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페크데코메다”라는 말인데 이 말은 간절히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시민들은 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늘 주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을 갈망하며 산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원수가 될 수 없고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 수 있습니다. 천국시민으로서 우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또한 21절을 보면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들을 주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날로 새롭게 빚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 악한 세상 속에 살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의 죄가 더 해가는 세상 속에 살면서 날로 심령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시민으로서 우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세상에 휩쓸려서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이 세상에 살면서 천국시민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시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찬국시민답게 천국시민으로 자신을 지키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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