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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가복음(26) 가슴 속에 불이 있는 자가 불을 붙인다 (막 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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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전병욱 목사 (삼일교회)

예수님이 우리에게 강조한 것은 죄악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지만, 이보다 더 강조한 것은 외식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에 빠지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지만 외식에 빠지면 돌아오기 힘들며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가슴 속에 불이 있는 자가 불을 붙인다

외식은 겉모양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생명, 실체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외식하는 사람은 더 많이 기도하여 생명을 만나려 하기 보다는 가짜를 만들어 놓고 죽을 열심 다하여 섬기며 이를 통해 스스로 위안을 삼고 있습니다.

3~4절에서 유전과 전통을 만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출하고 돌아와서 손을 씻는 것은 죄를 씻는다는 의미이며, 물뿌리는 것은 정결의식을 의미하지만 이는 다 겉모습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생명을 걸고 이러한 유전을 지키는 것으로 신앙적 안도감을 느낍니다.

갈라디아서 1장 14절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어었다”라는 바울의 고백을 볼 때 사도바울도 이같이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만족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말씀으로 채우려기 보다는 열심으로 채우려 합니다. 말씀은 생명이며 그 말씀이 들어가면 성장과 성숙이 있으며 풍성함을 누리고 능력을 얻습니다. 말씀이 아닌 열심으로는 성장과 성숙이 없습니다.

간혹 교회에서 생명 아닌 열심만 있는 사람을 두고 많은 사람이 믿음이 좋다 칭찬합니다. 가정에서도 원만치 못한 부부관계하에서 아내가 밤새 교회 나와서 열심을 내어 기도만 한다면 이를 두고 믿음이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전자에게는 인간관계를 개선하라, 후자에 대해서는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들어가야 회복이 있습니다. 극단적인 열심으로 빠지는 것은 생명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만나면 열망이 생기고 저사람 같이 되어야겠다는 말이 흘러 나옵니다.

유전을 따르는 것과 우상을 믿는 것은 비슷합니다. 허상과 우상 만들어 놓고 광적인 열심 내는 것은 비슷합니다. 정신적 안도를 누리면서도 이것은 아닌데 하며 감추려 합니다. 니체가 추구한 것도 우상과 허상일 따름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하나님 만나면 겉사람 아닌 속사람이 변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내면의 변화입니다. 생떽쥐베리의 소설 “어린왕자”가 보여 주려는 것은 “내면을 보라!”는 것입니다. 어린 왕자가 코끼리를 먹은 뱀의 그림을 그려 보여 주자 사람들은 모자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왕자가 외계인을 만나 그 외계인이 양을 그려 달라고 하였을 때 상자를 그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외계인은 상자 속에 양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생명과 본질을 만날 수 있고 능력 얻을 수 있습니다. 왜 무력하게 삽니까? 하나님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능력은 문제를 해결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하나님 만나야 합니다.

지도자는 생명의 하나님 만나고 그 불을 양떼에게 전달하는 자입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불 붙이는 자이며 다른 사람을 벌떡 벌떡 일어나게 만듭니다. 내가 먼저 불이 붙어야 다른 사람에게 불 붙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 후 먹고 살기 바빴으며 그 결과 무기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자 학개 선지자가 말씀을 붙잡고 백성들에게 불을 붙였습니다. 학개 1장 14절에서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흥분시키는 것은 영어성경에는 "Stirred up" 이라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를 들어 솥에 부어진 물을 막대기로 휘젓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만났습니까? 마음속에 흥분이 있습니까? 말씀에 대한 자각이 있습니까? 빌리 그래함과 함께 한 찬양 사역자 킹 립스는 온 힘을 다하여 열정적으로 찬양을 하였습니다. 청중들은 그의 찬양을 듣고 있다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다 모든 청중들은 그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찬양의 능력은 사람들을 자리에서 일으키고 또한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진정한 기도의 능력도 마귀를 무릎 꿇게 하고 생명의 흐름이 있게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이며 생명과의 조우가 있을 때 나오는 능력입니다. 이는 껍데기가 아닌 생명 만나면 가능합니다.


                    나의 나됨의 회복 통해 나의 삶을 살게 된다

외식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 의식하며 삽니다. 정말 피곤한 인생입니다. 이렇게 사는 이유는 생명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자신의 삶의 모든 근원을 사람에 두다 보니 피곤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계용묵의 소설 백치 아다다는 진정한 행복은 소유가 아닌 존재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주제는 마음 속에 상처가 있었기에 자신의 진정한 삶을 누리지 못하는 아다다의 모습 보여 줍니다.

이 사회는 이원론의 사회입니다. 선과 악, 소유와 존재, 가진 자와 못 가진자 등으로 양분합니다. 그 가운데서는 인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생명 임하면 다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존재만으로 또는 소유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합니다. 그 결과 그는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니라”는 고백처럼 어떤 환경에서도 능력있게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는 자의 고백입니다.

생명을 받아들인 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으며 다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라!”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외식 때문에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10대에는 10대 다운 삶, 20대에는 20대 다운 삶을 원하십니다. 생명 임하면 자기 인생 즐기면서 살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생명 만나면 감사와 만족이 있습니다. 멀린 캐로도스는 “내게 주어진 모든 것 만족할 때 기적이 나타나더라”고 말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 추구한다는 이름 하에 자기 인생 받아들이지 못하며 시기 질투합니다. 그러나 생명 만나면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받아 들이고 감사하며 만족하고 삽니다. 지금 가진 것으로도 하나님 만나면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이제 입으로는 찬양과 격려와 기도와 말씀을 전합시다. 그리고 온 얼굴로 미소 지읍시다. 손으로 일하며 발로 뛰어 다닙시다. 생명 만날 때 가능해 집니다. 나의 나됨을 가지고 이러한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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