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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어려운 고백 (요 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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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일 목사 (범어교회)

22)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23)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1. 힘든 우리의 싸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내적 갈등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곧 시기와 질투와의 전쟁입니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다른 도덕적 규범들, 즉 “~ 하지 말라”는 것의 대부분을 잘 지키면서도 “시기하지 말라”는 것은 죄책감도 들지 않으면서 범하고 마는 참 어려운 규범입니다. 오히려 자존감을 내세우면서 시기심의 정당성을 변론하게 됩니다. 특히 이 시기심은 모르는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혹은 친한 사람일수록 그를 향한 시기심의 농도는 더욱 짙어집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좋던 관계가 일식간에 싫어지고 미워지도록 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聖者가 되는 척도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수도자들이 마지막까지 씨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랍니다. 결혼도 안하고 동정을 지키며, 개인 재산을 포기하고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고, 개인 자유를 포기하고 일정한 규율을 지키는 자기 절제의 훈련을 다 감수한 후에도 일어나는 마지막 시험이 바로 시기와 질투랍니다.

우리 목사님들끼리도 시기가 있고, 장로님들 안에서도 있고, 믿음 좋은 기도 많이 한다는 성도들끼리 시기와 질투의 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시기와 질투는 사탄의 본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곧 그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다가 하나님에게 저주를 받고 쫓겨난 것이 타락한 천사 곧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2. 시기와 질투의 죄악을 이긴 사람 세례 요한

이런 우리들에게 오늘 성경 본문은 매우 멋있는 사람 세례자 요한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고민하는 시기(질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모델일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 전개는 이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와서 예수님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 전갈하는 태도는 매우 못마땅한 마음으로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자기 선생님께 와서 세례 받던 예수가 이제는 스스로 남에게 세례를 베푸시는데,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선생님인 세례 요한 보다는 예수님에게 더 많이 몰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고합니다.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절)

1) 이런 보고를 받은 사람이 우리라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습니까? 한마디로 괴로우실 것입니다. 식사한 후라면 아마도 급체라도 될 것입니다.

‘세상이 이럴 수가 있나? 배신자들! 사람들은 다 믿을게 못돼! 진절머리 난다~’

이렇게 경쟁자를 좇아가는 사람들에게 화살을 쏘면서 낙망하거나, 아니면 자기 열등감에 빠지면서 당사자를 향하여 불만을 토로할 것입니다.

‘아 나는 다되었구나. 이제 내 시대는 갔어~ 요즘 젊은것들이 너무 설치니 일이 안돼, 건방진 것들 어른도 없고 선배도 모르는 녀석들’ 

2) 그런데 세례 요한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절)

여기서 세례 요한의 말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어떻게 그는 시기와 질투를 이길 수 있었나?”의 열쇠가 보입니다. 무엇입니까? 요한은 제자들의 보고를 받으면서 예수에게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에게 그런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주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주목하며 그에게 몰려가는 무리들을 상상했다면 그도 역시 속이 편치 못하였을 것이고 화를 내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주목했습니다. 그런 역사의 주인공은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그를 보내신 하나님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누가 막겠습니까? 나의 경쟁자가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본다면 어찌 실망하며 비난하겠습니까? 내 친구가 요즘 성령의 불을 받아서 동분서주하며 주의 일을 한다면 그를 비난함은 곧 그에게 능력을 주신 성령님을 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주변의 성도 중에 묵은 성도가 새로운 변화를 몰고옵니까? “저게 와카노? 미쳤나? 이태껏  안하던 짓을 한데이~” 하지 말고 그에게 일어난 성령님의 역사를 주목해봅시다. 혹은 온지 얼마 안되는 새가족이 열성을 갖고 교회 일에 동분서주합니까? 그러면 “어디서 굴러온 돌이 박힌 돌까지 뻬겠데이~” 그러지 마시고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부흥의 불씨로 보내주셨구나!” 하면서 그를 통하여 도전 받고 우리도 일어서서 새롭게 행진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세례 요한의 모델에서 시기 질투의 전쟁을 이길 귀중한 길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3) 세례 요한의 말에서 또 한가지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확실한 정체성의 고백입니다. 28절에 나옵니다.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28절)

요한은 자기의 사명이 곧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시샘을 가지지 않은 것은 자기의 사명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님 앞에서 그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사명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셨으니 자기의 시간은 이제 마쳤다는 것입니다. 한 때 자기에게도 수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지만, 이제는 그들이 나에게가 아니라 예수님에게로 가야 할 때란 것을 안 것입니다.

은퇴하신 장로님이나 권사님들께서 지금 시무 하시는 후배들에게 시샘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때에 당신들의 할 사명을 다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저들의 때라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아들을 며느리에게 넘기는 것은 어머니로써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입니다. 이젠 며느리가 그 자리에 앉아서 자기 아들을 위하여 일할 때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딸을 시집보내면서 자기 딸의 손을 사위에게 넘겨주는 것은 이젠 내 할 일을 다했고 자네가 이 딸을 맡아 사랑해주어야 할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대별로 다른 사명의 때 뿐 아니라, 동시대의 사람에게 각기 다른 사명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은사를 인정하고 각기 다른 사명에 충실하면서 상대를 보면 시기와 질투를 이길 여유와 지혜를 얻게될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두고 서로 인기를 더 얻으려고 시기 질투하는 부부는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 할 일이 따로 있고 어머니 할 일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깨달음을 갖고 살아간다면 사람들의 인기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오는 잠 못 이루는 밤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마무리하며

시기와 질투는 잘 선용하면 새 창조의 동기가 될 수 도 있습니다. 다른 이로부터 도전이 있어야 나의 응전이 나오고 그래서 변증법적인 자기 발전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도전이 전쟁으로 받아들여지고 시기외 질투의 고통을 겪으면서 미움의 죄악에 빠질 때가 더 많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세례자 요한의 마음을 갖고 시험에 들지 않고 그 고통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도록 능력 주시기를 빕니다. 세례 요한처럼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한다는 그런 기쁨이 충만하기를 빕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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