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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자냐 심판자냐? (요 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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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영일 목사 (범어교회)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1. 시작하면서

사람을 만나면 친근하고 즐거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렵고 무서운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전자는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며 위로와 격려를 주는 사람일 것이고, 후자는 상대방을 도전하고 핀잔을 주며 꾸중하려는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후자의 사람도 오래 사귀다 보면 좋은 사람임을 발견할 때도 많습니다. 그의 도전이나 지적이 악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서 나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선한 목적에서 행동한 것임을 알게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후자의 사람을 경계하는 습관을 지니게 되고 전자에게는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허물없는 사이가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의도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후자와 같은 심판자의 자세는 지양하고 전자의 방법으로 이웃과의 관계를 갖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적지 않은 경우에 비신자에게 비춰진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전자이기보다는 후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들에게 교인이라면 바른 소리 잘하고 남을 비판 잘하는 사람으로 세겨진 선입견을 우리는 고쳐가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2.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이신 예수님

오늘 성경본문은 이 사실을 매우 분명하고 정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로 17절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17절)

이런 예수님의 성품의 근거로 성경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1) 첫째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사람을 종교적 의무나 이해관계로 대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실패를 사도 바울은 고전 13장 앞부분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이런 사람의 모습은 곧 자기 중심적인 관계입니다. 자기는 방언도 예언도 체험하고 상당한 영적 지식을 가졌고, 대단한 믿음으로 세상을 극복하고 사는데,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을 보면 화가 납니다. 공의로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불쌍해 보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도전하고 권고한다는 마음에서 핀잔을 주고 꾸중까지 합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은 아픔만 느끼고 반항감만 들게 되고 그래서 그를 싫어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중심적인 판단을 보류하고 상대방의 자리에서 그를 보아야 합니다. 그럴려면 사도 바울이 말한 사랑의 노래를 따라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우리는 찬송가에서 많은 은혜를 체험합니다. 몇 가지만 보아도 그 은혜의 체험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410장1절)
내가 연약할 수록 더욱 귀하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411장 3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405장 1절)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349장 후렴) 
 
바로 그 공통점이란 하나님의 거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에서 본 것입니다. 연약하며 쓸데없는 우리 죄인의 모습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감격하며 그 은혜에 잠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대한 행동의 준칙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관점과 내 중심에서 남을 평가하거나 살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리에서 이해하고 관용하며 수용하는 마음에서 보면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가 될 수 있습니다.

2) 둘째는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상대를 사랑하는 행동은 상대 입장에서 이해하고 살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그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도 꼭 있어야 할 마음이라고 “예수의 마음을 품어라”고 역설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감히 따르기 어려운 길을 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심판하려고 달려든 사람들에게 “누구든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곧 심판자들을 죄인의 자리로 전환시켜주셨던 것입니다. 누구든 남을 심판하려고 하는 자는 자기의 죄를 생각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도 심판자가 되지 못합니다.

유진 니이다(E. Nida)라는 선교 신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유대인의 관습은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의 모습이 가슴을 치는 것이지만, 서부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기 머리를 친다고 합니다. 가슴을 치는 행위는 그들에게는 도리어 자부심을 나타내는 거만함의 행동이랍니다. 그렇기에 성경을 번역하거나 그 말씀을 설교할 때 분명히 “머리를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하는 세리의 그림을 그려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엄청나게 오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배려가 곧 상대방 중심의 설교요 그리스도인의 행동 준칙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더 들면, 인도에서는 빨간 색은 多産을 나타내고 흰색은 불임이나 혹은 죽음을 의미하는 색깔인데, 선교사들이 산모의 집에 들어가면서 순결과 깨끗함을 나타낸다고 흰색 사리를 입고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히려 그 때는 붉은색 사리를 입고가야 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문화나 습관을 잘 알지 못하면 엄청난 오해를 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상호간에 어떤 갈등이 일어나면 나의 입장에서만 생각지 말고 상대방의 행동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여유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3) 셋째는 “이 세상이 벌써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고자 했던 이유는 이미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18절)

즉 죄 가운데 사는 길 그 자체가 멸망의 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빛을 싫어하고 어둠에 거하기를 좋아하는데 그 자체가 비난이나 꾸중의 대상이 아니라 이미 심판 받은 멸망자의 삶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을 통하여 다시 새롭게 심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대신 우리는 그 멸망자의 길을 보면서 불쌍히 여길 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8-31)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유기”(버려둠)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반대어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듯이, 구원의 반대어는 ‘심판’이 아니라 ‘버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심판(매)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범죄함에도 아무런 심판이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신 것입니다. 그 자체가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웃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을 구원할 길이 없다면 심판할 필요가 없습니다. 꾸중하고 비난하지 마십시오. 그냥 두십시오. 그것이 곧 심판자의 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웃의 구원자의 역할만을 감당해야 합니다.   
     
물건너 생명줄 던지어라 누가 저 형제를 구원하랴
우리의 가까운 형제이니 이 생명줄 누구가 던지려나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물 속에 빠져 간다
생명줄 던져 생명줄 던져 지금 곧 건지어라(258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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