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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혜안(慧眼)의 노래 (시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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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재 목사 (빛과소금의교회)

유리 알렉세비치 가가린은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입니다. 그가 1961년 4월 12일 최초의 유인우주선인 보스토크 1호를 타고 1시간 48분동안 지구를 비행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구 밖에서 지구를 바라본 최초의 인물이 되었는데, 그가 처음 지구 밖에서 지구를 보았을 때, 터트린 제 일성(一聲), “지구는 푸르다”는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유리 가가린이 우주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당시 구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인 후루시초프가 물었습니다. “가가린씨, 지구 밖, 우주에는 하나님이 있었습니까?” 가가린이 대답했습니다. “우주의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의식되지 않는 곳은 없었습니다.” 깜짝 놀란 후르시초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밖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그 후 이 가가린이 교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였던 가가린을 만났을 때, 교황이 물었습니다. “가가린씨, 지구 밖, 우주에도 하나님이 계시던가요?” 가가린이 대답했습니다. “우주의 어디에서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깜짝 놀란 교황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밖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물론 이 이야기는 가가린을 가가멜(?)로 만들어버린, 풍자화한 유모어입니다. 사실은 이와 정반대였습니다. 가가린이 후루시초프를 만났을 때에는 “우주의 어디에서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고 했고 교황을 만났을 때에는 “우주의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의식되지 않는 곳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었습니다.

그러나 이 풍자된 유모어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싶은 후르시초프나 겉으로는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나 속으로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교황이나 모두 다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구나 발견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오늘 시14편은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었을 때, 피할 수 없이 우매한 사람이 되고 그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음을 밝혀 줍니다.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들, 우기는 사람들, 큰 소리 뻥뻥 치는 것같지만 이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들이 어리석습니까? 왜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면 우매한 사람이 됩니까?

히브리시 시편은 종종 이런 구조를 띱니다. 맨 처음에 대명제를 딱 선포를 하고 그 다음에 자세히 하나씩 설명하는 구조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시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선포하고 그 다음은 여호와께서 목자되셔서 내가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하나씩 하나씩 설명해 줍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14편도 같은 구조입니다. <1절>의 선포에 이어 그 다음에 나오는 설명들<2-5절>이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들이 왜 어리석은지를 보여 주는 증거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면 왜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까?


첫째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면 그의 삶은 필연적으로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1-3절>”.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면, 다 치우쳐서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스러워지고 선을 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 치우쳐서 타락하고 비열해지며 그의 삶의 동기와 방향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이끌려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의 노예가 됩니다. 한 마디로 그 인생은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무신론자인 버르란트 러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윤리는 무신론적 기반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으면, 그 사람에게는 윤리, 도덕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도덕, 윤리의 기준 자체가 없어져 버린 세상이 된 것, 이 세상에 무신론이 팽배하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표현대로 사람은 그가 먹는 것이고 밥이 하늘, 제일 중요한 가치라면, 잘 먹는 것은 곧 잘 사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욕망의 충족이 행복이고 가치가 되어 버립니다. 역사는 대대로 이런 사람을 “돼지”라고 불렀습니다. 미련하기 짝이없는, 사람되기를 거부한 사람, 경멸을 받아도 싼 동물이라는 뜻이지요.

“나는 배부른 돼지보다 고뇌하는 인간이 되겠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인간되기를 선언하는 휴머니스트 메니페스토(humanist manifesto)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도도히 선언하지만, 돼지처럼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은 안하지만, 마음에는 하나님이 있다고 믿지 못하여, 돼지같은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참 멍청하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왜 어리석은 사람인가? 둘째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면, 그에게는 배우고 깨닫는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4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NIV성경에서 그 뜻을 잘 헤아려서 번역해 주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절대로 배우려고 안하지 않느냐?”

인간을 사랑으로 만드시고 인간의 최선의 삶, 최고의 가치와 최대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살아라”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사람은 아무런 인생지침도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신론이 지배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무엇을 배워서 행복해진다는 것은 생각지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그냥”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우연히 로또가 당첨이 되어서... 멋진 남자가 프로포즈해서 그냥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그냥..” “우연히..” 이 생각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 중심의 사상을 대표하는 단어임을 아십니까?

앨버트 까뮈의 ‘이방인’이라는 소설에 보면, 아무도 없는 막막한 사막을 걷던 사람이 오랜만에 마주오는 사람을 만나자 권총을 꺼내어 그를 쏴 죽여 버립니다. 왜 죽였는가는 질문에 “그냥 햇빛이 따가와서”라고 대답합니다.

또 창조주 하나님이 배제된 인간 탄생의 신화, 진화론의 원리가 “우연”이지요?

여러분, 진정으로 행복하기 원하신다면, 그냥 살지는 마십시오. 그냥 느낌이 흘러 가는대로, 마음이 떠내려 가는대로 살지는 마십시오. 우연에 당신의 운명을 맡기지 마십시오.

혹시 여러분은 아직도 그냥 사는 것이 낭만적으로 보이십니까? 그냥 우연히 사는 것, 정말로 어리석은 삶입니다. 삶은 배워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신10:13>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17: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현대인들에게는 “그냥 우연히 어떻게 되겠지..”라는 이 병이 하도 깊어서/ 최선의 삶을 위하여, 진정한 쉼을 위하여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배우십시오”하고 복음을 전하면, 도리어 무지하게 힘들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생명의 길을 제시해 주건만, 도리어 더 힘들게 느낍니다.

어느 의사가 병든 환자에게 약을 처방해주었는데, 이 환자가 이 약 먹기도 힘들고 이 약 먹었다가는 더 아플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사람을 당신은 뭐라고 부르시겠습니까? “세상에 미련 곰팅이도 당신같은 미련 곰팅이는 못봤다”고 하며 혀를 끌끌 차겠지요?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그냥 살아갑니다. 배움도 깨달음도 없이. 그래서 어리석음의 굴레를 벗지 못합니다.

반면, 지혜자는, 행복자는 하나님을 인정하며 평생 하나님을 배우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왜 어리석은 사람인가? 셋째는 그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사람을 떡먹듯이 (등쳐) 먹기 때문입니다<4절하>.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인생에 고난, 어려움이 있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한계를 빨리 깨닫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섭리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이 인생의 파고(波高)를 헤쳐 나가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고 사람을 찾습니다.

사람을 찾는 모습이 두 방향입니다. 하나는 사람에게 기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람을 이용하는, 떡먹듯이 다른 사람을 등쳐 먹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기대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인 양, 꼬붕이 되는 것이고/ 사람을 등쳐 먹는 것은 자기 목적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는, 다른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고 철저히 사람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것을 말합니다.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제일 꼴불견의 사람이 이런 것이라고 하지요? 윗 상사들에게는 온갖 아부를 다하면서 아래 직원들에게는 정말 안하무인인, 파렴치한 사람.

그런 류의 사람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신물나지만, 정작 제일 힘들고 제일 비참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그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하게 봐 주십시오.

의존, 집착하거나 혹은 조작하거나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관계할 줄 모르는 것이 인생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나님 한 분 의지하고 다른 사람들 사랑하라고 사람들이 함께 살도록 하셨는데, 의존과 조작의 널뛰기만 하고 사랑할 줄을 모르는 인생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이 불행의 틀을 헤어나오지 않는 사람이 멍청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 그렇게 집착, 의존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더욱 더 신뢰할수록 다른 사람을 의존과 조작의 굴레를 벗고 더욱 더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 삶이 버겁습니까?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당신의 마음이 하염없이 연약해질 때에,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구하십시오. 당신이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강건하면 강건할수록, 더욱  더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행복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다고 부인하여 사람을 이용하지 말고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며 사람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왜 어리석은 사람인가? 넷째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 마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5절>.

사람이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한다고 하나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사람이 하나님이 안계신다고 우긴다고 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사실이 증발되는 것이 아니지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간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또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가운데 개입하셔서 당신의 살아계심을, 당신이 일하심을 인간이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나타내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러 다시 애굽으로 나아갈 때에, 자기를 명령하여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께 묻습니다. “제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고 할까요?” 그때에, 하나님께서 유명한 대답을 해 주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을) 자니라(I am who I am(will be)).

현대의 학자들은 이 be동사를 미래로 해석합니다. 미래로 해석하면, 이런 뜻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는 앞으로 되어질 역사 가운데 밝혀 줄 터이다. 모세야, 그러니 너는 염려하지 말고 나아가라.”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절대자이심을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의인들과 함께 하심을 통하여 나타내십니다.

“세상은 결국 힘이 지배하는 것 아니냐? 하나님 따윈 연약한 부녀자들이나 찾는 것이지... 봐라. 세상에 떵떵거리고 잘 사는 사람 중에 하나님 믿는 사람이 많은가 안믿는 사람이 많은가...하나님 믿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궁상맞지 않느냐?” 이렇게 큰 소리치지만, 하나님께서 의인과 함께 하심을 볼 때에, 이들의 마음 바닥에 깔려 있던 두려움이 올라옵니다. 한번 두 번 하나님께서 당신을 정직히 의지하는 자에게 함께 하심을 나타내 보이실 때에, 그 두려움은 점점 더 증폭되어서 올라옵니다.

예) 줄리앙 황제의 유언, “갈릴리 사람이여... 내가 졌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떠날수록 두려움은 더욱 더 강하게 내리 누를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미련하다고 합니까? 고집쓰는 사람. 똥고집을 쓰는 사람을 미련하다고 하지요? 도박중독증, 계속 해봐야 패가망신하는 줄 자기도 모르지 않는데, 죄인의 자리에 그냥 계속 눌러 앉아 있습니다. 미련하지요? 이러다 내 인생 망치고 집안 다 망한다는 두려움을 그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돌이키지 않는 사람을 미련 곰팅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왜 힘듭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힘들지요?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힘들고 두렵고... 그 힘듦과 두려움이 점점 더 밀려옴에도 불구하고 도망갈 생각만 하고 돌이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리석다고 하지요? 사실은 도망가면 도망갈수록 더 힘들고 두려움은 더 강해집니다.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왜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 그는 필연적으로 타락하여 욕망의 노예가 되어 인생이 망가지고/ 배우고 깨닫는 기쁨이 없고/ 하나님을 찾지 않고 사람을 연연하여 무너지고/ 그리고 두려움에 눌려 지내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면, 그 삶이 어떠할지 뻔한데, 고집스럽게 하나님을 부인하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없다고 믿을 때에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는가는 다윗이 영감을 받아 노래한 시편 외에, 개개인의 삶의 모습 속에서도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 역사 속에서도 훤하게 나타났습니다.

소위 르네상스로부터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사람들이 정신사에서 꾸준하게 지탱해온 기둥이, 휴머니즘, 인간중심주의(Man-Centeredness)입니다. 인간중심주의는 중세의 반향으로서, 이제는 하나님은 없다고 믿는 신앙과 사상입니다.

그런데 인간독립, 휴머니즘의 회복을 선언한 르네상스 이후, 그 결과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습니까? 과연 인간은 그 가운데 진정한 인간다움, 행복과 가치있는 삶을 누려왔습니까?

인간중심주의가 골격을 이룬, 자연주의, 모더니즘의 결론은 파괴적 사회주의와 허무주의로 귀결되었습니다. 하나님없이 그래도 인간끼리 모여 사는 세상을 잘 사는 세상으로 만들어보고자 했던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은 도리어 엄청난 파괴적 결과를 맞이하고서야 역사의 무대에서 퇴조하였고/ 허무주의는 허무를 극복하고자 하는 온갖 시도들, 심지어 광기를 옹호하는 시도까지 다했어도 여전히 사람들의 목을 조이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인간성은 더욱 더 황폐해졌고, 사람을 등쳐 먹는, 예컨대 선진국이 후진국을 등쳐먹는 것과 같은 이용, 정복, 조작, 종속시키는 현상은 더욱 깊어졌으며 사람들 마음에 두려움의 골은 정말 깊어졌습니다.

사회학자들이 70년대를 불안의 시대, 80년대를 좌절의 시대 그리고 90년대를 공포의 시대라고 불리웠습니다. 여러분은 2000년대를 뭐라고 부르시겠습니까? 광기의 시대... 점점 더 가중되는 불안과 두려움을 이젠 견디지 못하여 미쳐버린 세상이 된 것입니다.

요즘의 세대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지요? 모더니즘 이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없다라는 신앙의 기반 위에서 세워져온 모더니즘이 실패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모더니즘, 무신론적 신앙이 가져다 준 절망과 파괴와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지만... 이 어리석은 세상의 인간들이 문제의 핵심을 보지 못합니다. 아니 문제의 핵심을 인정하려 들지 않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하나님이 없다는 신앙 위에 온갖 시도들 다해봐도 안되었으면, 하나님이 없다는 신앙이 잘못되었구나 회개하고 돌아올만도 한데, 미련하기 짝이없이 오만한 인간은 안 돌아 옵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세상, 어리석은 인간들이지요?

여러분도 혹시 이러지 마십시오. 내 마음과 삶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시기를 바랍니다. 개인의 다양한 모습 속에서도 그 궁극적 뿌리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 존재하고 있을 것입니다.

흔히들 사람들이 생각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합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하였다가 종교재판을 받아 죽은, 그래서 유명해진 과학자입니다. 지구가 둥그냐 네모나냐 사람들의 생각에 논쟁이 한참일 때, 사람들의 생각이 어떠하든지 간에 지구 모양 자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히말랴야 산맥은 조금 높이 솟았을 것이며 태평양 바다는 조금 더 깊었을 것입니다.

지구가 둥근 사실처럼,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사람들의 이견과 관계없이 영원한 사실, 실재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분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인간의 역사 가운데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오늘도 당신의 삶 가운데 일하시고 계십니다.

<5,6절>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하나님은 의인과 함께 하심으로써, 의인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 주심으로써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백성, 순진하고 연약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돌보시며 마침내 그 억울함을 알아주시고 원통함을 씻어 주시고 한을 풀어 주시는 은혜의 손길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계21;3,4>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하나님은 정직한 자에게 그 얼굴빛을 비추시는, 임재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먼저 사랑하셔서 회개케 하셔서 고치시는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성령님은 연약한 자에게 함게 하셔서 눈물을 닦으시는 위로의 성령님이십니다.

당신은 이 실체를 바라볼 수 있습니까? 당신의 마음 눈은, 지금은 부와 권력과 사람들의 추앙이 있다고 큰 소리 떵떵치지만, 속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 이 인생의 실재를 꿰뚫어 볼 수 있겠습니까?

때로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항변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연자맷돌처럼 천천히 돌아가지만, 제일 확실하게 움직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실재를 볼 수 있습니까?

세상에 간신이 충신으로 기억되고 충신이 간신으로 기억되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가까운 예로, 전두환 씨 보십시오. 여러분도 이 사람처럼 살고 싶은 마음은 없지요? 대통령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람들의 욕 바가지로 얻어먹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텐데...

그러므로 서두의 풍자적 유모어에 나타난, 후르시초프처럼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어리석음에서 돌이키십시오. 교황처럼 겉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속으로는 믿지 않는 위선에서 돌이키십시오.

도리어 다윗처럼 당신의 혜안(慧眼)을 맑히십시오. 하나님을 부인하는 마음,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훤하게 꿰뚫어 보십시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사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와 행복의 삶인지를 꿰뚫어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우리도 이렇게 꿰뚫어 보기를 원합니다. 삶의 실체를, 세상의 실체를 꿰뚫어보는 혜안을 노래하기 원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당당히 선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유리 가가린은 ‘지구는 푸르다’라고만 고백했지만, 아폴로 12호의 승무원이었던 제임스 어윈은 우주에서 지구를 보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 멀리 지구가 오도카니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무력하고 약한 존재가 우주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아무런 설명 없이도 느낄 수 있었다. 이만큼 아름답고 완벽한 것을 하나님 이외에는 만들 수 없다.”

우리도 어윈처럼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를 원합니다. 지금은 돈 조금 더 있다고, 세상 권력이 있다고, 사람들의 인기를 받는다고 떵떵거리며 하나님 믿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치지만, 여러분, 메뚜기도 한철이고 인생의 날이 풀의 꽃같지 않습니까? 훗날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손보실 것을 여러분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겉으로 나타난 세상의 영화스러움 이면의 어리석음의 실체를 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세상의 영화의 모습에 기죽지 않으며 넉넉한 믿음을 고백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함께 하시고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정직한 도를 추구하기를 즐거워하며, 연약한 자, 소외된 자에게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의와 사랑을 추구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실제로 신뢰하여 의와 사랑을 추구하여 갑시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을 배워서 담대히 넉넉히/ 살아계신 하나님,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나의 삶에 공의를 세우며, 세상에 정의를 세우며 나의 이웃에게 사랑의 기도를, 사랑의 손을 내미는, 사랑의 삶을 함께 드리워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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