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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애통하는 자의 복 (마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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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규 목사 (성덕중앙교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4)
maka,rioi oi` penqou/ntej( o[ti auvtoi. paraklhqh,sontai
Blessed are they that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애통하는 자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에 부활절 설교를 해야 되는데, 기왕에 산상수훈 강해를 시작했으니 그냥 계속하겠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말씀은 “애통하는 자의 복”입니다.  부활절 날 기뻐하라고 해야 하는데 애통하라는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오늘 말씀의 애통은 불행한 애통이 아니라 복된 애통입니다.  애통이면 애통이지 무슨 복된 애통도 다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애통은 불행한 애통이고 성도들이 하는 애통은 복된 애통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애통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애통 자체가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애통은 불행입니다.  전 국민이 항상 애통하는 나라가 딱 한 군데 있습니다.  바로 지옥입니다.  주님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의 형편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22:13,24:51,25:30)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슬피 웁니다.  그냥 울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빨을 갈고 있습니다.  지옥에 살려면 치아가 튼튼해야 됩니다.  애통은 고통입니다.  몇 차례 애통하고 나면 폭삭 늙어버립니다.  그런데 지옥에서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영원히 울어야 됩니다.  영원히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계속 울어야 하니까 보통 힘든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주로 어떤 때에 애통할까요?  첫째로, 사람이 죽었을 때 가장 애통해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에 애통했습니다.(창23:2)  야곱은 아들 요셉을 잃고 애통했습니다.(창37:34)  요셉은 부친 야곱이 죽었을 때 애곡했습니다.(창50:10)  다윗은 친구 요나단을 잃고 애통했습니다.(삼하1:26)  둘째로, 곤경에 처하든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애통합니다. 시험에 낙방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 실연을 당했을 때 슬퍼합니다.  한나는 아들을 낳지 못해서 애통했습니다.(삼상1:10)  히스기야 왕은 중년에 심각한 별이 들어 애통했습니다.(왕하20:3)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정탐군들의 얘기를 듣고 낙심하여 밤새도록 울었습니다.(민14:1)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애통했습니다.(애가)

  애통은 인간 사회의 중심에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정서를 지배합니다.  가정과 사회와 문화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애통하는 모습은 곧 인간 사회의 모습입니다.  고대 중동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으면 우선 옷을 잡아 찢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통곡합니다.  그 울음소리는 마치 들개나 타조 소리와 같았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미1:8)  그냥 울기만 하는 게 아니라, 울면서 죽은 사람의 칭호를 부릅니다.  “오호라 나의 형제여”(왕상13:30)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렘22:18,34:5)  애통하는 모양도 아주 극성스러웠습니다.  다른 옷은 다 벗어버리고 굵은 베옷을 입습니다.  수염을 잡아 뜯고 머리를 밀어버립니다.  재에서 뒹굴면서 먼지를 뒤집어씁니다.(렘6:26,암8:10)  당사자만 우는 게 아니라 친척 이웃까지 다 와서 같이 울어야 됩니다.  그것도 모자라 목청 좋은 울음꾼을 돈 주고 데려다가 계속 울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암5:16)  울 때에는 남자 따로, 여자 따로 울었는데, 아마 남녀가 톤을 달리하여 합창으로 울었던 것 같습니다.(슥12:12-14)  훗날에는 이런 울음이 발전하여 우는 노래를 만들었는데, 소위 말하는 悲歌입니다.  비가를 부르는 전문 號哭꾼이 생겨났고 그들은 딸들에게 그 비가 부르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예레미야는 저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노래하는 남자와 여자는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대하35:25)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하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보내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부녀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귀에 그 입의 말씀을 받으라. 너희 딸들에게 애곡을 가르치며 각기 이웃에게 애가를 가르치라.”(렘9:17-20) 

  인생들이 우는 모습을 보면 생각나는 표어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는 울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개인적으로 울고, 단체로 울고, 베옷 입고 울고, 수염 머리털 뜯으면서 울고, 집에서 울고, 재에서 뒹굴면서 울고, 집에서 울고 거리 광장에서 울고, 남자 여자 각각 울고, 노래 지어서 울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장례식에서 우는 것은 물론, 모든 삶이 우는 겁니다.  우는 것 빼면 얘깃거리가 없습니다.  유행가 가사를 보세요.  비하고 눈물 빼면 한국 대중가요 절반이 없어집니다.  비가 내리고...눈물도 내리고!  눈물이 많다는 것은 울어야 될 일, 불행한 일이 많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눈물 골짜기입니다.(시84:6)  울면서 태어나서, 울면서 살다가, 울면서 갑니다.  애통은 영원한 절망의 표식입니다. 


복 있는 애통

  이제 세상 애통 얘기는 그만 하고, 복 있는 애통 얘기를 하겠습니다.  복된 애통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습니다.  오직 성도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도대체 어떤 애통이길래 복된 애통일까요? 

  첫째로, 죄를 회개하는 애통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욜2:12)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스10:1)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4:9)  “내가 이 곳과 그 거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왕하22:19)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26:75)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3)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죄 지은 것을 억울해 해야 합니다.  죄 지은 것을 부끄러워해야 됩니다.  죄 짓게 된 자신을 통탄해야 됩니다.  죄를 빨리 씻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통곡해야 됩니다.  왜 육신에 병든 것은 안타까워하면서 영혼이 죄로 병든 것은 가만히 있습니까?  죄 짓게 된 것을 애통해 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동정하는 애통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할 줄 모르는 유대인들을 위해 우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죽음 앞에 무기력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5)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도한 신자들을 위해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19,31)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고후2:4)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국가적 멸망을 바라보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애2:11)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애3:48)

  오늘 우리에게 동정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요즘 국회의원 선거 홍보물을 보면 우는 장면과 웃는 장면이 클로즈업 되고 있습니다.  남이 안 되는 것을 보면서 웃는 장면, 일이 안 풀려서 우는 장면, 어디까지나 나를 위한 눈물이요, 나를 위한 웃음입니다.  易地思之의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내 처지만 슬퍼하지 마시고, 남의 처지도 좀 생각해 보세요.  나 없는 것만 생각 말고 남 없는 것도 생각하세요.  나 병든 것만 생각지 말고 남 병든 것도 생각하세요.  나 괴로운 것만 생각 말고 남 괴로운 것도 생각해 보세요.  나만을 위해 울지 말고 남을 위해 울어보세요.  내 실패만 생각 말고 남의 실패도 생각해 보세요.  남을 동정하여 우는 자는 복 받을 사람입니다. 

  셋째로, 감격의 눈물, 감동의 눈물입니다.  어쩐지 요즘 사람들은 눈이 말똥말똥하고 눈이 뽀송뽀송합니다.  웬만하면 웃지 않고, 웬만하면 울지 않습니다.  아파트 옥상에서,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잘 하면서 감동의 눈물은 별로 없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할 줄 아는 예민한 감성!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감동적인 인생의 비결입니다.  오늘 우리의 감동이 뭡니까?  로또 당첨 감동, 아파트 당첨 감동, 주식 대박 감동, 사업 번창 감동, 시험 합격 감동.... 그런 것 외에는 감동이 없어요.  이 넓은 우주에서 단 몇 가지 사물 외에는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이 없으니 무슨 감동이 있겠습니까? 

  신앙은 감격입니다.  내 인생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감격합니다.  머리터럭 하나의 모습에 감격하고, 심장 뛰는 소리에 감격합니다.  아침 식탁에서 감격하고, 땀 흘려 일하면서 감격합니다.  마른 땅에서 돋아나는 새싹을 보면서 감격하고, 계절이 바뀌는 것에 감격합니다.  평안을 감격하고, 기도 응답에 감격합니다.  천국 소망에 감격하고, 예배에 감격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을 때마다 감격하고 기뻐합니다.  오늘 우리 신앙의 감격이 무엇입니까?  예배당이 커서 감동입니까?  화려한 성가대가 있어서 감동입니까?  스룹바벨 시대에 유다인들은 성전 기초석을 놓고 감격에 겨워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성전을 다 지은 것도 아닙니다.  겨우 기초석이 놓이는 것을 보고 감격했습니다.  성전이 화려해서 감격한 게 아닙니다.  스룹바벨 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감격한 것은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스3: 12-13)


위로를 받는 복

  진정한 애통이 있는 자들에게는 위로의 복이 있습니다.  죄를 애통하는 자, 남을 동정하여 애통하는 자, 감사와 감격으로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의 복이 있습니다.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위로는 큰 복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위로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진정한 위로자가 없습니다.  욥이 재앙을 당했을 때 세 친구가 위로하러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욥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고는 단 한 마디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하고 오더니,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 일, 칠 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욥2:11-13)  친구들은 돌부처처럼 앉아 있다가 욥이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한 마디씩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위로가 아니라 논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욥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욥을 정죄하고 책망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을 향해 이런 말을 합니다.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안위자로구나”(욥16:2)  친구도 진정한 위로는 아닙니다.  평생 함께 사는 부부도 진정한 위로는 아닙니다.  얼마간의 위로는 될지언정 충분한 위로는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가 위로해주기보다는 위로 받아야 될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태평양 같이 넓은 마음으로 품어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세요.  대부분의 남자는 다 밴댕이 속알머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위로 받기는커녕 항상 위로해줘야만 합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이 자신을 위로해주기를 기대합니다.  택도 없는 일입니다.  모두가 위로를 받아야 될 위로의 빈곤자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로는 하나님만이 주십니다.  애통도 하나님께 해야 하고, 위로도 하나님께 받아야 합니다. 

  둘째로,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성령을 보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에 임재하여 계십니다.  멀리서 위로하시는 게 아닙니다.  바로 우리 마음에 떠나지 않고 계시면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성경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란 “위로자”란 뜻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에 나오는 “위로”라는 말이 보혜사란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14:16-17)  우리 영혼이 성령의 다스리심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평안합니다.  성령의 평안!  성령의 위로입니다. 

  셋째로, 말로만이 아니라 인생 문제들을 해결해주시기 때문에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애통을 풀어주셨습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왕하20:6)  하나님은 성도들의 애통을 보시고 결실을 주십니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 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시84: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천국은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는 위로의 왕국입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25:8)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7:17)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30:5,11)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사49:13)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사51:3)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4)

  세상에는 많은 애통이 있습니다.  고난의 애통, 좌절의 애통, 이별의 애통!  그 애통 중에서도 가장 큰 애통은 바로 죽음의 애통입니다.  그 죽음은 바로 인간의 죄 때문에 왔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떠날 때에 하나님은 죽음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이나 죽음을 애통하기 전에 먼저 죄를 회개하는 회개의 애통을 해야만 합니다.  회개의 애통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용서와 구원입니다.  즉,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십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십니다.  용서받게 하시고 영생을 주시고 천국을 주십니다.  진정한 애통, 회개의 애통에는 영생의 응답, 천국의 응답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런 울음을 울어야 합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을까요?  우리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에도 우리에게는 애통이 필요합니다.  죄를 자각하는 회개의 애통, 주님을 믿는 믿음의 애통이 있어야 됩니다.  죄인을 동정하는 동정의 애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격하는 감격의 눈물이 있어야 됩니다.  이런 애통자에게 영생 축복, 부활 축복, 천국 축복의 위로가 주어집니다.  오늘, 세상 애통은 하지 마시되, 복있는 애통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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