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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개의 깊은 데로 나가자 (렘 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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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봉태 목사 (연희교회)

  영성 훈련에 관한 뛰어난 저술가인 리차드 포스터 목사는 말하기를 “피상적인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시대의 암적인 존재”라고 했습니다. 피상적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일이나 사물의 본질적인 실속과는 관계가 없이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현상에만 관계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겉치레로만 하고 깊이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서, 천박하다는 말로도 표현될 수가 있습니다. 고도 산업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고 수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누리며 살고 있지만, 정신세계의 깊이를 상실한 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의 특징인 이러한 피상성은 기독교 신앙에도 전염되어 온 것이 분명한 듯 합니다. 오늘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깊이 있는 신앙의 모습은 발견하기가 어려워져 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설교가 피상적입니다. 그리고 이런 피상적인 설교와 마찬가지로 교인들의 신앙 수준도 피상적인 수준에 그치고 깊이 있게 나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예레미야서의 본문을 보면 이런 신앙의 피상성이야말로 악한 시대의 특징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렘6:14에 보면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고 했는데, 여기서 ‘심상히’라는 말이 피상적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영어성경(NIV)에 보면 이 ‘심상히’는 말이 ‘superficially’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superficial 이라는 단어가 곧 ‘피상적인’, 또는 ‘표면적인, 천박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 나오는 ‘그들’이란 예레미야 선지자가 사역하던 시대에 이스라엘 사회에 만연해 있던 거짓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는 말이 어떤 것이었느냐 하면 늘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그처럼 백성들에게 “평안하다. 평안하다. 괜찮다. 괜찮다,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백성들을 부추기는 거짓 선지자들의 행위는 백성들의 상처를 심상히 치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상히 고쳐 준다는 말은 어떤 질병의 원인을 찾아 근본적인 치료를 해 주지는 않고 겉으로만 치료를 하는 척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주 중한 질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떤 돌팔이 의사가 그 환자를 진찰해 보고 별로 큰 병이 아니라고 안심을 시키면서 겉으로 난 상처만 대충 소독을 해주고 돌려보낸다면 그 환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장에는 안심이 되고 기분이 좋겠지요. 그러나 그런 안심은 잠깐뿐이고 그는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침으로써 결국은 생명을 잃고 말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이 본문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고 한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는 온갖 우상 숭배와 불의한 죄악이 가득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죄악으로 인해서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면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차 이스라엘은 바벨론이라는 이방 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을 당하고 그 백성들은 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하나님의 심판 직전의 삶을 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참 선지자들의 메세지를 자기들을 욕하는 말로 여기며 듣기를 싫어하고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무지함과 완고함을 부추기는 것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니다, 우리에게는 거룩한 성전이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걱정이 없다. 바벨론과 같은 이방 나라들이 우리를 공격했다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다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라고 백성들을 거짓말로 위로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행위는 마치 속으로는 중병에 걸려서 속에서는 살이 썩어 가고 골수가 썩어 가는데도 겉으로 보이는 상처만 대충 치료해 주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돌팔이 의사의 치료 행위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종종 우리 인간의 죄악의 문제를 질병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질병을 치료해 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질병을 치료해 주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우리의 질병의 심각성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질병이 너무 깊고 심하므로 우리 스스로는 그 병을 치료할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럴 때 하님나님으로부터 오는 죄 사함과 치유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복음은 인간의 죄악성과 전적인 타락을 지적하고 인간은 도무지 소망이 없음을 선포하는 데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것은 마치 훌륭한 의사가 환자의 질병의 근원적인 원인부터 먼저 진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기 자신의 죄악성을 깨닫는 데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임하시는 죄 사함과 그 결과로 주어지는 평강이 인간들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아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죄악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며 그런 거짓 평안에 관한 예언들만 믿고 살다가 끝내는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들 내부에 있었던 그 중한 질병을 치료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끝내는 목숨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의 이야기는 결코 우리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닌 줄 압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우리는 진정한 회개의 역사가 없는 그런 거짓된 축복과 거짓된 평안을 말하는 거짓된 복음에 우리가 익숙해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펴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하는 사역이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세례 요한이 외친 메세지는 한마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 고 한 것이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선포한 말씀도 역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고 한 것이었습니다. ‘회개와 천국’ - 이 두 가지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다 한결같이 천국에 들어가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수십 대에 걸쳐서 하나님을 믿어 온 명목적인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또 절기 때마다 성전에 드나들면서 제사와 종교적 의식에 열중할지라도 근원적인 회개가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음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로서 그 나라에는 참된 평안이 있으며 참된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회개라고 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10:34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평안을 주시되 거짓된 평안이나 일시적인 평안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라 참된 평안을 주시는 분으로서 우리가 그런 참된 평안을 얻으려면 반드시 회개라는 대가를 먼저 치러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참된 평안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런 참된 평안을 얻으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참된 회개에 먼저 이르는 일입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우리 마음으로는 주님으로부터 거리가 먼 우리의 삶을 통분히 여기며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도 세상을 더 사랑하며 하나님 아닌 것들을 더 의지하는 우리의 삶에 대하여 진심으로 애통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런 깊은 회개의 역사는 우리 개개인에게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한국 교회 전체에도 일어나야만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합니다만, 교회의 부흥은 곧 회개의 역사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1907년의 한국 교회의 대각성의 역사는 세계적으로 기록될 만한 부흥의 역사입니다만, 그런 부흥의 역사도 결국은 믿는 자 한사람 한사람의 회개로부터 시작이 되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과거 교회의 역사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우리 교회 안에 그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때만이 이 땅에 거룩한 교회의 부흥이 일어날 수 있음을 믿으며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깊이 있는 참된 회개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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