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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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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해 목사 (안디옥교회)

오늘 본문은 신약 성경의 가장 긴 장 중의 하나입니다(71절). 이 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 곧 생명의 빵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그 빵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요 6:33 [이는 하나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그분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이 말씀은 영적인 말씀이었지, 실제적으로 입으로 먹어 위장에서 소화가 되는 그런 빵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안목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육신의 안목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고작 한다는 말이 "주여, 이 빵을 우리에게 항상 주소서"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사실 이들은 이미 6장 5-14절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주님께서 주신 빵과 물고기를 먹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이적을 눈으로 보았고 그리고 그분이 누구인지 직접 들었던 사람들입니다(주님 자신의 증거).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들의 배를 채워줄 것(육신적인)에만 쏟아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말씀을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어렵다는 말을 남기고 주님을 떠났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 주님의 곁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들로 인해 주님을 따르기를 포기하고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66절에 나오는 "제자들 중 많은 자들이 멀러가고"라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제자들이 "더 이상" 주와 함께 다니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여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기적들을 보았고, 주님을 선지자로 불렀으며, 주님을 왕으로 삼고자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생명의 빵"에 대해 설교하시고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리라고 말씀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고 결론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많은 자들이 물러갔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영적인 진리를 제시하자 물러갔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적인 것이 아닌 육신적인 것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당시에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도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까?

1. 육신적인 것을 쫓으면 주님을 떠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수많은 제자들처럼 육신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 주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육신적인 것들을 채우기 위해 사역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이미 요한복은 6장 앞 부분에서 무리들에게 육신적인 배고픔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해 자신을 억지로 왕을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혼자 산으로 피하셨던 분입니다(요 6:15). 만일 주님께서 육신적인 것을 해결하기 위해 오셨다면, 사람들이 원하는 왕이 되셔서 온 세상 사람들의 육신적인 문제들(배고픔, 병 등)을 해결했다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물질적인 풍부함과 육신적인 충족함을 채워주기 위해 사역하신 분이 아닙니다. 또한 단순히 병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 사역하신 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표적과 이적과 기적들을 행하심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행하셨던 것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다가와서 육신적인 욕심을 채우려 한다면, 결국 그러한 사람은 주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로부터는 육신적인 것들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오늘 본문의 많은 제자들은 '주님의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따라다녔던 사람들이었고(요 6:2), 또한 그들은 단순히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 때문도 아니었고 자신들의 육신이 배가 부른 까닭에 주님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요 6:26).
이들이 주님을 따랐던 이유는 지극히 육신적인 이유였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그들의 배를 채워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았어도 따라다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따랐던 이유는 자신들의 배가 부른 까닭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주님께서 자신들의 육신적인 것들을 채워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신쯤으로 생각하고 따라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사업이 잘되고, 병이 낳고, 가정이 화목하고, 공부도 잘 된다는 식의 육신적인 바램으로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요한복음 6장의 많은 무리들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적인 것을 채워주지 않고 영적인 것을 말하게 되면 슬그머니 사라져 버릴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따르기 원한다면 육신적인 욕심들을 버려야 합니다. 결국 욕심으로 인해 죄를 짓는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육신적인 욕심을 굳게 잡고 있을 때, 결국은 주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에는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원숭이 떼와 쉽게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길가 나무 위에서나 사원에서, 심지어 사람 사는 집안까지 겁 없이 침입해서 먹을 것을 훔쳐 달아나곤 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한 원주민이 조롱박과 바나나 몇 개 그리고 창이 넓은 밀짚모자를 준비해 원숭이들이 놀고 있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바나나 하나를 조롱박 속으로 집어넣고는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꺼내서 보란듯이 맛있게 먹는다고 합니다. 물론 나무 위 원숭이들이 숨을 죽이며 이 광경을 보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조롱박 속에다 남아 있는 바나나를 집어넣고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한숨 자는 척합니다. 바나나가 든 조롱박은 사람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던져 놓습니다. 원숭이 떼들이 조롱박 곁으로 모여듭니다. 그중 대장 격인 원숭이가 나무 밑에서 잠자는 사람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며 조롱박 속으로 살그머니 손을 넣습니다. 원숭이는 손에 힘을 주어 바나나를 잡습니다. 이때 사람이 헛기침을 하고 일어나면 놀란 원숭이가 풀쩍 뛰어 나무를 잡고 도망치려 합니다. 그러나 한 손이 조롱박 속에 있기에 나뭇가지를 잡을 수 없어서 결국 잡히고 맙니다. 조롱박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자기 손만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물끄러미 보고 있는 원숭이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우스꽝스럽고 불쌍해 보입니다. 손발이 묶인 것도 아니고 도망갈 나무숲이 없어진 것도 아닌데 왜 원숭이가 그 곳으로 돌아가지 못합니까?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바나나를 쥔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나나를 쥔 손을 풀고 박에서 손을 빼었다면 원숭이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원숭이는 욕심 때문에 결국 자유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육신적인 욕심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야 하는 자유를 잃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2.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면 떠나게 됩니다.

성경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 2:15 [세상도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를 사랑함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우리는 이미 이러한 설교를 여러 차례 들었고, 그리고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을 따르면서도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의 두 마음 때문입니다.

약 1:8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그의 모든 길에 안정이 없느니라.]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소돔과 고모라를 사랑하여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을 향해 장막을 쳤을 때, 그는 아브라함을 떠났고 하나님의 은혜를 떠났던 것입니다.
롯의 결말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예표인 소돔과 고모라를 사랑했던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시집간 두 딸을 잃는 비참한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롯은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예표인 아브라함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게 되면,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잊게 되며, 그 결과 주님을 떠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돈을 사랑해도 주님을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돈이 나쁘다거나,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죄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떤 관원이 주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는 주님께 영생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눅 18:18-23 찾아 읽을 것.

관원이 주님을 따르지 못한 이유는 그가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부자들이 다 주님을 부자 관원처럼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시체를 매장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부자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나오는 바나바도 역시 부자였습니다. 또한 빌레몬서의 수신자인 빌레몬 역시 부자였던 것입니다.
모든 부자가 다 주님을 따르는데서 떠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부자 관원은 돈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가 돈이라는 제목으로 설교 할 때, 부자 교인이 흥미있게 듣고 있었습니다. 웨슬레 목사는 돈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기능대로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복은 부요하게 하며, 그는 복과 함께 슬픔을 더하지 아니하시느니라."(잠10:22)의 말씀에 근거하여 돈의 원리를 설교했습니다. 부자는 이쪽 저쪽을 둘러보며 보라는 듯이 오늘의 말씀이 옳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웨슬레 목사는 계속해서 첫째 돈을 모아야 한다라고 설교하자, 부자는 옆 사람을 보고 말씀을 잘 들으라고 했습니다. 둘째 돈을 남용하지 말고 저축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설교하자, 부자는 아멘 아멘하며 소리를 쳤습니다. 셋째 그 돈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니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하자, 부자는 설교가 틀렸다고 말하고 나가버렸던 것입니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니, 이것을 욕심내는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슬픔으로 자신들을 찔렀도다.]

3. 육신의 열정만으로 일하면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육신의 열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육신의 열정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하려고 덤벼듭니다.
베드로는 가장 열정적으로 주님을 섬겼던 제자였습니다.

마 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주께 말씀드리기를 "설령 모든 사람이 주로 인하여 실족할지라도 나는 결코 실족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하니]

요 13:37 [베드로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어찌하여 내가 지금 주를 따라갈 수 없나이까? 내가 주님을 위하여 나의 생명을 내어 놓겠나이다."라고 하더라.]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을 잡으러 왔던 사람의 귀를 칼로 베어 낼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멀찍이 따라갔고 결국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열성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는 맥도 못추는 풍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성만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면, 결국 그 열성이 사그라질 때 주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열성도 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청지기는 열성있는 청지기가 아니라 신실한 청지기인 것입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변함없이 꾸준히 일하는 것을 포함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육신의 열성만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임하는 분이 있다면 주의하십시오. 육신의 열성이 식을 때 양초가 다 타서 사라지듯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개인적인 헌신을 원할 때 무리들이 떠났듯이 슬그머니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에 의하여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계속적으로 지속되는 하나님의 사역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4. 자기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면 떠나게 됩니다.

마 16:24 [그 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막 8:34, 눅 9:23)
"십자가 없이 면류관도 없다."는 말은 너무나도 정직한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을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적합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면류관은 바라면서 정작 져야 할 십자가는 거부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하며, 죄와 심판에 대해서 경적을 울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라는 곳에서 더 이상 지옥도, 영원한 형벌에 대한 경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져야 했는지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저주의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까? 인간인 우리의 어떤 능력으로도 죄를 제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저주가 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부활로써 영광의 면류관을 받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져야만 면류관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본을 보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들은 단순히 교회 봉사 잘하는 것을 십자가로 생각하게 만들고, 교회 헌금 많이 내는 것을 십자가라고 생각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너 나아가 복음을 전하다가 겪는 고난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할 십자가인양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만일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렇게 허약하고 나약한 종교인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겠습니까? 육신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과연 자기 십자가를 지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라고 하면 지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자 하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이 떠날 것을 걱정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양떼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목자이신 주님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고,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에게도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 갈 곳이 어디입니까? 세상입니까? 세상은 곧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돈이나 명예입니까? 역시 사라져 버릴 것들입니다.
나 자신의 육신적인 안목입니까? 우리의 육신적인 안목은 너무나도 편협합니다. 바로 그 육신적인 욕심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죄들로 인해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한다고 해도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너무나도 의미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보십시오.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주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나이다."
바로 그렇습니다. 주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떠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에게, 그리고 육신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말씀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믿을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생의 말씀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가야 하는 곳은 생명의 말씀이 있는 주님의 품속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육신적인 생각과 욕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결국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게 되면 주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적인 열성만으로 주님을 섬기려 한다면, 결국 그 사람도 주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를 거부한다면 그 사람 역시 머지 안아 주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왔던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었습니다.
눅 9:57-62 찾아 읽을 것.
누가복음 9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주님을 따르겠다고 왔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육신적인 것이 부족하자 떠나갔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주님보다 먼저 사랑하는 무엇인가가 있었기에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육신적으로 너무 바쁜 사람, 곧 육신적인 열성이 넘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역시 떠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도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곧 떠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물으실 것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저와 여러분은 대답은 분명히 베드로의 대답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구석진 곳에 오늘 설교의 내용과 같은 것들을 숨겨두고 있다면, 우리 역시 많은 무리들에 섞여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이나 욕심을 버리고, 세상을 사랑함과 돈을 사랑함을 버리고, 육신적인 열성만으로 일하는 것을 멈추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생명의 말씀되시는 주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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