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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나은 본향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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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대광교회)

  저는 여러분의 사랑과 기도 가운데 여행을 마치고 잘 돌아왔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저희들이 살던 정다운 거리, 반가운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그 동안의 삶을 함께 나누며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기간동안 한국에도 깜짝 놀랄 여러 변화와 뉴스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미국도 큰 슬픔의 소식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도 이미 보도를 통해 아셨겠지만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레이건이 사망한 것입니다. 레이건은 역대대통령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때에 된 사람이고, 또 가장 오래 살았던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그는 재임하는 기간동안 미국과 세계를 번영과 안정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가장 잘 연설하는 대통령으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신문과 방송, 그리고 모든 매스컴도 지난 한 주간 내내 온통 그에게 집중했습니다.

  레이건은 오래 병상에서 지낸 사람입니다. ‘알츠 하이머’ 라는 병에 걸려 이미 죽음이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죽음이 임박해 오면, 유언도 남기고, 삶도 정리합니다. 레이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문을 보니까, 그가 남긴 여러 말 가운데 번뜩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고향으로 갈 때가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고향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돌아갈 고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곳을 가리켜 ‘본향’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은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더 좋은 본향, 고향으로 점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진리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짧은 인생을 살다가 영원한 본향으로 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본향을 생각하고, 본향을 찾아가는 신앙이 그들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그들의 초점이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의 삶이고,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귀한 신앙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 부르고, 믿음으로 살다 간 인물들을 한 사람씩 소개합니다. 이들은 모두 더 나은 본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합니다. 본문의 시작에 언급된 ‘이 사람들’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본향을 향하면서 언제나 마음 깊이 새겼던 삶의 태도와 의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더 나은 본향을 향하면서 그들은 인생을 어떤 자세로 살았을까요?

  우선, 외국인처럼 생각했습니다. 본문 13절에 분명히 언급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자신을 외국인처럼 여기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외국인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다른 나라 사람’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많은 외국인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국을 떠나 미국을 가든지, 다른 나라에 가면 모두가 외국인입니다. 그곳에서 오래 살고, 설령 뿌리를 내리더라도 우리는 영원한 한국인이요, 외국인입니다. 제가 이번에도 만난 여러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외국인처럼 산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미국인에게 있어서 우리는 외국인입니다. 여기 한국에 사는 다른 나라의 사람도 외국인입니다.
같은 관점에서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정해진 영토에서, 거처를 삼아 집을 짓고, 터를 잡고 삽니다. 그러나 늘 외국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그들 신앙과 삶에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이 외국인처럼 생각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신앙인으로서의 소속과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소속이 어디입니까? 그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입니다. 신앙인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통치하는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분의 자녀요,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자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이것이 1세기를 살던 성도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고난 당하는 당시 성도들에게 주신 강력한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당시는 로마의 시민권만 있으면 부러울 것이 없던 세상이었습니다. 바울도 로마의 시민권으로 아주 유용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원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시민권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계의 강대국이란 이름으로 그 나라의 시민권을 갖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강대국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 애를 씁니다. 심지어 그것을 얻기 위해 추잡한 행동도 합니다. 도대체 시민권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만 있으면 부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하늘나라의 시민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부러울 것이 없고,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여기에서는 고난을 당하지만, 이제 영원한 세계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소속을 늘 확인하며 힘과 용기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늘나라의 시민권자입니다.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무서울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이 무서울 게 있습니까? 이 확신과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고 우리의 믿음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천국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신앙은 헛된 것이요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시민권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당당하게 사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강력한 나라의 확실한 백성입니다.

  혹 아직까지 이처럼 고귀한 시민권을 갖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없고, 내세의 소망이 없습니까? 우리는 이것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으면 시민권은 자동으로 얻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드려, 하늘나라의 시민권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불안한 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나그네처럼 살아야 합니다. 계속되는 말씀에서 그들은 ‘나그네’처럼 살았다고 말합니다. 본향을 찾아가는 사람의 자세는 이 세상에서 외국인처럼, 또 나그네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그네가 무엇입니까? 우리 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중에 박목월씨는 ‘나그네’ 라는 시를 통해 그것을 잘 설명했습니다. 한마디로 '구름에 달 가듯 가는 사람'입니다. ‘여행자’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여행입니다. 칠십과 팔십의 삶을 살다가 가는 여행자입니다. 신앙인은 이런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생을 나그네처럼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나그네의 특징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그네는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어떤 좋은 곳에도 미련을 갖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아무리 화려한 곳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아무리 편한 곳이라도 안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그네의 특징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의 삶이 이랬습니다. 그들은 어떤 것에도 미련을 갖지 않았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참 필요한 삶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나그네처럼 살기를 원한다면 이제 우리는 욕심부터 버려야 합니다. 욕심이 우리를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욕심이 나를 추악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더 가지려고, 더 쥐려는 욕심이 잉태하면 반드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세상을 산다는 것은 우선 욕심부터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욕심을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가 없고, 하나님이 원하는 바르고 참된 삶을 살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그네처럼 우리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과거라도 거기에 매여 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꾸 과거를 들먹이는 이유는 지금의 현재가 별 볼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가 좋아 보십시오. 굳이 과거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과거의 화려한 경력이 있었지만 현재가 좋으니까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같은 관점에서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현재라도 우리가 여기서 안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미래를 향해 가는 사람입니다. 현재에 안주하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나은 미래가 있기에 지금에서 만족하지 말고 더 멀리, 높이 날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살아야 할 것을 두 가지의 말씀을 통해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는 ‘변화산 사건’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산에서 변형되었습니다. 그 때 그 화려한 모습 앞에 베드로는 ‘여기에 있는 곳이 좋사오니’ 하면서 현재에 안주하려 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산에서 내려가라고 하셨습니다. 현재에서 미래로 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금이 좋아 보여도 더 좋은 길이 있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갈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이 비유를 우리가 압니다. 어떤 부자가 있어 호화롭게 삽니다.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는 지금이 너무도 좋았습니다. 현재에 만족했습니다. 지금의 삶이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밤 그 영혼을 부르시면 그가 가진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그 사람을 주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끔 베드로처럼 ‘여기가 좋사오니’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더 나은 세계, 더 나은 삶을 향해 가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현재에 안주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을 어리석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결코 자기 발전이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개혁하고, 변화하고, 성장해야 할 사람입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은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자기를 개발한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야망을 가져야 합니다. 결국 꿈과 비전이 자기를 발전하게 합니다. 그 길이 힘들어도 내 딛어야 합니다. 그래야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그네처럼, 욕심을 버리고, 안주하지 말고, 더 나은 세계, 더 나은 미래, 더 나은 본향을 향해 도전하며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순례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이 전체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핵심적인 의도는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움직임과 활동에 대해 강조합니다. 그 움직임을 가리켜 성경은 순례자, 순례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바로 거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날마다 순례자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인생을 순례자처럼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길을 떠나는 사람들인데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요? 물론 궁극적으로 자꾸 가면, 하늘나라에 다다를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그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러니까 순례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뵈옵고, 그분이 계신 곳에 머물기를 원하는 것이 가장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원래 ‘순례’라는 말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만 성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년에 적어도 한차례 백성들은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것이 신약시대,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점점 확대되었습니다. 그들이 흩어져 살면서 가진 최대의 꿈은 한번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희망으로 살았습니다. 이 순례가 타락한 중세시대에는 많이 왜곡되고 말았지만 원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순례 그 자체는 정말 필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순례의 길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요,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에게 하나님을 뵙는 것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 힘과 용기를 얻고 다시 삶의 현장으로 갑니다. 그리고 또 순례를 꿈꾸며 삽니다. 이것이 삶에 반복되었습니다. 이것이 순례자의 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순례자처럼 산다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이 기뻐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오늘도 순례의 길을 찾아온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만나러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배를 마치며 다시 삶의 현장으로 갑니다. 그러다가 다시 또 하나님을 찾아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반복하다가 우리의 인생이 마치면 영원한 세계에서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뵈오며, 더 이상 길 떠나는 일없이 함께 삽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례자의 길에 무엇보다도 그분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찾아 그 길로 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순례자로 보여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 분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이것을 먼저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그분이 살아 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 상주시는 하나님이란 곧 우리의 삶을 평가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분명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그 뒤의 삶은 나의 행동이 중요합니다. 잘하면 상을 주고, 내 삶은 반드시 평가를 받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평생 복음을 위해 땀과 눈물과 피를 쏟으며 헌신했던 사도 바울과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한 십자가의 강도와 같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삶을 평가하시고, 상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어떤 마음을 품고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하겠습니까?

  저는 미국으로 떠나는 날 새벽기도를 인도하면서 저에게 큰 도전과 은혜를 받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요즘 사무엘상을 묵상하는데 다윗이 그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을 이루었던 사건입니다. 오늘 주보의 설교 요약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제목을 ‘두 몫의 인생’이라고 붙였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그를 도왔던 사람 중에 제사장 아히멜렉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를 통해 큰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아히멜렉을 비롯하여 제사장 85명을 살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뒤 다윗은 이 모든 일이 ‘나의 연고’라고 하면서 통곡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평생 그들을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이제부터 85명의 몫을 감당하겠다고 다짐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사람들의 몫까지 감당하겠다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85명의 몫을 감당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두 몫은 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에게는 나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몫이 있고, 또 나의 몫이 있습니다. 이미 두 몫은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기도도, 봉사도, 믿음도, 생활도, 두 몫은 하겠다는 자세로 살아 보십시오. 분명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언젠가 우리의 삶을 평가하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설 수 있고 큰상을 받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외국인처럼, 나그네처럼, 그리고 순례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 주신 이 귀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한 주간도 하나님을 향하여, 아름다운 순례의 길을 떠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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