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시험 당할 때의 신앙인의 자세 (고전 10:12-13)

  • 잡초 잡초
  • 668
  • 0

첨부 1


- 설교자 : 서정호 목사 (영암교회)

지혜로운 농부는 겨울철에 파릇파릇 싹이 나는 보리밭의 보리를 사정없이 발로 밟아버립니다. 왜 보리를 밟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보리는 이삭이 잘 자라면 한 포기에 450알이나 열리는데 처음 돋아난 줄기가 그대로 자라면 그렇게 많은 낱알을 떠받칠 수가 없습니다. 100알 정도가 고작인데 그래서 농부는 보리가 싹을 내면 발로 밟습니다. 그러니 올라오던 싹이 꺾어집니다. 그러나 그 꺾어진 싹이 죽는 것이 아니고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새로 일어날 때는 처음과는 비교가 알 될 정도로 강한 줄기가 됩니다. 발에 밟힘으로 더 많은 이삭을 맺을 수 있는 강한 줄기로 자라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해야 합니다. 시련과 고난의 훈련을 통하여 더 강한 사람, 열매 맺는 사람으로 성숙합니다. 이런 점에서 시련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더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은혜의 손길입니다.

우리 모두 아름다운 세상의 주인공 

조금 깨어져 금이 가고 오래된 못생긴 물항아리 하나가 있었는데 그 항아리의 주인은 물을 길어오는데 사용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 주인은 깨어진 물항아리를 버리지 않고 온전한 물항아리와 똑같이 아끼며 사용했더랍니다. 깨어진 물항아리는 늘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온전치 못하여 주인님에게 폐를 끼치는구나. 나로 인해 그 귀하게 구한 물이 새어버리는데도 나를 아직도 버리지 않으시다니…."

어느 날, 너무 미안하다고 느낀 깨어진 물항아리가 주인께 물었습니다. "주인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고 새로운 온전한 항아리를 구하지 않으시나요. 저는 별로 소용 가치가 없는 물건인데요." 주인은 그의 물음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물항아리를 지고 계속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길을 지나면서 조용하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얘야, 우리가 걸어온 길을 보아라." 그제야 물항아리는 그들이 늘 물을 길어 집으로 걸어오던 길을 보았습니다. 길가에는 예쁜 꽃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듯 싱싱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주인님, 어떻게 이 산골 길가에 이렇게 예쁜 꽃들이 피어있을까요?"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습니다. "메마른 산 길가에서 너의 깨어진 틈으로 새어나온 물을 먹고 자란 꽃들이란다."

우린 모두 다 완전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불완전하기에 다들 의지하며 살 부비고 살아갑니다. 시련이나 실패나 시험 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성공한 사람들보다 시련, 실패, 시험을 통해 더 큰 일들을 이루어온 인생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자전거를 가르칠 때 어린아이들 뒤에서 붙잡습니다. 붙잡고 한참을 나가다가 손을 놓아야 됩니다. 이 손을 놓지 못하면 이 얘는 자전거를 못 배우고 맙니다. 너무 귀하게 키우느라고 발 다칠까봐, 손 다칠까 봐, 넘어질까 봐, 무릎 깨질까 봐... 그렇게 걱정한 나머지 자전거 못 타는 사람 많습니다.


시험에 대한 편견

또한 시험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환경만이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시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좋은 환경은 사실은 더 큰 시험입니다. 또 하나는 시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시험입니다. 이거 위험한 것입니다. 일이 잘되고, 평안하고 그럴 때에 이건 시험이 아니고 오로지 축복이라고만 생각하는데서 문제가 됩니다. 반대로 어려운 일을 당하면 병도 들고, 사업도 실패하고, 배신도 당하고, 직장도 떨어지고 하면 이것은 시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또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려운 일을 당했으므로 더 큰 죄에 빠질 수는 없습니다. 거기서 악한 행위가 중단됩니다. 무력해 집니다. 그런고로 생각을 고치기에 따라서는 가장 중요한 생의 출발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여건만 당하면 이게 시험 당했다 생각을 하고 또 어떤 때는 악한 사람에게 시험이 있는 줄 알고 죄 지었을 때만 시험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간혹 이런 넌센스도 있습니다. 어느 권사님이 같은 병인데 잘못 되어서 수술을 세 번이나 받은 교인 가정에 심방을 가서  죄가 얼마나 많으면 남은 한 번도 안 받는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느냐? 하면서 회개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이 기도 받은 교인이 참 마음이 아프고 괴로워하면서 할 수 없이 입을 열어서 기도하는 말이 “나는 죄가 많아서 수술 세 번 받았수다. 그런데 당신은 무슨 죄가 많아서 아들 딸 하나도 낳지 못하고 남의 집 대를 끊어 놓았어요?” 장군 멍군 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문밖으로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혹이라도 누가 어려운 일 당했을 때 죄 때문에 시험 당했다고 하거나 동시에 선한일이 있을 때나 일이 잘 될 때에 마치 이것은 축복이요 시험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비성서적 교리일 수 있습니다. 시험을 당했다고 해서 그가 죄인이라고 생각해도 안 되고, 또한 일이 잘 되었다고 해서 그가 자동적으로 마치 의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생각할 때 어느 때든지 누구에게든지 어떤 일이든지 시험은 있습니다.

시험의 완충지대는 없다

시험의 완충지대는 없습니다. 어디나 시험은 있으며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문제는 시험이냐? 시련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꼭 같은 사건인데 그것을 감당하는 사람에 따라서 시험이 될 수도 있고, 시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읽어도 성경은 이것을 하나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통하여 우리는 모르는 것을 알게 되고 사건을 통해서야 깨닫게 되고 나 자신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깨닫게 되고, 또 이웃에 대해서 이웃의 고마움도 알게 됩니다. 때로는 알고도 행치 않은 일이 있었는데 이제 행하게 됩니다. 내가 못하는 것 시험을 통해서 하게 만듭니다. 또 하나 내가 끊지 못하는 것 하나님이 끊게 만듭니다.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 버리게 만듭니다. 선과 의를 지향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그 길로 강제적 강권적으로 인도합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바로 그것이 시험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그 깊은 뜻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현재적으로 고민할 때 현재적으로 번민하고, 현재적으로 의심할 때 문제는 여기에 깊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생은 크고 작은 시련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련이 없는 인생은 없다는 뜻입니다. 늘 바람이 없는 맑은 날만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언제나 폭풍우 가운데서만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시절이 있는가 하면 고통스런 시절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읽은 동화들은 모두 행복한 결말로 끝났습니다. 착한 주인공은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지만, 결국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이 세상에는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들만 있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 악한 사람들만 물리치면 이 세상은 살기 좋은 곳이요, 아무런 문제도 없이 모든 것이 잘 되어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완전한 사회와 완전한 사랑은, 악한 자만 없어지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악한 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줄로 알았던 우리 안에 악이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선한데 다른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고치기 어려운 나쁜 습관이 있고, 약점이 있고, 자신이 생각해도 싫은 면이 있는 것입니다.

행복하고 완벽한 인생에 대해 꿈은 동화 속에서만 있는 것이지 현실 사회의 실상은 아닙니다. 왕자와 공주가 만나 결혼했다고 행복한 생활만 계속될 수 있겠습니까? 결혼은 새로운 갈등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람은 갈등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갈등을 원만히 해결하면서 행복을 찾아내는 사람입니다.

인생에는 크고 작은 시련이 있습니다. 이 시련으로 인해 우리는 갈등하게 됩니다. 성경 가운데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부러워하고 다윗을 부러워 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친구"라고 칭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사41:8, 약2:23, 대하20:7) 친구란 가장 가까운 사람이란 뜻입니다. 친구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하려는 것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창 18:17)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눅12:4,요15:14)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삼상 13:14, 행13:22)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생애는 평탄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친구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그들의 생애는 시련이나 고통이 없이 평안과 형통 그 자체였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기록된 그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여느 사람 못지않게 힘든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일생 나그네로서 살았습니다.(창 23:4) 그가 소유한 땅이라고는 그와 아들 이삭 손자 야곱이 묻힌 막벨라 굴 뿐이었습니다. 자기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에서 떠돌이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입니까? 아브라함은 두 번이나 아내를 빼앗길 뻔 했고 오래도록 사라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했으며, 아내 사라와 첩 하갈 사이의 질투와 갈등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어떠합니까? 다윗은 사울왕의 질투와 박해를 피해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간 적도 있었고, 아기스를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유지한 적도 있었습니다. (삼상21:10-15) 왕이 된 뒤에도 환란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신하들 사이에 세력 다툼이 일어나는가 하면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여 스스로 왕이 되기도 하고, 아들들 사이에 후계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라 하여 시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도 어려움은 있습니다. 이 말을 역(逆)으로 보면 시련이 있다고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모세 역시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출애굽)와 영적 축복과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대신, 그들이 애굽에서 행하던 우상 숭배의 악습에 다시 빠져들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유와 특권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음란과 방종과 원망과 다툼 속에서 살았습니다. 바울 당시 고린도교회의 모습도 이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광야 세대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거울이 됩니다. 과연 세례와 성찬을 경험한 사람(애굽을 나와 홍해를 건넌 사람)에게는 사탄의 유혹과 시험이 없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자유와 특권을 받았다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됩니까?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교만과 자만과 방종과 방탕으로 나아가지 않고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유와 권리는 언제나 약한 자들에 대한 배려와 돌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며 성령의 은사들을 경험해도 교만하면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12절)는 바울의 권면을 마음에 새겨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을 의존하며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13절).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교만입니다. 교회 분열도 교만한 신자들에게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지도자에 대해 투덜거리고, 동료 신자들을 판단하며 분열을 조장합니다. 교만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을 멸시하도록 부추깁니다. 또한 교만은 우리가 많은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도 더 영성이 있다고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자신과 같은 영적인 경험을 갖지 못한 사람, 다른 교단 혹은 다른 성(性)을 가진 사람을 무시한다면 자신 안에 교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 세대를 거쳐 하나님은 교만에 의해 저질러진 파괴와 상처를 보아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붙들고 있는 교만의 권세에서 우리가 자유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연약함 안에서 온전해집니다. 자신을 연약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삶 속에서 그분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인정할 때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것처럼 말하지만 그 행동이 신앙적이 아닌 사람은 신앙이 죽은 자입니다. 조화는 먼지만 털면 되지만 살아 있는 꽃은 물을 필요로 합니다. 자신이 이미 온전히 섰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이 되어 있다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험을 당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그 어떤 시험이든지 우리가 감당 못할 시험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험 당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할 길을 주신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시험에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 께서 만들어 놓으신 길입니다. 그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실패하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성급한 결론과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외고집입니다. 남의 말을 충분히 들어보지 않고 결론을 내립니다. 상황을 충분히 살펴보지도 않고 해답을 내립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한번 생각한 것은 도무지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시험을 이겨나가기 위해서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 길을 보여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그 시험을 받지 않게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시험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끝없는 추락"이란 없습니다. 떨어지는 것은 날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떨어뜨리는 것은 더 높이 날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시험을 감당하게 하신다

시험 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고 위로해 주십니다. 두려워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시험을 능히 이기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아이성 공격에 한 번 실패한 여호수아는 재차 아이성을 공격하려 했을 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나타 나셔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을 다 이스라엘 손에 주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능히 아이성을 점령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밤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이라고 무서워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두려워 말라"고 안심시키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시험을 감당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시험이 있을지라도 두려워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감당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십니다. 또한 여러분이 시험 당할 때 피할 길을 내시고 그 시험이 연단이 되고 그 연단이 축복이 되게 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 시험을 능히 감당케 하십니다. 시험으로 인해 두려움과 절망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앞이 꽉 막힌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때로는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시험 가운데 길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지나온 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실로 많은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낙심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나중 보니 거기 하나님 예비하신 길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길이 없었더라면 우리 인생 여정은 이미 다 끝났고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피할 길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지금 당하는 시험도 마찬가지입니다. 길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시험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시험과 함께 피할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시험은 앞이 막혀 있는 골짜기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길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릴 때 하나님 예비하신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결론을 말합니다.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결국 시험을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능히 너희로 감당하게 하셨느니라"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뜻은 벳세다에 머물고 안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인정해 주고, 나를 알아주고, 내가 익숙해하는 곳에서 일어나 게네사렛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익숙한 것으로 부터의 결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숙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삶의 자리에서, 영적인 생활로의 "패턴변화"를 말하고 "방향전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에가 고치를 뚫고 나올b때 죽는 것 같은 고통이 따르듯이, 산모가 아이를 출산할 때 까물어 치듯이, 성도 한 사람이 이 풍랑을 뚫고 나가려 할 때, 교회 하나가 이 풍랑을 뚫고 세워지려 할 때, 한 가정이 하나 되려 할 때 허리가 꺾이는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기 교회의 한 여 집사님이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가 괴로움을 겪는데 거기에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딱하고 답답한 나머지 목사님이 한번은 여 집사님을 위로합니다. "나는 당신과 당신의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집사님이 묻습니다. “목사님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시어 당신의 고난을 면케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집사님은 "목사님, 그렇게 기도하지 마세요, " 하고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는 이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은혜를 다 받으려고 합니다. 끝까지 참고 견딜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님 제가 그 축복을 받아냄으로써 오늘 당하는 이 고난이 헛된 고난으로 끝까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세요."

옳은 이야기입니다.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이 헛된 것으로 돌아가지 않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크고 놀라운 축복,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예비하신 축복을 꼭 받을 수 있게 해주세요”. 이것이 시험을 당하는 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시험은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입니다.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유익한 것입니다.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시험은 고통스럽게 힘듭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면,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시험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더욱 성장시키시고, 우리를 더 큰 은혜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이제 우리도 기쁨으로 시험을 감당하십시다. 하나님 감당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줄로 믿고 믿음으로 나아가십시다. 그리하여 시험을 이김으로 하나님 주시는 축복과 승리의 영광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귀한 말씀 주신 것 감사합니다. 땅 위에 사는 동안 여러 가지 시험 당하는 저희들에게 감당할 수 있도록 귀한 말씀으로 약속하셨사오니, 이 말씀 잘 붙잡고 시험에서 승리하므로,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 주시고자 하는 모든 은혜와 축복 누리를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 ㄱ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