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환경주일] 생명을 살리자 (창 1:26-31)

  • 잡초 잡초
  • 263
  • 0

첨부 1


- 이영기 목사 (진주제일교회)

지난 2월 22일, 경찰청 외사범죄수사대 박경진 경사가 경기도 파주시 봉암으로 낚시하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낚시하면서 낚시꾼들로부터 “공장 때문에 낚시터 물이 더러워졌다. 악취 때문에 못 살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뭔가 있다고 생각한 박경사는 곧바로 탐문수사에 들어갔습니다. 공장에 가보니 ‘메이드 인 차이나’ 라고 쓰여진 플라스틱 박스에 단무지가 가득 쌓여 있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중국산 단무지를 국산으로 속여서 파는 곳이 아닌가 생각했답니다.

3월 초, 다시 이곳을 찾은 박경사는 유해화학약품통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 범죄혐의를 확신했고, 같은 달 9일, 수사대 권선영 팀장 등과 함께 수사하게 된 것이 소위 쓰레기 만두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이곳에서 단서를 잡은 경찰은 결국 3,440 톤의 만두소가 유통된 사실을 밝혀내게 됩니다.
그렇게, 먹거리가 더 이상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살리기 위해 먹는 건지, 죽기 위해 먹는 건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환경부에 의하면, 지난 해 유독물 유통, 취급 실태를 분석한 결과, 유통량은 2천 125만 1천 톤으로 2002년 1천 990만 8천 톤 보다 6.7% 늘었다고 밝혔습니다. 이 유독물의 독성은 물 속에 들어간다고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땅 속에 들어간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물 속이든, 땅 속이든, 공기 속이든, 그 독성은 그대로 유지 되는 겁니다. 결국 그것들은 우리의 몸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1920년대 일본 도야마 현, 조그마한 어촌의 사람들에게 이상한 병이 나타났습니다. 뼈마디가 풀리고 금이 가 기침만 해도 갈비뼈가 부러졌습니다. 너무 아파서 병 이름이 ‘이타이이타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아프다 아프다’ 라는 뜻입니다.

최근 경남 고성군 삼산면 병산리 주민들에게 나타난 질병이 이타이이타이병이 아닌가 하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30년 전 폐쇄된 구리광산 계곡 물을 사용한 주민들에게 이타이이타이병 의심 증세가 보인다고 지역 환경단체가 발표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도 온몸이 흔들거리고, 굽어버린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서 있는 것도 힘에 겹답니다. 올챙이와 개구리는 이미 논을 떠났답니다.
뒤늦게 조사 나간 우리 정부는 “환경단체 자료를 분석하니 이타이이타이병이 아닌 듯 하다”고 안심하라는 듯이 말합니다. 지금 사람이 아파 고통을 겪고 있는데, 이타이이타이병만 아니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겁니까?

지금, 90여 가구 200여명의 주님 사이에는 이타이이타이병에 대한 불안감이 커져가고 있고, 마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주문이 끊겼습니다. 지난 3일 환경운동연합의 발표이후 고성지역 대표적 쌀 브랜드라 공룡나라 쌀은 지난해 대도시의 백화점, 쌀 집 등 170여 곳에 2억 8천여만 원어치나 팔린 유명 브랜드입니다. 마을 주변 횟집 10여 곳도 매출이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정은 바닷가를 끼고 있는 고성군 일대 횟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산면 뿐만 아니라 주변 하일 도산면 일대 50여 곳 횟집들까지 손님이 크게 줄었습니다.

로마서 8장 22절에,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피조물.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입니다. 그들 역시 신음하고 있다는 겁니다. 피조물은 인간의 타락 때문에 썩어짐의 종노릇 허무한테 굴복하면서 엄청난 고통을 당해는 것입니다.

물론 로마서 8장 18-27절까지의 내용은, 피조물도 오랜 세움 신음하며 고통하면서 지금까지 기다려 왔듯이 우리도 잠시 잠깐 당하는 고난을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만, 피조물도 고난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처음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삽니다.
“무슨 소리냐? 짐승 세계의 약육강식이 어찌 하나님의 섭리냐?”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바로 그 약육강식에 의해 짐승세계의 질서가 균형이 바로 그 약육강식에 의해 짐승세계의 질서와 균형이 유지되어 진 것입니다.

뱀이 좋다고 해서 뱀을 잡아 먹었습니다. 벌써 12년 전인가, 평화의 댐이 있다는 곳으로 여름에 잠시 휴가 간 적이 있습니다. 몇 집 안 되는 마을에 뱀을 잡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구렁이 한 마리 잡은 것 보여주며 자랑하셨는데, 그분의 말씀은 뱀 구경하기 힘들다는 겁니다. 하도 잡아서 뱀 구경하기조차 힘들답니다. 대부분 국내 유통되는 뱀은 수입한 거랍니다. 이거 10여 년 전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뱀이 없으니 들쥐 같은 것이 더 많아진 겁니다. 소위 먹이 사슬 고리가 끊겨진 겁니다. 뱀 싫어하는 분은 징그러운 뱀이 다 사라지면 좋겠다고 하겠지만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뱀이 없으면, 뱀이 잡아먹고 사는 그 어떤 동물의 번식이 그만치 늘어날 것이고, 뱀을 잡아먹고 사는 그 어떤 동물은 그만치 먹거리는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약육강식은 짐승세계의 질서와 균형을 유지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게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창세기 3장 17-18절에,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누구 때문에? 사람 때문에요
하나님의 창조 오 일째 되는 날까지 자연을 만드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 사람을 만드셨는데, 이 마지막 날 만든 사람 때문에 그 앞서 만든 모든 피조물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인간의 욕심 때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아라” 하나님 말씀 그런데 왜 따 먹었어요? 뱀이 꼬드겨서? 물론 원인 제공은 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두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
여자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였다.”
여자의 대답에 섞인 불평과 불만을 봅니다.
“그래 동산 안에 있는 나무 열매는 다 먹어도 좋다면서, 왜 그것만 먹지 못하게 하셨을까?” “여기에 뭔가 있는 거야.”
그 불만의 표현이 “만지지도 말라고 하였다.”는 것이고, 그런 불평과 불만 사이를 파고드는 것이 죄입니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데, 그런데 “그것을 못 먹게 한 것을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못 먹게 하신 것이다.” 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원래부터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 역시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고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분이 되었다는 느낌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불평과 불만이 더 커지게 됩니다.
“자기만 먹고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게 말이나 되냐? 우리도 먹고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알게 되면 좋은 거 아니냐?”
그런 마음으로 그 영생을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였다.”(창3:6)
뱀 때문에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 결국 인간은 죽인 것입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대로 인간은 죽었습니다. 죽은 것은 산 것을 살리지 못합니다. 따라서 자연이 황폐해 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은 것(정녕 죽으리라 하셨으니)과 자연 곧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저주를 받은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찾아온 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었습니다. 고통이었습니다. 슬픔이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조차 변변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아들은 아닙니다. “종이 되어도 좋으니” 그런 생각으로 아버지께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을 아들로 맞이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되자 그 아들의 삶은 행복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것은 결코 산 것을 살리지 못 합니다. 생명만이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대답합니다. “아비를 장사하고 오겠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이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해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장래도 치르지 말라 하셨나?” “만약 하나님 일과 아버지의 장래가 동시에 생겼을 때, 아버지의 장래조차 하지 말고 하나님 일부터 하라는 말씀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 곧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는 말씀은, “이제 우리가 죽은 자들을 살리자”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오신 목적 “생명 살리기“ 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은 곧 생명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하지 않는 다른 표징도 많이 행하셨다.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이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20:30-31)3:16)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명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3:16)
예수님의 병자 고침과 죽은 자 살리신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기적 그 자체를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당신이 곧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심을 나타내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명 살리기는 단순히 당신의 능력으로 뭔가를 하셨다는 것으로 다 하신 것 아닙니다. 그냥 가지고 있는 것, 그 중 하나 준 것으로 이루어진 것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습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가 찔렸고, 우리의 악함 때문에 그가 상처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그가 징계를 받았고, 우리의 병을 고쳐 주시려고 그가 매를 맞았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주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요 6:5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찬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요 6:53-56)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 주시려고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생명이 모든 것을 살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4절에, “내 안에 내 몸에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 분 안에서는 누구나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또한 생명을 살립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죽음에서도 생명을 봅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습니다. 말라있습니다. 그러나 생명 있는 사람은 그 안에 생명을 봅니다.
그것이 심기어 자라서 새들이 깃들인 모습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것을 곧 죽음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사람은 그 십자가의 죽음에서도 부활이라는 생명을 봅니다.

우리가 전하는 전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 믿으세요.”가 아닙니다. 더 이상 가능성이 없는 세상에도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 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미 죽어 하얗게 말라버린 뼈들이라도 “생명 있으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게는 교회를 채우는 일이요 크게는 세상을 살리는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 있는 사람과 죄 없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은 그리했습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죄 있는 사람과 죄 없는 사람을 구분하여 죄 있는 사람을 정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죄 없는 분이시지만, 죄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있는 그대로를 받아 주셨습니다. 그야말로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꺼져가는 심지에 기름을 부어 활활 불길이 솟아나게 하셨고, 상한 갈대라 하여 꺾어서 뽑아내지 않으시고 그것조차 살리셨습니다.

생명의 불씨를 살리고 상하고 상처 받은 생명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가장 큰 기쁨은 생명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만 해도 넉넉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잃어버린 한 마리 찾아 나섰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잃어버려졌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이 죽음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래서 그 양을 찾았을 때 양 한 마리 값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여 잔치를 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셨고 그 가진 돈 조차도 생명 살리는 일에 쓰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믿으세요.” 그리 말합니다. 왜 예수 믿어야 하는데요?
예수 믿어야 구원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어야 생명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믿으세요.”라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한 외침인 것입니다.
그냥 믿으면 다행이고, 안 믿으면 할 수 없고가 아닙니다. 믿으면 살고 안 믿으면 죽는 겁니다. 교회 빈자리 채우려는 마음이니까 교회 올 만한 사람에게는 “예수 믿으세요.” 하고 교회 올 것 같지 않으면 “예수 믿으세요.” 조차 안 합니다. 복음은 생명 살리는 것입니다. 그가 어느 교회 가든, 그가 예수 믿고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예수 믿으세요.”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들 특히 절망하고 상처 받고 그런 사람들의 손을 잡고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생명을 살릴 것입니까? 돈으로? 이미 파괴된 환경을 돈으로 복구 할 수 있는가요? 여러분이 말이나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합시다. 그럴 때 얼마를 주면 그 상처가 치유 되겠습니까?
보세요.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이담과 하와도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했어요. 그들 속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수종하는 인간의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죄를 짓고 죽음을 끌어 들였는데, 하물며 지금 하나님을 떠난 지금은 어떠하겠습니까?
모두들 욕심 갖고 마구 죽이고 있는 겁니다.
보세요.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예수의 정신, 예수의 삶, 예수의 사랑, 이것 아니면 생명 살릴 수 없어요. 우리의 살과 피 속에 예수의 살과 예수의 피를 느끼지 않으면 생명 살릴 수 없어요. 우리 속에 끊임없이 역사하시는 예수의 영이 아니고서는 생명 살릴 수 없어요.
하나님의 세상 모든 것들을 있게 하신 분이십니다. 말하자면 세상 모든 것에 생명 주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어느 하나라도 생명 잃은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나 생명 잃고 죽은 자들에게 생명 주시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살리시려고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 있음을 알게 아시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살리는 일에 우리의 생명을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역사는 입신하고 방언하고 그 정도가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는 죽은 자들 살리는 생명 살리기 입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이 예수님의 생명을 일으키십니다. 그래야 나도 살고 남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 생명 걸고 복음 증거 하였습니다. 그것이 곧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의 살리기이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만 살자고 하는 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욕심이요 그것은 오히려 모든 것을 죽입니다.

쓰레기 만두. 그것은 만든 사람은 그렇게 해서 돈 벌어 잘 살자고 했겠지만 남을 죽이고 세상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죽고자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그것은 그냥 죽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욕심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욕심대로 살고자 하면 나도 너도 다 죽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고자 하면 나도 너도 다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심에 사로잡히면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의 생명을 해치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죽을 수 있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눈먼 욕심에서 벗어나 남의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산다는 말은 자기 의지와 욕망을 버리고 자유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어 다시 산다는 말은 죽음을 죽이고 생명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시편 8편 4-8절에,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 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와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에 두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까지도 하늘을 나는 새들과 바다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물길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왕관을 씌워 주셨다.” “그의 발아래 두었다.” 이 말씀은 모두 그 모든 것들 다스리게 하셨다와 하나입니다. 하나님에게 사람을 이렇게까지 생각하여주시며,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시는 까닭을 그리고 사람을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주신 까닭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모든 것들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보존하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의 생명을 보존하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도 좋은 그 모든 것, 그것을 그대로 보존하고 지키라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좋게 만드신 모든 것, 그런데 왜 사람이 그것을 바꾸려듭니까?
그것은 여전히 사람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기독교는 생명 살리는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믿으므로 생명 얻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살아 있는 사람만이 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셔서 주신 세상을 우리가 보존하고 지켜야 합니다.
작은일 하나에서도 생명 살리기의 눈으로 보십시오. 작은일 하나에서도 생명 살리기로 행동하십시오.
사람 때문에 망가지고 죽은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다시 살려내십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