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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판의 경고에 대한 반응 (창 1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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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익로 목사 (효민교회)

서기 79년 8월24일 아침. 이탈리아 남부 지역 휴양 도시 폼페이에 최후의 날이 왔습니다.“나폴리로부터 12㎞ 떨어진 베수비오 산 기슭에서 세워진 항구 도시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잘 나타내 주는 사치스러운 환락의 도시였습니다. 베수비오 산은 이따금 연기를 내뿜었지만 16년 전 폭발한 뒤로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뿜는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욱 멋지게 꾸며 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오쯤, 며칠째 계속되던 땅의 흔들림이 갑자기 거세지더니 곧 베수비오로부터 하늘을 뒤덮는 버섯구름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처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산꼭대기가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새들은 날다가 낙엽처럼 떨어졌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짐승들도 숨을 곳을 찾아 갈팡질팡했습니다. 화산은 쉴 새 없이 터졌고, 검은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완전히 가렸습니다. 4시간 쯤 지나자 인구 2만 명 가운데 2,0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을힘을 다해 바닷가로 달아났습니다.

로마제국의 미세눔 해군사령관이었던 대 프리니우스는 함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습니다.“모든 배는 폼페이로 가서 바닷가로 탈출한 시민들을 구하라!”함대가 폼페이 항구에 다다르니 배 위로 화산재와 경석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바닷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프리니우스는 카스텔라마레로 뱃머리를 돌렸습니다. 그는 폼페이 시민들이 바닷가를 따라 그리로 가리라고 예상했습니다.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닷가를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함대는 서둘러 카스텔라마레 해안에 배를 대고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믿어지지 않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바람이 돌연 낮게 깔리며 바닷가로 들이닥쳤습니다. 숨을 못 쉬도록 뜨거운 불기운과 독한 가스가 순식간에 함대를 덮쳤습니다. 구조 작업을 지휘하던 대 프리니우스, 로마 병사들, 그리고 막 구조돼 한숨을 돌리던 폼페이 시민들은 독가스에 질식돼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소 프리니우스와 몇몇 병사만이 간신히 그 곳을 벗어나 이 기록을 남겼습니다. 사흘이 지나자 분화가 멈추고 눈부신 태양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폼페이 시는 한 채의 건물, 한 사람의 자취도 없이 모든 것이 화산재와 용암 아래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화산재와 경석들이 우박처럼 쏟아졌고, 유황 연기가 그 뒤를 따라 도시를 덮침으로써 모든 생명을 질식시키고 말았습니다.”
<폼페이 최후의 날 [The Last Days of Pompeii]>

이는 “폼페이 최후의 날”의 한 부분입니다. 이와 비슷한 장면을 우리는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 최후의 날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죄악이 극에 달했을 때, 유황불 심판이 있으리라는 하나님의 경고가 천사들에 의해 롯에게 전해졌습니다. 이 경고를 전해들은 롯은 황급히 뛰어다니며 가족들에게 알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을 전해들은 식구들은 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어떤 식구들은 농담으로 여겼고, 어떤 식구들은 반신반의 했으며, 어떤 식구들은 그대로 믿고 성에서 도망쳐 나와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 농담으로 여기거나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유황불 심판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극에 달하여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리라는 예언이 있었듯,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도 그와 똑같은 심판이 잇을 것임을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7:28-30 말씀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하셨습니다.
세상 종말기에 나타날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7-8) 하셨습니다.

프랑스 스트라스 버그 천문대에서 세기별로 나타난 지진 통계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이 통계에 의하면 12C~84회, 13C~115회, 14C~137회, 15C~174회, 16C~258회, 17C~378회, 18C~640회, 19C~2119회로 나타났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지진 횟수는 급격히 늘어났으며, 그 양상도 대형화 되고 있습니다.

세상 종말기에 나타날 또다른 징조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하셨습니다. 지금이 그러한 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예언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는 모습을 우리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롯의 가족들이 심판의 예언을 듣고 나타낸 반응에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Ⅰ. 심판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급박하게 엄습해오는 이 엄청난 불행을 농담으로 생각한 사람은 롯의 사위들이었습니다. 본문 14절에 “롯이 나가서 그 딸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고 했습니다. 가장 진실하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경고를 농담으로 여긴 안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살아계신 하나님,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승천하셨다가 다시 오실 예수님의 심판에 대한 진리를 농담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없습니까?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 이웃에게 이러한 사람들이 없습니까? 롯이 유황불의 심판을 천사를 통해 전해 듣고, 가족들을 찾아다니며 다급하게 권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땅의 것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소식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이세상의 것이 인생의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후의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을 때에 주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목자가 되십니다. 주님께서 목자가 될 때에 비로소 참된 평안과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육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육신은 먹고 입고 마시며 쉬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혼은 지식과 문화생활로 만족합니다. 영은 하나님을 만날 때에 만 만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음식으로 만족할 수 없고, 추위에 떠는 사람이 먹고 마신다 하여 만족할 수 없는 것처럼, 영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아무리 육과 혼의 것으로 가득 채워도 결코 만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의 내면에는 세상의 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또 다른 공간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채울 수 없는 그 공간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해결되는 영의 자리입니다.


Ⅱ. 심판의 경고를 반신반의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믿는 듯 했으나 한편으론 의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롯의 처였습니다. 본문 26절에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17절에 말씀하시기를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하셨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유황불 저주를 받아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해 변에는 롯의 처로 불리는 망부석처럼 생긴 소금기둥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순례 객들이 이것이 정말 소금인가 하여 혀로 핥아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소금기둥의 허리부분이 움퍽 파여 있습니다.

이 사람은 심판의 경고를 믿고 도망쳐 나오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일까, 정말 유황불이 내리는 것일까 하여 뒤를 돌아본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고개를 돌려 잠깐 뒤를 돌아본 그 행동이 문제가 아니라 의심하는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의심 없이 믿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하셨습니다.
반면 믿는 자에 대하여 성경은 말씀하시기를“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하셨습니다.

한편으로 롯의 처는, 지난날 즐기던 세상의 것들, 그리고 집에 두고 온 소중한 재산들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뒤돌아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화를 불러 왔습니다.

폼페이 최후의 날의 상황에 대해 이러한 기록이 있습니다. “1,700년이나 흐른 뒤, 사람들은 그 옛날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갑작스레 닥친 재앙이었던지, 새끼 돼지가 오븐에 넣어지려 한 채로 발견되었고, 반쯤 구워진 빵이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불쌍한 모습으로 굳어져 있었습니다. 어머니들은 숨이 막히기 전에 힘껏 아기를 감싸 안고 있었고, 어떤 이는 금붙이를 꽉 움켜쥔 채 돌 더미에 깔려 있었습니다. 어느 집 문턱에서는 젊은 여자 둘이 집안으로 들어가 귀중품을 꺼내려고 망설이는 몸짓으로 굳어 있었고, 한 집에서는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던 듯 문상객들이 빙 둘러앉은 그대로 자신들의 장례식에 참석해 있었습니다. 모든 집이 어느 날 한때의 모습을‘동작 그만’인 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도서실에는 두루마리 종이가, 작업장에는 연장이, 목욕탕에는 수세미가, 여인숙 탁자에는 손님들이 서둘러 계산한 돈이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화산재가 도시 전체를 뒤덮는 아비규환의 상황인데 금붙이를 쥐고 있고, 어떤 이는 집안에 들어가 귀금속을 꺼내려다가 화석이 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밖으로 달려 나갔더라면 혹시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해 뒤를 돌아보지 말기를 당부하셨습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7-38)

하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렇다 하여 아브라함이 망하지 않았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권면하시기를“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1-3) 하셨습니다.


Ⅲ. 믿고 순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심판의 경고를 믿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롯이라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만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지식을 쌓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참된 신앙생활이란 실천하는 것입니다. 듣든 것, 배우는 것은 실천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순종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응답이 있고,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하셨습니다. 생명이 끊어진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줄 수 없습니다. 다만 서둘러 매장할 따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행함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산자란 육신이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순종하므로 살아있는 믿음의 소유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과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만종이라는 그림을 비롯하여 많은 걸작품을 남긴 밀레는 그이 경건한 믿음을 지닌 할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파리로 그림 공부를 하려고 떠나는 손자 밀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하나님의 뜻을 어긴다든지 믿음을 저버리는 것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다. 너는 화가가 되기 전에 참된 크리스천이 되어라. 그릇된 일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림을 그릴 때에는 영원을 위해서 그릴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나팔소리가 들려올 것을 언제나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이러한 할머니의 말씀을 명심하며 살아간 밀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할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이 지금의 나와는 상관없는 지나간 옛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도 그와 똑같은 심판이 있을 것을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7:28-30 말씀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하셨습니다.

종말을 향해 치닫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내 자신이 참다운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두려워하며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것에 미련을 두지 않고 우리의 본향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늘의 꿈을 품은 사람은 맑은 가을 하늘처럼 그의 마음이나 삶이 맑고 깨끗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롯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위해 서둘러 준비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14절 말씀처럼 “롯이 나가서 그 딸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을 알리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삶의 길입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우리들의 본향인 하늘나라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참된 만족과 기쁨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가면 풍요로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하셨습니다. 나만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가족이 함께, 친지들과 함께, 이웃과 함께 오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손에 손을 잡고 더불어 주님께 나아오는 효민 가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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