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암 5:4~15)

  • 잡초 잡초
  • 598
  • 0

첨부 1


- 설교 : 강구원 목사 (갈보리교회)


하나님께서 북조 이스라엘을 처녀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시적 표현은 적의 침입을 한번도 받지 않고 태평성대를 노래하던 여로보암 2세 시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엎드러져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자기 땅에 던지움을 당하였으니 일으킬 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스라엘을 아주 망하게 하지 아니하시고 회개할 기회를 얻게 하시는, 진노 중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바로 이스라엘 중에서 천 명이 나가던 성읍이 백 명만 남고 백 명이 나가던 성읍이 열 명만 남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사야 6장 13절에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라고 했습니다.

멸망당해 마땅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을 보여주는 이 성경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아모스(Amos)선지자가 남유다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메시지를 북쪽지파들을 향해 주고 있는 것을 감안할 때 그의 경고는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북조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말기(B.C 8세기 중엽)에 물질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태평성대를 노래하던 때와 같았습니다.
이러한 물질적 풍요는 사회전반에 걸쳐 걷잡을 수 없는 타락으로 오염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권력자들은 부정과 부패의 장본인들이었습니다. 특히 종교적 타락은 모든 타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도처에 우상숭배가 자행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온갖 죄악과 불법이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각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이웃을 속이는 저급한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궁핍한 자들을 압제하는 것에 익숙해져 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옛날 여호와 신앙의 터전이었던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는 우상의 성읍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곳에 우상의 제단을 쌓고 부지런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개인이나 국가가 망할려고 하면 망할 짓을 하는 것입니다.

Ⅰ. 북조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징계를 무의미하게 만든 것입니다.

(1) 이(齒)를 한가하게 하고 양식이 떨어지게 했으 나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아모스 4장 6절에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齒)를 한가하게 하며 너희 각처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기근이 닥쳐 먹을 것이 없으므로 치아가 쉬고 있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2) 마실 물을 부족하게 했으나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아모스 4장 8절에 『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했습니다.

(3) 농작물을 피폐하게 했으나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아모스 4장 9절에 『내가 풍재와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팟종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4) 염병으로 청년들을 죽게 했으나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아모스 4장 10절에 『내가 너희 중에 염병이 임하게 하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

(5) 성읍을 무너뜨렸지만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아모스 4장 11절에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2) 공법(公法)을 인진(茵蔯)으로 변하게 한 것입니다.
본문 5장 7절에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 『공법』( , 미쉬파트)은 모세율법이 지향하는 윤리로 하나님의 뜻대로 공정하게 적용케하는 당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인진』( , 라아나)은 '쓴쑥'(worm wood)을 의미합니다.

3) 정의를 땅에 던진 것입니다.
본문 5장 7절에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역시 『정의』는 공법을 의미하는 말로 정의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모스 6장 12절에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여』라고 했습니다.

4)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 근심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6장 6절에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환란』( , 쉐베르 요세프)은 민족적 파멸을 말하는 것으로 구약 성경 여러 곳에 언급되었습니다(사 30:26; 렘 6:14 애 2:3; 나 3:19).

(1) 흉한 날이 멀다하여 강포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는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암 6:3).

(2) 방탕과 극에 달하는 사치를 말하는 것입니다(암6:4).

(3) 쾌락에 탐닉하여 헛된 노래를 부르며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만드는 것입니다(암 6:5).
당시의 지도자들은 다윗과는 달리 인간 중심적인 노래를 불러서 하나님을 욕되게 했습니다(사 5:12; 24:9).

(4)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암 6:6).
여기 『대접』( , 미즈레케이)은 성전에서 제사용으로 사용하는 집기를 말하는 것으로 무분별한 태도를 말합니다. 또한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른다고 함으로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생활로 하나님을 떠난 것을 말합니다.

5) 허무한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6장 13절에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하고 했습니다.
가치없는 것 즉 육신의 쾌락을 중심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6) 스스로 자만한 것입니다.
아모스 6장 13절에 『… 우리 뿔은 우리의 힘으로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뿔』( , 카르나임)은 아스다롯 가르나임이라는 지명을 가리키는 말로 이곳은 여로보암이 아람 땅을 침공하여 승리했을 때 취한 곳입니다. 이 일로 그의 정치적 입지는 물론 그의 자부심마저 고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그 지역의 이름을 풍자적으로 사용하여 당시에 만연해 있었던 쓸데없는 국가적인 자만심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때 아모스 선지자는 애가를 불러 이스라엘을 향해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려졌으니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암 5:2).
이스라엘 중에 천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명만 남고 백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명만 남겠다고 했습니다.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암 5:11).

아모스 5장 16-17절에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군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모든 포도원에서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회복되는 길을 제시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Ⅱ.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본문 5장 4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6절에 또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찾으라』의 히브리어는 '디레슈니'( )입니다.
이 단어가 여호와 하나님께 사용될 때는 명령형이 되어서 '여호와께 돌아와서 다시 믿음과 신뢰를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찾으라』는 말의 '다라쉬'( )가 될 때는 '도움을 청하다', '종종 방문하다', '호소하다', '추구하다', '충고를 구하다', '문의하다', '요청하다', '요구하다', '탐구하다', '주의 깊게 찾다'라는 의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살리라}에서 '그리고 너희는 살리라' 라는 말 히브리어 '위흐유'( )는 영적인 생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위흐유'의 기본어로 '하야'( )는 '소생하다', '부활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1) 주를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시편 9편 10절에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2)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1장 18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사 55:6; 행 29:13). 하나님의 충고를 듣는 일입니다.

3) 회개한다는 말입니다.
호세아 10장 12절에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4) 기도한다는 의미입니다.
스바냐 1장 6절에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고 했습니다.
욥기 8장 5-6절에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시편 77편 1-2절에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로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5) 찬송한다는 말입니다.
시편 22편 26절에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6)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찌니라』고 했습니다.
상은 행함에서 얻는 것입니다(마 10:40,41).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는다고 했습니다(전 4:9; 고전 3:8,14,17; 골 3:24). 우리가 사는 길은

Ⅲ. 악을 버리고 공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본문 5장 14절에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1)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에도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2장 21절에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고 했습니다. 본문 14절에서는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살려고 하면 '선을 행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선을 구하라』, ('디레슈 토브', )에서 선(善)은 '토브'( )이며 반대는 악(惡) '라'( )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욥기 1장 1절에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했습니다.

2) 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본문 5장 15절에 『…선을 사랑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창조사역이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했습니다. 즉 '키 토브' ( )라는 동사로 될 때는 ① 좋다 선하다(욥 13:9) ② 아름답다(민 24:5) ③ 즐겁다(아 4:10) ④ 유쾌하다(삼상 25:36)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이 형용사로 될 때는 ① 좋은(창 1:12) ② 친절한 (잠 18:5) ③ 아름다운(창 6:2) ④ 향기로운(렘 6:20) ⑤ 위대한, 탁월한(시 69:17)이라는 말이 됩니다. (속지에 계속)

창조사역에 나타난 선은 하나님 자신의 ① 의지(뜻)의 자유를 말합니다. ② 의지적용의 자유를 말합니다. ③ 의지적용의 자유의 결과 성취의 자유를 말합니다.
결국 선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의 만족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창조사역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구속사역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구약시대에는 법궤로 나타났습니다. 그 하나님의 선이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났습니다.

그 하나님의 선이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운동에서 나타났습니다.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착한 행실을 뜻하지 아니합니다.
시편 106편 1절에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선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선이라고 할 때 동일본체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선이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암 5:14),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암5:5),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0)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악과 선을 추상적인 것으로 가정만 하고 만다면 참으로 선과 악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결론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은 행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이 시대에 살려고 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은 이 시대에 교회운동입니다.
본문 4절에서 '살려고 하면 여호와를 찾으라'는 것이 외적인 것이라면 14절, 15절에 '너희는 살기 위하여 악을 구하지 말고 선을 구하라'는 말은 내적인 것입니다. 전자가 소극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5장 5-6절에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벧엘은 야곱이 돌기둥을 세웠던 곳입니다(창 28:10,18). 야곱이 세겜을 떠난 뒤에 단을 쌓고 회개했던 곳이기도 합니다(창 35:1-7). 그 후에 이곳은 거룩한 예배장소로 지정되었습니다(삼상 10:3).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입성한 첫 지점입니다(수 4:10-20). 그 곳에 도착한 온 백성이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켰습니다(수 5:2-12).
브엘세바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의미 있는 장소입니다. 그곳은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은 곳입니다(창 21:33). 그곳에서 여호와가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시기도 했습니다(창 26:24).

또한 그곳은 사무엘이 자기의 아들들을 사사로 삼은 곳이기도 합니다(삼상 8:1). 이와 같은 유서 깊은 신앙의 고장들이 곧 우상을 섬기는 장소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선한 것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몫에 태인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명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자신과 가족과 이 사회와 국가를 살리는 길입니다.

자신이 받은 거룩한 교회운동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넜던 청교도들은 오늘의 미국을 탄생시켰습니다.
오늘의 한국이 이처럼 고도의 경제적 문화적 성장을 이룩한 것은 그 누구의 공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베푸신 은혜입니다.
한국교회가 일제 식민지 시대의 일제 관료들의 기독교 말살을 위한 종교정책 가운데서도 일본 관료들에게 굴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정조를 굳게 지킨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도 불구하고 1914년 1,800여 교회에서 1941년 3,300여 교회로 성장했는가 하면 초창기 100여명의 장로가 일제 말기에는 3,000여명으로 증가했고 1914년에 3,500여명의 집사가 일제 말기에는 16,000여명으로 증가한 것을 감안할 때 시대가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일은 더 부흥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6ㆍ25동란 중에 피난 나온 성도들의 예배는 간절하고 뜨거웠습니다. 그 결과 전도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폐허가 된 조국의 산하가 복구의 땀을 흘리며 허리 펼 여유도 없이 곤고할 때 한국교회는 급격히 증가했으며 한국교회 성장과 함께 한국의 경제 성장은 확실히 비례해 갔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사는 길은 영적 부흥운동과 함께 교회운동을 더욱 활발히 전개해야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교회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챠임벨)도 부활시켜야 합니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