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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명을 새롭게 (행 20:22~24 (렘 18: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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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장명수 목사 (광야교회)
- 2004년06월20일 설교 

  어느 날 개하고 닭하고 말다툼을 했습니다. 개가 닭에게 하는 말이 “너는 아침에 일찍이 꼬끼오 하고 울어서 주인이 새벽에 일어날 수 있도록 깨워 주는 것이 네 사명인데, 요새는 왜 벙어리처럼 울지 않느냐?”하고 물었답니다. 닭이 대답하는 말이 “요새는 세상이 달라져서 언제 자는지 언제 깨는지 알 수가 없고, 자명종을 필요한 때에 틀어 놓고 자기 때문에 내가 울 필요가 없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또 닭이 말하기를 “개, 너는 도둑이 올 때 짖는 것이 네 사명인데 요새 도둑들이 이렇게 난무하고 있는데 어째서 너는 짖지를 않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개가 하는 말이 “주인이 도둑인데 언제 짖겠느냐?” 했답니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험난하게 되다보니 모든 생명체가 제 사명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명이 무엇입니까? “맡겨진 임무”라는 뜻인데, 이 말은 자기 목숨을 다하여 일한다는 뜻입니다. 나의 일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목숨을 다하여 일하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자기 삶의 참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 사명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성공입니다. 성공이 사명입니다. 그 성공이 재물 모으기, 자존심 세우기, 권력 쥐기 등 나름대로 사람에게 가져다 주는 의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입신양명하는 성공이 인생의 진정한 사명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 이유는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삶이 정말 바른 삶인가?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하고 회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소년들, 성인들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인생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명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닭과 개에게도 자기 사명이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붙잡아야할 분명한 사명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사명을 새롭게 할 때 우리의 삶이 활기가 있고, 싱싱한 능력을 가지고 보람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1) 사명은 자신의 근본을 알 때 분명해집니다. 예레미야 18:4 말씀에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 태어났음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그것을 믿고 살아가야만 합니다. 삶의 주체가 불분명할 때 사람들은 죄를 짓고, 사명감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자연과학이 끝을 모르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이 무한대로 발전해 나가는 이 시대에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인간이 철저히 주인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환경을 잘 조절하면 얼마든지 유토피아를 만들고, 행복한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이미 그 사람은 아주 잘못된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윤형방황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찾아 이리저리 방황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목적지를 가운데 놓고 그 주위로만 빙글빙글 돌아다녔습니다. 길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튼튼한 두 다리는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목적지에서 더 멀리 떨어지게 할 수 있느니까요. 방향을 제대로 잡지 않고 무턱대고 앞으로만 간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목표와 방향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는 목적을 가지고 그릇을 디자인하고 만들어 냅니다. 그릇을 만들어 놓고서 이것을 어디에 사용할지 모른다면, 그 그릇은 한동안 사용되지 못하고 찬장 속 깊은 곳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그러다가 더 시간이 지나면 자리만 많이 차지한다고 주인이 바깥에 내다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릇이 제 기능에 맞게 잘 사용될 때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자기의 근본을 알아야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뿌리를 알아야 합니다. 근본을 잘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것이 근본 행세를 합니다. 돈이 사람의 근본인 것 같고, 명예가 사람의 근본인 것 같고, 쾌락이 목적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차적인 것들, 부수적인 것들이 본래의 사명이 되어 흔들리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의 근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시고,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나의 장래를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11:36 말씀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선언하고 있습니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번에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성경 고린도전서 10:31 말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입니다.

  나의 뿌리와 근본을 알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목적과 방향을 알 때에 바른 사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본질을 알아야 참된 인생, 바른 삶, 온전한 생활이 가능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명없이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것은 자기의 근본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나의 본질이요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과 연결되지 못한다면 사명없는 무가치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명을 새롭게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인생의 참 의미를 찾고 새로운 사명감으로 살아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2) 사명은 삶의 방향을 바르게 잡아줍니다. 사명을 잃어버리면 방황이 찾아옵니다. 요나가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다시스행이 아니라 니느웨행이었습니다. 다시스의 길은 사명이 아니었습니다. 사명의 길이 아닐 때 방황하게 되고 시간 낭비하게 되고, 절망하게 됩니다. 사명의 길이 아닐 때 요나는 풍랑을 만나고, 좌절하고, 방황하고, 심지어 바다에 빠져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다시금 사명을 되찾아 니느웨로 갈 때에 모든 삶의 방향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엘리야도 잠시 잠간 동안 사명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열심히 사역을 감당하다가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 때 사명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하나님 내 생명을 데려가십시오.”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한 동안 사명을 잘못 잡은 적이 있었습니다. 유대교 신봉자로 율법에 매여 있을 때 그의 사명은 사람을 학대하고 억압하고 죽이는 것이 사명인 줄 알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사명을 되찾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엘리야처럼, 바울 사도처럼,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명자가 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우리 자신에 맞는 사명이 분명히 있습니다. 내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알차게 살아갈 수 있는 사명이 있습니다. 집안 일을 하든지, 회사일을 하든지 땅과 바다의 일을 하든지, 사람들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그 일들은 소중한 사명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사명은 빛나게 됩니다. 그리고 사명을 바로 잡을 때 인생의 발걸음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는 일들이 소중한 사명이 되길 바랍니다. 

  부모있는 아이와 고아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부모있는 자식은 저녁이 되면 서둘러 엄마 아빠가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만, 고아는 돌아갈 곳이 없어 방황합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죽을 때에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불신자는 죽음을 앞두고 돌아갈 곳이 불분명하기에 불안하고 두려워 떱니다. 그러나 신자는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평안하게 주님 품안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사명이 있는 자와 사명이 없는 자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생활에 목표와 방향성이 분명한 사람은 사명이 있는 사람이요, 삶에서 날마다 회의와 방황속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사명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알콜중독자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훗날에 열악한 가정환경을 이기고 의과대학의 유명한 교수가 되어 알콜중독자를 치료하는 일인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타락한 모습을 보고 방황하다가 결국 자신도 알콜중독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인생에서 잡게되는 사명이란 존귀한 인생을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방향타의 역할도 하지만, 사명없는 인생은 방황과 타락으로 끝을 맺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사명을 새롭게 하므로 여러분들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시길 축원드립니다.

  (3) 사명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귀한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상점이나 백화점에는 값지고 소중한 물건들이 아주 많습니다. 사람들의 충동구매를 일으키고 허영심을 일으킬 만한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백화점의 모든 물건을 다 합해도 한 사람의 생명보다 더 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고백을 볼 때에 사람은 자기의 사명을 위해 그 소중한 생명을 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사명이 불분명한 사람들은 자기 생명을 위해 사명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습니다. 자기 직분도 쉽게 버릴 수 있습니다. 자기 생명, 건강, 자기 자존심이 사명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사명을 위해 버리겠다고 합니다. 어린 아기의 엄마는 아기를 살리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다합니다. 아기 양육이 엄마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없으면 아기는 살 수 없습니다.

  표범 가족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미 표범이 새끼 두 마리를 낳아서 잘 키웠습니다. 사슴처럼 생긴 톰슨가제를 사냥해서 식량으로 삼았습니다. 어느 날 표범 어미가 혼자 놀고 있는 톰슨가제를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톰슨가제는 아주 큰 놈이었습니다. 어미 표범이 달려가서 톰슨가제의 목을 물었는데, 제대로 물지를 못했습니다. 잠시 후에 톰슨가제가 다시 일어나서 날카로운 뿔로 표범을 밀어붙이며 공격을 했습니다. 그 뿔이 그만 표범의 배에 박히고 말았습니다. 표범은 배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더니 이틀이 지나자 죽고 말았습니다. 어미를 잃은 새끼 표범들은 금방 하이에나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표범 가족의 일면을 보았을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미가 제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새끼들은 단번에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살아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분명한 삶을 바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명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이 중요하냐, 사명이 중요하냐’ 물으면 당연히 생명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사명을 잃어버리면 무가치한 생명이 될 뿐입니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사명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단 한 번 밖에 살 수 없는 생명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바른 사명을 가질 때 가장 존귀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사명을 통해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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