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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목숨을 걸어야 할 일 (마 16:2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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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덕 목사 (내일교회)

윤동주의 <십자가>란 시입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데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첩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행복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부러워했습니다.
행복된 삶이란 어떤 삶이라 생각하십니까?
행복된 삶이란?
바로 자기의 생명을 걸 수 있는 일에 헌신된 삶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와 주님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무엇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하며
진정한 복된 삶을 누릴 줄 아는 내일의 가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 이때로부터 ] 라고 시작합니다.
이때로부터 하는 말은 13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 사건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무리들을 떠나
헬몬산 기슭에 위치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합니다.
[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14절에 [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에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
제자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견해는
대체로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회 혁명가, 또는 자선 사업가로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오늘날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견해가 전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들 예수님의 극히 일부분만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사람, 훌륭한 인물 그 이상의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15절을 보십시오. [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이 질문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직접적이고 주관적인 견해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얘기하듯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수제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여기서 그리스도란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란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의 헬라어로
구약 시대에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들을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야, 우리말로는 구세주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원래 인간은 에덴 낙원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의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낙원과 행복과 영생을 잃어버렸습니다.
죄와 죽음이 주는 어두움과 절망과 허무의 한계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3:15절에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구세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구세주가
바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단순히 위대한 인간이 아니라
구원자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되십니다.
이 신앙고백을 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3>
17절에 [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 라고 했습니다
이 복이 어떤 복입니까?
1) 18절 [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 베드로란 이름은
예수님께서 처음 시몬을 부르실 때 주신 이름으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고백을 통해 누리는 최대의 특권은
하나님의 교회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교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교회란 중세 시대 이후 내려오는 뾰족한 첨탑에 십자가와 종이 달린
그런 웅장한 건물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죄사함과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주님이 세운 교회는 세상의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2) 그리고 19절을 보십시오.
[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
이 말씀은 베드로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임하는 축복입니다.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발견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그 특권이 무엇이냐? 바로 천국 열쇠인 것입니다.

열쇠가 무엇입니까? 무슨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까?
잠겨있는 것을 푸는 것이 열쇠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키요, 열쇠입니다.
본문의 이 열쇠는 단수로 나타나지 않고 복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열쇠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는 구원의 열쇠입니다.
둘째, 말씀의 열쇠입니다.
셋째는 기도의 열쇠입니다. 우리는 이 열쇠를 만능키라고 합니다.
넷째는 용서와 축복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왜 우리에게 이런 열쇠를 맡겼느냐? 는 것입니다.
바로 주의 제자가 되어 주의 몸된 교회를 잘 섬기라고 맡긴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를 섬기는 바른 자세입니다.
교회를 섬기되 자기 식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 머리되시고 주인 되시는 예수님 식으로 섬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한편으로 교회를 섬기는 바른 자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때로부터 라고 시작합니다. <5>
이 말씀은 바른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고
교회를 바로 섬길 수 있음을 암시해 주는 말씀입니다.

복이 있도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천국 열쇄를 주겠다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제자들의 어깨가 으쓱했을 것입니다.
야! 정말 예수 잘 믿기로 했다 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서론이고 이제 본론에 들어간다 하시면서
[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이다 ] 라고 합니다.
이 말은 베드로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직 복음을 온전히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복음을 바로 이해하지 못해서
참된 복음을 전하면 외면합니다. 고개를 흔듭니다.
되려 거부반응을 나타냅니다.

시골에서 오랫동안 농사를 짖고 살던 중년부부가 서울로 이사를 와서 무얼 할꼬 하다가 참기름 집 개업 준비를 했습니다.
시장조사를 위하여 시중 참기름을 먹어 본 이 부부는 통탄을 했는데
시중 참기름이 저질이거나 가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낙화생 기름을 섞거나, 참개 깻묵에 다른 기름을 섞어
한번 더 짜거나, 저질의 수입 깨를 섞어 짠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짜 토종 참깨로 참기름을 짜서
시중 가격보다 조금 비싼 가격으로 판매했습니다.
이윤이 박해도 신용을 지켜 장사하면 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가지 못해서 이 참기름 집이 문을 닫게 됩니다.
바로 그 집 참기름 맛이 이상하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가짜 참기름을 먹고 살아온 동네 사람들이
진짜 참기름 맛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랍니다

이건 오늘 교인들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은 당시 베드로처럼 참된 복음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면 도리어 거부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참된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면 “내가 죽든지”아니면
“예수를 죽이든지” 둘 중 하나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로마인들이 아니라
성전에 있는 예루살렘의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이었다 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즘말로 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교회 안의 목사들, 장로 지도자들, 신학교의 신학교수들이었다 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참된 십자가 복음 앞에 그들이 할 수 있는 행동도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십자가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자신을 고치든지
아니면 자신들이 잘못되었다고 폭로하는 예수를 죽이든지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신앙고백을 들으신 예수님
이제는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를 이야기해도 되겠다 싶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했을 때
베드로의 입에서 엉뚱한 반응이 나오고 맙니다.
왜? 이런 반응이 나올까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베드로의 귀에는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시겠다는 이야기는 작게 들리고 예루살렘에 가서 많은 고난을 당한 후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처참한 이야기만 크게 들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우리 귀에 들릴 때 고난과 죽음만 들리면
우리의 심령도 죽고 맙니다.
그러나 복음은 결코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고 영광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성도의 행복된 삶이 십자가에 있음에 눈이 뜨여지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3절 [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
[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한다 ] 는 말은 <6>
[ 하나님의 관심에 마음이 맞추어져 있다 ] 는 말이고,
반대로 [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 ] 는 말
역시 [ 사람의 관심에 마음이 맞추어져 있다 ] 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나는 예수를 믿고 신앙고백을 하는 자로서
나의 관심이 어디에 맞추어져 있습니까?
우리가 만일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지 않고 내게 맞추어져 있다면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일을 한다할지라도
좀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 라는
주님의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 원문 - 너는 내게 장애물이다.

한번은 지난 번 교회에 건축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비만 오면 예배당 한쪽 벽에 물이 스며들어 색깔이 변하고 얼룩이졌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물이 스며들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붕에 올라가 보니 의문이 풀렸습니다.
지붕에서 흐르는 빗물을 처리하는 물받이와 홈통에 낙엽이 쌓였는데, 그 때문에 물길이 막혔고 여기서 넘친 물이 벽으로 떨어져
예배당 벽을 적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 흐르는 물길을 막는 낙엽 ] 이 된다는 것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라고 할 때
예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답게 간청합니다.
[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

우리가 문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간언은
베드로의 주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충성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전혀 예기치 못한 반응을 하십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충성스런 제자를
격려하고 칭찬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주님께서는 분위기를 엄청나게 경직되게 만들었습니다.
23절에 [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를 사탄으로 일컫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곧 사탄이란 말입니까? <7>
우리는 여기서 말씀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말이 사탄의 간섭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하는데 베드로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질책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자신과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인데
주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반응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 가운데서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는 한껏 주님을 위한다고 한 것이
자기 중심적인 이성과 경험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을 통한 감언이설을
조금도 기쁘게 생각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져 가는 놀라운 경륜 속에 자기 백성들이 말씀 앞에 겸허하게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기 충성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진정으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수도사가 되기를 결심한 두 명의 지망생이
평생 주님만을 따르겠다고 프란체스코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배추 모종을 심고 있던 프란체스코는
찾아온 두 사람에게 이상한 명령을 내립니다.
[ 배추 뿌리를 하늘로 향하고 배추 잎사귀를 땅에 심어라 ]
한 사람은 그대로 순종하고 한 사람은 말도 안 된다며 제대로 심었습니다. 결국 거꾸로 심은 자는 수도자로 들어오게 되었고
제대로 심은 자는 집으로 돌려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농사꾼을 뽑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농사를 아느냐, 모르느냐 시험하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합리적이냐, 불합리하냐, 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종하느냐, 아니냐 를 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먼저 자기를 부정해야만
순종의 자리에 이를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였다'는 말은
[ 꾸짖는다 ] 는 말과 가까운 것으로
[ 예수님은 가정생활을 직장생활을 안 해봐서 뭘 몰라
내 말대로 해야하는데 ] 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교회를 섬기면서 내 방식대로 하려고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예수님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8>
그러나 그것은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사탄의 계략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구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하나님의 일이고 뭐가 사람의 일입니까?
그것은 일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따라 구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심에 따라 일하면 그것은 사람의 일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에 따라 일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을 잘못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젊은이가 믿음이 좋다고 사람의 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 접어 두고 기도만 하고 전도만 한다고 하는 사람
본 받으라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며 사는 것은 더 옳지 않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은 이 땅에 돈 벌려, 출세하려고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 땅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우리는 소명이라고 합니다.
그 소명을 예수님은 [ 하나님의 일 ]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직장생활을 해도
그 직장이 호구지책이 되어 버린다면 그 일은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이 직장으로 보내어
이 직장에서 내가 할 일이 있다는 소명감이 있으면
그는 그 직장 생활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에 따라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에 따라 일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명 따라 일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얼마나 알아주고 내게 얼마나 유익하고
얼마나 편안한가? 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게 주신 소명 따라 사역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성가대로 교사로 순장으로
권사로 장로로 세워 주셨다는 소명 따라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필수적인 요건이 무엇입니까?
24절을 보십시오.
[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여기서 예수님은 신앙 고백을 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교회를 섬기는 자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말합니다.
첫째, 자기를 부인하라고 합니다. 자기 부인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바로 자기 생각이나 감정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고자 할 때 순간, 순간 선택의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때 자기 생각보다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 노우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예수님 더 사랑하다 보니 따르는 모든 불이익이 바로 자기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면서
주님 사랑하는 마음 없이, 자기 것 하나도 손해 보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 주님 섬기듯이 교회를 섬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교회를 섬기는 바른 자세인 십자가를 진다는 것
나의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할까요?
바로 헌신입니다.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몸을 던지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신앙고백을 하는 우리에게 처음부터 목숨을 걸어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처음부터 목숨을 걸으라고 합니까?
25절에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자기 중심, 이기적인 신앙은 결코 남는 것 없이 다 잃어버리지만
주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 각오 즉 목숨을 걸면
잃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막10:29절 이하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잃어 버린 자는 ]
[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
그 진가는 내세에 즉 영원한 세상에서 확실한 보상을 받지만 <10>
현세에서도 십자가 지고 가다가 잃어 버린 것은 100배나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가? 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13장에 예수님의 비유 - 밭에 감추인 보화를 잘 압니다.
어쩜 오늘 우리에게도 보화가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내일교회라는 밭에 감추어져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양식만 심고 거두지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양식 그 이상의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보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골2:3절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십자가를 지느냐? 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십자가를 지고 살아갑니다.
즉 목숨을 걸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느냐? 는 것입니다.

26절 보세요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

많은 사람들이 돈과, 명예와 지식과 쾌락에 목숨을 걸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진정한 행복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부와 명예와 지식과 쾌락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저도 더 좋은 차 타고 싶고 더 좋은 집에 살다가
총회장도 지내고 편안한 여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기에 생명을 걸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다 얻었다 해도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하나님의 일을 놓쳐 버렸다면
그는 후회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사시렵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겠습니까?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 수 있는 일을 붙잡고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가는
행복한 사나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행복한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몇 년 전 영국의 한 미술가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 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의 배경은 한 젊은이가 마귀와 <영혼내기> 서양 장기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장기에 졌고,
그래서 자신의 얼굴을 손에 파묻은 체 낙담해 하고 있고
그리고 맞은 편에서 마귀가 환희를 즐기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하루는 한 유명한 서양 장기선수가 미술관에 있는 그 그림 앞에 섰습니다. 장기판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던 그는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는 확신 있는 목소리로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 장기판을 하나 가져다주십시오. 그리고, 여기 그림대로 말을 놓아주십시오. ] 장기판이 준비되자 그는 조심스럽게 한 수를 옮겼습니다.
그러자 이제 전세가 역전되어 젊은이가 이길 수도 있는 판이 되었습니다. 그 젊은이의 문제는 한 수를 몰랐다는데 있었습니다.
이 예화는 오늘 우리들의 영적인 문제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한 수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일에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승리의 삶, 행복한 삶은
하나님의 일에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진리에
눈이 뜨여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무엇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겠습니까?
돈 명예 지식 쾌락 그런 것들은
결국 허무와 실망을 안겨다 줍니다.
주님이 네게 주신 소명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인생
바로 행복한 삶의 주인공임을 깨닫고
우리도 소명에 목숨을 건 하나님의 일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004-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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