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제자의 규례 (눅 11:53 - 눅 12:12)

  • 잡초 잡초
  • 243
  • 0

첨부 1


- 김창인 목사 (광성교회)

본문 내용은 전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지켜야 할 규례들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제목을 '제자의 규례'라고 정했습니다. 이 규례라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규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자라고 하면 스승을 배워 가는 사람입니다. 스승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인격을 배우고 생활을 배우고 스승 전부를 배워 스승을 닮아가며 스승과 같은 생활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제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요, 오늘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렇게 믿고 따르며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넓은 의미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되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아도 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일정한 룰을, 즉 규례, 규칙을 정해 주셨습니다. 그 규칙을 잘 지켜가면서 믿음 생활할 때에 그 믿음이 바로 된 믿음입니다.

예컨대 우리가 운동경기를 보게 됩니다. 농구, 배구, 축구, 혹은 야구대회를 하는 걸 보면 선수들의 기량이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술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 운동경기가 정해주는 규칙을 위반하게 되면 실격자가 되고 맙니다. 규칙을 위반한 기술은 기술로 인정되지를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믿음이 아무리 좋다 해도 주님이 정해 주신 규례를 어겨 가면서 잘 믿을 수는 없습니다. 운동 선수는 규칙을 잘 지켜 가면서 기량을 살려 나갈 때에 그것이 참 자기의 기술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규칙과 규례를 잘 지켜 나가면서 십분 믿음의 생활을 잘 해 나갈 때, 바로 그 믿음이 참다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I. 주의하라(11:53-12:1)

① 그동안에 주의하라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 그 동안에... 주의하라"(11:53-12:1)

말씀을 계속하시다가 끝에 가서 "주의하라" 했습니다. 이 내용은 한 마디로 "그 동안에 주의하라" 입니다. 여기서 "그동안"이란 일정한 기간인데 그 기간 안에는 너희가 조심하고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이 어느 기간입니까. 53절부터 54절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참 무시무시하고 괴로울 때입니다.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 이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한 번은 가버나움 동네 어느 집에 들어가서 교훈을 계속하는데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중에는 바리새인도 서기관도 율법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한마디 한마디하시는 말씀이 어쩌면 바리새인들과 그 서기관들에게 자신들의 비행을 쪽집게로 집어내듯이 꼭꼭 집어내 주는 말씀인지 자기네들만 들으라는 소리는 아닌데 어쩌면 나보고만 하는 소리 같았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듣다 보면 나보고만 들으라는 소리는 아니고 성경 말씀에 의해서 원리가 이렇다 하는데 어쩌면 그게 꼭 나보고만 하는 소리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여기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어쩌면 저것은 나만 들으라는 소리구나 쪽집게로 집어내듯이 우리의 비행을 그렇게 집어내는구나" 싶을 때 바로 믿고 제대로 믿는 사람 같으면 주여 "옳습니다"하고 무릎 꿇고 항복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더 반발을 합니다. "그 집에서 나오실 때에 저희가 맹렬히 달라붙어..."

어떻게나 예수님한테 삿대질하고 달려드는지, 어떻게나 멱살을 거머잡고 늘어지는지 미친 개 달려들 듯 달려들었습니다. 그것을 본문에는 "맹렬히 달라붙어"라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고.." 힐문이라고 하는 것은 아예 책잡으려고 계속 물어보는 것입니다.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무언가 자꾸 흠잡으려고 계속 묻는 것을 "힐문"이라고 합니다. 학생 때에 선생님 골탕 먹이려고 뻔히 아는 걸 자꾸 물어보지 않습니까? 그것도 일종의 힐문입니다. 예수님께 그 정도를 지나서 어떻게든지 책을 잡으려고 되지도 않는 말을 되풀이 묻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 다음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 아닙니까. 그 말씀에서 무엇인가 꼬투리를 잡아 보고자 해서 목을 지키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많이 대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말꼬리를 잡으려고 하는 사람이 가장 악질적인 사람입니다. 말꼬리 잡는 사람이란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 내가 옳으냐 네가 옳으냐, 내가 그르냐, 네가 그르냐는 근본 문제를 따지다가 자기가 불리하고 자기가 뒤집어쓰게 되면 어떻게 해야 다시 뒤집어씌울까 하는 자가 말꼬리 잡는 사람입니다. 근본 문제를 떠나서 상대방에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말 한마디를 실수해 버렸습니다. 말 한 마디 실수해 버리니까 실수한 그 말 한 마디를 계속 걸고 늘어집니다. 그러니까 근본 문제에서 초점을 바꿔 버립니다. 엉뚱하게 딴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그럴 때 "이 문제는 네가 잘못이다"하고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가장 악질이 항상 말꼬리, 즉 말미를 잡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과는 아예 상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악질들입니다. 이렇게 악착같이 미친개처럼 달라붙어 흠을 드러내고 말꼬리를 잡으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 있을 때에 믿는 사람은 조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흠만 잡으려 하고 흠을 들추어내려고 할 때 안 걸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럴 때에 몸조심하고 말조심하고 행동 하나하나 조심하라, 걸릴 수 있는 고리를 만들어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악질적인 사람들과 상대하면서도 조심할 뿐만 아니라 좀 친한 사람도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항상 친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제 살을 몽땅 줄 것 같아도 내일 가면 등을 돌리고 원수처럼 될 때가 있습니다. 살을 발라 먹일 듯 친할 때에는 전부 다 빼줍니다. 속과 겉을 다 빼줍니다. 그러다 보니 속속들이 다 아는데, 등을 돌려대서 그 다음에 돌아섰다 하면 모든 문제가 곤란해집니다. 완전히 배신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심하지 않고 악질적인 인간에게 물리거나 친하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 손해 보는 것은 우리들의 믿음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때에 우리는 조심해야 믿음을 지키고 열심을 지켜 나갈 줄을 믿습니다.


② 먼저 주의하라(12:1)

"그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주의하라"(12:1)

사람이 수만 명이 모였는데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계속 흠을 잡으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외에 대부분은 호기심찬 구경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무엇인가 예수님에게 배우고 따르고자 하는 진실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은 다 제쳐놓고 열 두 제자에게만 하는 이야기가 "너희들 먼저 조심하라" 이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 먼저 조심해야 됩니다. 말할 때도 조심하고 행동할 때에도 주의하지 않으면 실수합니다. 실수해 놓고 그 다음에 조심하고 후회한들 소용없습니다. 외양간도 소 잃기 전에 고쳐야지, 소 잃고 난 다음에 외양간 고쳐서 무엇합니까? 그래서 먼저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면 베드로를 보십시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베드로가 이 신앙을 고백한 다음에 얼마나 주님께 칭찬 받았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은 마지막 길이요. 올라가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반역하고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이다. 그러면 나는 죽는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3일만에 살아난다."고 하실 때에 베드로가 나서더니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고 하는 이야기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다니요, 누가 죽이며 왜 주님이 죽어야 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안 됩니다"고 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하셨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사탄이란 말이 아닙니다. 네가 하는 말이 지금 사탄의 소리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죽어야 된다 하는데 네가 살아야 된다 하며, 내가 해야 된다 하는데 네가 왜 아니라 하느냐. 이것이 바로 사탄의 소리랍니다. 조금 전까지도 제일 잘 믿는다고 칭찬 받았던 사람이 즉시 돌아서서 사탄의 소리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교훈입니다. 잘 믿는다고 칭찬 받던 사람도 돌아서서 마귀 소리하는 사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겁니다. 바로 베드로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말조심하지 않으면, 잘 믿는다고 하고 오래 믿는다 하고 직분 가졌다 하는 사람이 마귀 소리하고 다닐 수가 있습니다. 말한 것은 주워 담지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기 전에 먼저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다가 결박당하고 악당들에게 끌려갈 때 베드로가 칼을 빼서 죽이려고 찔렀는데 그만 칼 쓰는 솜씨가 없었던지 귀 하나만 떨어뜨리고 끝났습니다. 예수님이 그 장면을 보시고 귀를 주워 붙인 다음에 "이 무슨 짓이냐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책망하셨습니다. 이 짓하면 망한다 그 말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고 칭찬 받았던 사람도 망할 짓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 짓하고 망하게 된 것입니다. 다음에 보면, 베드로가 가야바의 법정까지 살며시 뒤따라가 안 믿는 사람들 축에 섞여서 불을 쬐고 있는데, 때마침 그 귀를 깍아 버린, 말고의 친척 되는 여자 하나가 베드로를 가만히 보더니 붙잡고 늘어집니다. "네가 내 친척 말고의 귀를 깎았지. 네가 바로 예수패야, 너 한번 죽어봐." 그래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세 번이나 부인하고 예수님을 저주하지 않았습니까. 칼 쓴 까닭에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망할 짓 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하지 않고 조심하지 아니하면 내가 한 짓 때문에 내가 망하게 되는 결과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먼저 주의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③ 외식을 주의하라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12:1절 하)

이 외식이라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히포크리시스'라고 해서 이 말은 배우들이 나와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말을 우리 성경에서 번역할 때에는 외식(外飾)이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는 연극과 외식이란 똑같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예를 들면 집 안에서는 내 아내가 엄연히 있습니다. 내 아들 딸들이 엄연히 있습니다. 그런데도 무대에 나타났다 하면 분명히 그 사람은 딴 여자를 끌어안고 "여보" 그리고 "내 아내"라고 합니다. 또, 남의 자식 가지고 내 아들이요, 내 딸이라고 합니다. 집에 가면 엄연히 내 아내와 내 아들, 딸이 있는데, 무대에서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내 아내가 되고, 남의 아들, 딸들이 내 아들, 딸들이 되어 버립니다. 사업을 하지도 못하면서 일류 사장 노릇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집 안에 있을 때 사람과 무대에 나섰을 때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연극입니다. 이것이 외식입니다. 이 말은 교회에 나왔을 때에는 참 거룩한데 집에 돌아가면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외식이라 합니다. 믿는 사람이 이렇게 될까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하라. 그동안에 주의하라. 먼저 주의하라. 외식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II. 담대하라(두려워하지 말라)(2-7절)

성경에는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는 말은 소극적인 말이고 부정적인 말입니다. 하지 말라, 그러나 이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때에는 담대하라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담대하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① 역사적인 심판을 알고 담대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2-3절)

이 내용은 이 세상에 감추어진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숨겨진 일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추어진 것이 반드시 때가 되면 드러나고 숨겨진 일이 반드시 때가 되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저 어두운 골방에서 이야기 한 것이다 지붕 위에 전파되고 귀에 대고 소곤 소곤한 이야기가 백주에 만민에게 알려진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다 그렇게 되는 법입니다. 지금은 불의가 기승을 부리고 총칼의 권세를 의지하고 불의가 억척스럽게 승리한 양 날뜁니다. 정의가 땅에 묻혀 밟히고 억울하게 울고 있습니다. 그럴 때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때가 되면 이 불의는 땅에 밟아 없애 버리고 정의가 머리 들고일어나 승리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이, 바리새인들의 저 가증스러움이 다 숨겨지고 겉으로는 멋지게 드러났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숨겨진 것 다 드러내고 감춰진 것 다 드러낼 때가 있고, 또한 너희들이 정말 그의 와 너희들의 선이, 너희들의 헌신과 봉사가 다 숨겨지고 너희들이 당하는 것은 멸시 천대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다 드러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시간을 통해서 정확히 우리들에게 시(是)와 비(非)를 가려주고 정확히 드러내 주어서 심판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억울한 일 있습니까. 때가 되면 하나님이 가려 주십니다. 다른 사람들의 불의를 보고 참을 수 없습니까. 잠깐만 참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다 시와 비를 가려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흘러가는 역사를 보고 두려워할 것 없다는 겁니다. 근심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우리들에게 시와 비를 가려 주는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판을 믿고 우리는 담대하게 믿음 생활, 의로운 생활, 선한 생활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② 예수를 믿고 담대하라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4절)

여기 보니까 세상의 권세를 잡은 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기껏 죽여 봐야 그 육신밖에 더 죽이겠느냐. 실컷 두들겨야 죽이기 밖에 더하겠느냐. "내 친구 너희에게 이르노니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는 것을 믿어 달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내가 너희에게 친구가 된다는 것을 믿어 달라고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내 친구, 예수님의 친구 되심을 믿고 담대해야 하겠습니다. 친구가 무엇입니까? 너의 일을 나의 일처럼 발벗고 나서 앞장서서 도와주는 것이 바로 친구 아닙니까. 좋을 때는 친구라고 달려들고 손해 볼 때는 꽁무니 빼는 것이 친구입니까. 아닙니다. 아는 사람은 되어도 친구는 아닙니다. 친구는 너의 모든 일이 곧 나의 일이라고 발벗고 나서 도움의 손을 뻗치는 사람이 친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모든 문제를 너희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 문제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가져가십니다. 죄 문제도 가져가십니다. 가난 문제도 가져가십니다. 질병문제도 가져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온갖 건강과 축복과 그리고 의라고 하는 보따리를 대신 바꾸어 주시는 예수님이 모든 좋지 못한 것 가져가시고 좋은 것을 바꾸어 주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일진대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③ 하나님을 믿고 담대하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5-7절)

여기서 마땅히 두려워할 자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해야 할 이유를 세 가지로 이야기하는데, 첫째로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심판하여 시비를 가려 줄 테니 너희가 억울하고 손해보고 괴로움 당해도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믿고 모든 불행스러운 것 가져가고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시는 예수님을 친구로 믿고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에 하나님에 대해서 세 방향으로 설명하였는데 세상 박해자들은 너희를 붙들어다가 실컷 때려야 죽이는 것밖에 더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일밖에 주관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은 너희를 죽이고 지옥까지 보내시는데 그가 더 무섭지 않으냐 무서워하려면 하나님이나 무서워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살았을 동안에 죽이기도 하고 죽은 후에 지옥까지 보내니까 금생과 내생, 현세와 내세 이것 전부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믿을진대 뭐가 두렵느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두려워하겠으면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이 알까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이 볼까 들을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이 알까 두려워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이 또 들을까 두려워하는 일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몰라도 다 알고, 사람이 못 들어도 다 듣고, 사람이 다 못 보아도 보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다 샅샅이 알고 보고 듣고 계신 하나님이라면 내 문제를 가장 정확하게 알 것이 아닙니까? 이런 하나님이 밥 못 먹여주고 잠 못 재워주고 내 문제 해결 못할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을 믿을진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또 무엇으로 설명하고 있습니까? "참새 다섯 마리가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되지 아니하는도다"(6절)

참새 다섯 마리가 팔려 가는데 그 중의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이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말 모든 인간의 만사를 작은 데까지 전부 관여하시고 개입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허락 없이 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무리 우리를 해치려고 해도 하나님의 허락 없으면 되지 않습니다. 참새 다섯 마리를 명포수가 쏴도 그 중에 한 마리도 허락 없으면 안 떨어지는 것이니 이런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진대 두려워할 바가 아니요, 담대히 믿고 따라야 할 바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니라"(7절)

보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정확하신가.

우리가 우리 문제를 제일 정확히 알지 누가 압니까. 우리만이 우리 문제를 제일 세밀히 압니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머리털 몇 개인지 압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머리털까지라도 다 세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확하시고 틀림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부인이 남편과 부부 생활 할 때에 시시한 남편 만나게 되면 큰 변입니다. 이 사람은 월급 봉투 맡겨 놓은 다음에 꼭 가계 기록을 하게 한 후에 월말마다 장부 검열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이런 시시한 남자가 어디 있어요. 아내에게 월급 봉투 맡겼으면 시장 바닥에 나가 떡을 사먹든 순대를 사먹든 맘대로 하라고 맡겨 놓을 것이지 장부 검열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좁쌀영감입니다. 처녀 총각들, 딸 가진 부모님들은 하나님 우리 딸 제발 좁쌀영감 만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 너무 무관심한 남자 만나도 큰 변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우리 집사람한테 뭐 선물 하나 사다 준 일이 없습니다. 자기가 알아서 해 입고 그렇지 않으면...그 돈이 그 돈이지만 내가 사다 주는 것 입는 것과 자기가 사서 입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못하겠다 그 말입니다. 창피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남자와 살 때 솔직한 말로 이야기하면 멋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묘하십니다. 하나님은 멋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좁쌀영감이시고 좁쌀영감 같으면서도 멋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알 것은 자세히 다 알고 계시면서도 얼마나 멋이 있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들었으면서도 못 들은 척하고, 보고서도 못 본 척 하십니다. 그러니까 말할 수 없이 크시면서도 정확하시고, 정확하시면서도 크신 분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다 하나님이 모르는 것 같아도 알고 다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염려하지 말고 담대히 믿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III. 기뻐하라(염려치 말라)(8-12절)


① 예수님의 시인 때문에 기뻐하라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8-9절)

우리가 기뻐해야 될 이유, 염려하지 말아야 될 경우가 무엇인가 하면 이 세상의 총 칼 가진 권세 있는 자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해서 붙잡아다가 너희를 치고 살림을 빼앗고 죽이려고 했을 때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 앞에서 "난 예수 몰라요. 예수 안 믿겠습니다" 하고 부인하는 날에 내가 이 다음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너희를 모르겠다"고 하겠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럴 때 "나는 믿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나를 인정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고난을 당할 때에 내가 예수님을 인정하면, 예수님의 인정을 받을 것을 생각하고 환란 중에서도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가정 생활에 비교하면 좋습니다. 아내로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냐 하면 남편에게 인정받는 여자입니다. 동네 사람들한테는 온갖 칭찬을 다 받습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고 누구의 부인은 정말 제일이라고 아무리 인정받고 칭찬 받아도 남편이 보기도 싫어 한 상에 앉기도 역겨워 하면 불쌍하고 불행한 여자입니다. 결국은 결혼생활을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동네 사람에게 인정을 못 받아도 들어가면 내 아내가 최고라는데 어떻게 할 것입니까. 차라리 이것이 귀하지 않습니까. 동네 사람에게도 남편에게도 함께 인정받으면 더 이상 좋을 것이 없겠지요. 우리가 이 세상 사람에게 인정받아도 좋고 못 받아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날 인정해 주어도 좋고 인정 안 해주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인정받는 아내가 행복하듯이 주님께 인정받는 신자는 참 기뻐할 신자인 것입니다.


② 예수님의 사죄 때문에 기뻐하라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10절)

말로 인자를 거역한다는 말씀은 무엇을 말합니까? 성령을 모독하면 사하심을 못 받고,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는다니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엄연히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왜냐하면 말로 인자를, 예수를 거역한다는 말은 믿는 사람이 육신이 약하고 마음이 약하고 믿음이 약해서 혹시 정말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서 주님을 한 번 부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님 앞에 정말 죄송스러운 일을 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을 거역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 성령이 나를 감동시킬 때에 내가 믿고 신앙을 고백하고 구원 얻는데 성령의 감동을 물리쳐 버립니다. 즉 믿지 아니합니다. 감화를 소멸시켜 버립니다. 그럴 때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해도 사함 받고 구원 얻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부족해도, 믿는 사람은 혹시 죄를 짓는다 해도 사하심을 받고 구원 얻는다니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③ 성령의 가르침 때문에 기뻐하라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11-12절)

전라남도 순천에 훌륭한 목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나덕한 목사님이라는 분입니다. 그 분은 전도사로 가셔서 목사 안수 받고 죽을 때까지 그 교회에서 봉사했습니다. 한 교회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덕이 있던지 순천 서장이나 순천 시장이 부임해 오면 그 목사님께 먼저 와서 인사드리곤 했습니다. 순천은 우리 강동구의 절반도 못 되는 곳입니다. 그 분이 여순 반란 사건 때 별량으로 피난을 갔다가 반란군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런데 반란군 장교 중에는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얼굴은 못 보았지만 훌륭한 목사 한 사람 붙잡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 와서 "여기 예수 믿는 놈 나와" 했습니다. 예수 믿는 놈이라고 손들고 나가 죽을 사람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목사님 마음 속에서는 성령이 "손들어"하는데, 한 쪽에선 "들지 마라"합니다. 아무도 안 나오니까 이번에는 "목사놈 나와" 소리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손들어"하는데 마음은 "들지 말라"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 장교는 목사님을 끌고 나가더니 쫄병에게 이 사람은 악질 중의 악질이니까 내가 처치한다고 산골로 끌고 들어가서는 총을 허공에 몇 번 쏘고 빨리 도망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이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나왔습니다. 그리고 총회장까지 지내고 그 교회에서 세상 떠났습니다.

성령이 가르쳐 줄 때 손들고, 가르쳐 줄 때 말하고, 성령의 지시를 따라 사는 사람, 복된 사람이요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삶의 규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는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주의하지 못할 때 함정에 빠지는 수가 많습니다. 둘째는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믿는 바가 있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셋째는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염려는 삶에 아무런 유익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들은 그 규례대로 살아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